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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중 천주교 선구자 정약종(丁若鍾)과 서광계(徐光啓)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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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4 ㅣ No.1231

한·중 천주교 선구자 정약종(丁若鍾)과 서광계(徐光啓) 비교 연구*

 

 

국문 초록

 

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평신도인 한국 측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중국 측의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 실천을 비교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초창기 천주교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 천주교 초기의 주춧돌 역할을 담당하였던 정약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 스스로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깨닫고 찾은 참 진리를 어떻게 전교하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반상관계가 명확하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정약종의 전교 태도를 살펴보는 데 상당히 유의미하였다. 셋째는 문서로 인한 선교에 대한 것이다. 특히 정약종이 『쥬교요지(主敎要旨)』를 언문으로 작성한 이유는 소외된 이들을 선교의 대상자로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식이 있는 양반들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상민과 천민을 대상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로는 정약종이 일기에 궁흉지언(窮凶之言)을 남긴 이유는 자신의 주장과 죽음으로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성리학적 국가질서를 동시에 극복해 낼 수 있기를 바랐던 점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 천주교회의 3대 기둥 중 한 명인 서광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당시 사대부들이 천주교에 입교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축첩(畜妾)에 대해서 서광계는 담대하게 천주교 입교를 결정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 등에서 그의 견고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주변 인물에 대한 전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서광계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직접 선교사를 찾아가 종교에 대해 알아본 후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자신의 고향에 천주교 선교사를 모셔와 천주교를 전파하는 서광계식의 전교방식을 활용하였다. 이후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셋째로는 남경교난과 같은 어려운 때에 호교서(護敎書) 집필을 통해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옹호하고 보호한 서광계의 공헌은 지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정약종과 중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서광계를 약 200년이라는 시간 차를 극복하고 비교 언급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으나, 다음과 같은 공통부분을 도출해 내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 첫째로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초기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주교 전파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약종은 천민과 부녀자들에게, 서광계는 서광계식 전교방식으로 선교사를 모셔와 불모지인 곳에 천주교를 개교하는 식의 서광계식 전교방식을 구축하였다는 점 역시 버려진 대상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또 이들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저술활동을 통한 전교 즉 문서 선교라는 방식을 통해 초기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그들의 인생에 있어 42세의 나이는 이들에게 아주 중대한 시기였음을 확인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살펴본 결과 교리를 몸소 실천한 한·중의 대표적 인물을 비교해 보면서 그들이 각자의 나라에 초기 천주교를 확립한 공헌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의 신앙을 재조명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쇄신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향후 발전적인 한·중 천주교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한·중 천주교의 토대를 살펴보는 것은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이로써 본 논문은 향후 한·중 천주교가 상생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

 

 

1. 머리말

 

한국과 중국 천주교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평신도들은 많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중에서도 그 역할이 아주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측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중국 측의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 실천을 비교 연구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이고 다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뿐 아니라, 올바른 신앙인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약종과 서광계를 대표 인물로 지목하고 언급한 것은 각자의 나라에서 평신도로서의 대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초창기의 인물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천주교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1) 중국의 서광계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의 공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중국 역법(曆法)에 대한 공적, 서양 서적에 대한 번역 및 윤색(潤色)을 통해 서양 선진 문물을 도입한 역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다. 특히 본 논문과 관련된 것으로 천주교 전파에 있어 서광계가 세운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판단하였기에 한국의 정약종과 더불어 중국 천주교 초창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하고 비교 연구하게 된 것이다.

 

먼저 한국 천주교 초기의 주춧돌 역할을 담당하였던 정약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 스스로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그 스스로가 참 진리를 찾아 깨달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렇게 깨닫고 찾은 참 진리를 어떻게 전교하였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가장 쉬운 전교는 자신 집안의 식솔들에 대한 전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족과 그 주변 인물에 어떻게 천주 신앙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그의 주변 인물로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신앙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한 것을 살펴볼 것이다. 천민 신분이었던 황일광과 같은 사람에게 반상관계가 명확하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신앙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한 정약종의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문서로 인한 선교에 대한 것이다. 정약종은 자신이 신봉하는 신앙을 분명하고 보다 쉽게 전교하기 위해서 문서로 인한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리서의 저술은 자신의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전교를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쥬교요지』를 들 수 있다. 문서 선교를 위한 일련의 과정과 이러한 문서 선교를 통해 전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고자 한다. 넷째로는 신앙 실천에 대한 결실을 언급해 볼 것이다. 순교에 임하는 그의 자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인 것을 살펴봄으로써 평신도로서 천주 신앙을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혈 순교에 대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측의 정약종을 살펴봄과 더불어서 중국 측에서는 중국 천주교회의 3대 기둥2)이라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서광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광계는 자신의 지위를 통해 서양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문서학서를 저술하여 서양의 선진 학문과 종교서적을 중국에 보급 및 전파를 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서광계가 많은 서적을 저술하면서 학문적 선교도 벌였으나, 이와 더불어 천주교 신앙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으로 보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비교 연구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서광계의 연구는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대한 연구이다. 이는 당시 사대부들이 천주교 입교를 가장 꺼렸던 축첩에 대한 문제를 서광계는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서광계는 당시 외아들만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손자를 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주변 인물에 대한 전교활동이다. 가솔들에 대한 전교는 물론이었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전교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광계의 전교방식이 그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셋째로는 간단하게나마 문서를 통한 선교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推案及鞫案』,3) 『邪學懲義』, 『쥬교요지』,4) 『백서』, 『韓國天主敎會史』,5) 『明史』,6)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7) 『在華耶穌敎會士列傳及書目』,8) 『江南傳敎史』 1·2卷,9) 『在華耶穌敎會士列傳及書目補編』,10) 『中國敎案史』,11) 『그리스도교의 中國 傳來와 東西文化의 對立』,12)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13) 「辯學疏稿」,14) 「闢妄」,15) 「闢釋氏諸妄」,16) 『江南傳敎史』,17) 『天主敎傳行中國考』,18) 『兩頭蛇』19) 등을 중심으로 하며, 아울러 기존 발표된 논문을 살펴볼 것이다.20)

 

이상의 비교 연구를 통해 교리를 바탕으로 실천적 삶을 살아낸 정약종과 서광계의 참 신앙인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약전(略傳) 및 천주교 입교


1) 정약종

 

정약종의 탄생지와 탄생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탄생지는 경기도 광주 땅의 마재(廣州郡 草阜面 馬峴里, 현 南楊州市 瓦阜邑 陵內里)에서 태어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21) 또 태어난 시기는 정약종의 순교일을 기준으로 역산하여 추산할 수 있는데, 1801년 2월 27일 순교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22)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는 1760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정약종의 가계는 초기 천주교 창설과 관련된 인물들과 혼인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천주교 신자 간의 통혼 관계로 이미 형성되어 있던 인척 사이로 천주 신앙이 전파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기 천주교 공동체의 역할과 위치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약종의 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정약종은 정재원(丁載遠)과 윤덕렬(尹德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로는 배다른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이 있었다. 정약현의 부인은 이벽(李檗)의 누이였고, 정약현의 딸은 황사영(黃嗣永)의 부인이다. 정약현 아래로 정약종과는 동복형제로 형인 정약전(丁若銓)과 동생인 정약용(丁若鏞)이 있었다. 정약종의 어머니는 윤지충(尹持忠)의 고모였다. 그리고 이승훈(李承薰)은 정약종의 누이와 결혼했으므로, 정약종과는 자형과 처남 사이였다. 이러한 그의 가문은 초기 천주교 창설과 관련된 인물들과 통혼을 통해 상호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23)

 

특히 정약종은 이수정(李秀廷)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정철상(丁哲祥)을 낳았다. 이후 아들 정철상은 신자인 홍교만(洪敎萬)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정약종과 홍교만과는 사돈 간이 되었다. 그러나 정약종의 부인은 정철상을 낳고 사망하였고, 정약종은 천주교에 입문한 후 가족들의 권유로 인해 류조이(柳召史)와 결혼하였다. 이 사이에서 정하상(丁夏祥)과 정정혜(丁情惠) 남매를 낳았다.24)

 

정약종의 천주교 입교에 관련된 내용은 그의 추국에서 알 수 있다. 정약종은 “27세 때인 병오년(1786) 3월에 비로소 중형인 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자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천주교에 대해 듣고 실천하게 되었다.”25)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보아 대략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시기는 1786년 3월경으로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늦게 천주교 신앙을 봉행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26)

 

정약종은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될 당시 천주교에 대해서도 배웠던 것으로 확인되나, 즉시 따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벽(李檗)이 정약종에 대해 “천주교와 관련된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참된 길 즉 유학자의 길에서 어긋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아직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4~5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입교하게 된 것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은총의 권유에 순종하였다.”27)라는 말로 그의 입교를 언급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종은 그 스스로 자신의 세례명을 아우구스티노로 정한 것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마찬가지로 성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주저하고 망설였다는 점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성인을 자신의 영세 주보(主保)로 삼기를 원하였다28)는 것을 볼 때, 처음 입교 때에는 상당히 주저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입교 이전의 정약종에 대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상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 아우구스티노 약종은 성격이 곧고 머리가 총명하고 연구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점잖고 학식 있는 인사들과 교제하기를 즐겨, 李家煥 등과 같이 당시 이름 있는 선비들의 친구가 되었다. 정약종은 일찍이 과거를 위한 학문은 너무 무게가 없다고 생각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무 방해도 없이 哲學과 倫理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쉬웠을 것이나, 한동안 그는 老子의 道에 푹 빠져 不死의 법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이론도 알맹이가 없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29) 그뿐만 아니라, 그는 또 醫學 연구도 진행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30)라고 정약종의 인물에 대해 평하고 있다.

 

또 정약종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알렉시오)은 정약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약종은 조그만 이치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먹고 자는 것에 흥미를 잃고, 반드시 그것을 깨달은 후에야 그쳤다.”라고 말하며, 또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은 “말을 타고 있거나 배를 타고 있을 때도 묵상 기도를 그치지 않았고,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혀가 지치고 목이 아프더라도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지 않으며,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그와 있으면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31)고 그의 성격과 성실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우리는 정약종의 인물됨과 그의 성격 됨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2) 서광계

 

서광계(徐光啓, 1562~1633)32)는 1562년(嘉靖 41)에 태경방(太卿坊, 현 上海市 黃浦區 喬家路)에서 태어났다. 1581년(萬曆 9년) 서광계가 금산위(金山衛)의 시험에서 수재(秀才)가 된 후, 같은 현의 오소계(吳小溪)의 딸과 결혼하였다. 1584년 서광계의 조부가 사망하자, 서광계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갔고, 거기에 더하여 지역의 수재(水災) 등이 겹쳐져, 서광계는 출로를 찾기 위해 1588년 동기창(董其昌), 장정(張鼎), 진계유(陳繼儒)와 함께 태평부(太平府, 현재의 安徽 當涂)의 향시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낙방하자, 서광계는 이후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광동(廣東) 소주(韶州)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소주에서 1595년 서광계는 처음으로 예수회 선교사인 카타네오(Lazare Cattaneo 郭居靜, 1560~1640)를 만나게 되었다.33) 서광계는 이렇게 새로운 곳에서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1596년(만력 24) 서광계는 상해의 조봉우(趙鳳宇) 집으로 가서 훈장으로 지역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조봉우가 광서(廣西) 심주 지부(潯州 知府)에 임명되어 임지로 이동해야 하였으므로, 서광계 역시 그를 동행하여 함께 남하하였다. 이때 서광계는 소주(韶洲)를 지날 때,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이때 마태오 리치는 북상하기 위해 이미 소주를 떠났을 때였으므로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마태오 리치는 이때 소주를 떠나 북상하여 남경(南京)에 도착하였으나, 거주할 수가 없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남창(南昌)에 거주하고 있었다.34)

 

이후 1597년 서광계는 조봉우의 아들 공익(公益)과 함께 북경 순천부(順天府) 향시(鄕試)에서 해원(解元, 향시 1등)이 되어 당시 시험 감독관이었던 초굉(焦竤, 1540~1620), 장오전(張五典)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1598년 회시(會試)에 불합격한 서광계는 고향인 상해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600년에는 남경에 거주하던 은사 초굉을 배방하기 위해 남경을 방문한 서광계는 구태소(瞿太素)의 소개로 마태오 리치와 첫 만남을 가졌다.35) 당시 문사(文士)인 조가회(趙可懷), 오중명(吳中明) 등의 집에서 마태오 리치가 간행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보고 “비로소 마태오 리치 선생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고, 그는 당시 그 지역에서 전교를 하던 마태오 리치를 배방하고 그와 오랜 시간 동안 담화를 나누었다. 서광계는 마태오 리치의 인생 종말과 천지의 주재에 대한 말을 듣고, 마태오 리치를 “시작과 끝을 알고 있으며 국내외 박물(博物)에 통달한 군자”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마태오 리치 신부가 1600년 5월 18일 북경으로 가기 위해 남경을 떠났으므로,36) 서광계와 마태오 리치의 교류는 계속되지 못하였다.37)

 

1603년(만력 31) 서광계가 다시 남경에 와서 “교당으로 들어가면서 성모상을 보게 되었으며, 심신(心神)이 교감하여, 묵시적으로 그 학(西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38)고 말하였다. 이때, 마태오 리치는 이미 북경에서 전교를 하고 있었고, 남경에서 교무를 주관하던 예수회 선교사인 로차(Joannes de Rocha, 羅如望, 1566~1623)가 서광계를 맞이했다. 로차 신부는 서광계에게 마태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천주십계(天主十誡)』를 주었고,39) 서광계는 당일 그 집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여서는 잠도 자지 않고 독파하여, 교를 받아들일 마음을 세웠다40)고 하였다. 다음 날 그는 로차 신부를 찾아가 입교(入敎)를 청하였고, 로차 신부는 놀라워하였으나, 며칠간의 여유를 두고 진정으로 입교를 원하는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이때 서광계는 “십계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첩을 들이지 말라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서광계는 외아들만 있었고, 아직 손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로차 신부는 “아들이 있고 없고는 하느님의 뜻이다. 어찌 계를 범하려 하는가?”41)라는 독려의 말을 듣고, 8일 동안의 시간을 가진 뒤, 1603년 1월 15일42) 로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세례명을 ‘바오로(Paulus)’로 정하였다.43)

 

서광계는 세례를 받은 다음 해인 1604년(萬曆 32)에 시행된 과거에서 진사가 되어,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44)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진사(進士)가 된 후, 외아들 기(驥)가 장손 이각(爾覺)을 낳았다.45) 서광계는 이후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전에 두 번의 회시(會試)에서의 낙방을 ‘성령의 안배’라고 하였다. 만약 “일찍 과거에 급제[登科]하였다면, 첩을 들였을 것이고, 첩을 들였다면 첩을 내보내야만 입교할 수 있었으므로, 입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회상하며 이는 모두 성령의 안배였다.”46)라고 말하였다.

 

이후 서광계는 한림원 서길사,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역임하는 등 주요 요직을 섭렵하였고, 역서(曆書)를 완성한 후에는 태자태보(太子太保)로 문연각(文淵閣)에 들어가게 되었다.47) 서광계가 역국(曆局)을 설립하게 된 것은 “황제가 일식의 측정이 잘못되어 대관(臺官)의 죄를 물으려고 할 때, 황제에게 대관은 죄가 없다. 곽수경(郭守敬)48)의 역법을 근본으로 하여 측정한 것으로 원대의 역법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관은 잘못이 없다.”고 언급하면서 역법 수정을 건의하였다.49) 이에 황제가 새로운 역법을 만들라는 명령에 그는 서양 선교사인 롱고바르디(Nicolo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 슈렉(Johann Schreck, 鄧玉函, 1576~1630),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 등과 함께 일식을 계산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서광계는 역국의 책임자가 되었다.50) 이후 서광계는 자신이 조정의 직무를 사직할 때에 이르러서는 황제에게 슈렉 신부 사망으로 공백이 생기는 자리에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51)을 역국(曆局)에 추천하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제자이며 신자인 산동 포정사(布政司)였던 이천경(李天經, 베드로)52)을 역법에 밝다고 하여 역국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추천하는 등53) 자신이 사직한 후의 역국 업무를 천주교 관련 인사들에게 완벽하게 인계하는 모습에서 그의 주도면밀함을 볼 수 있다.54) 서광계가 사망하자 신자들은 서로 서광계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누가 성교회의 간성(干城)이 되겠는가? 당연히 하늘에서 대부(大父)가 강보에 싸인 우리 중국을 보호할 것이다.”55)라며 중국천주교에서 대들보 역할을 하던 서광계를 잃은 슬픔을 대변하였다.

 

 

3. 전교 활동


1) 정약종

 

정약종의 전교에서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전교라고 할 수 있다. 정약종의 자식인 전처와의 소생 정철상(丁哲祥), 두 번째 부인인 유조이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정하상(丁夏祥)과 정정혜(丁情惠)는 모두 세례를 받았고, 순교하였다. 첫째 아들인 정철상은 아버지와 같은 해에 순교56)하였고, 둘째 부인과 아이들은 1831년 같은 해에 순교하게 되어 한 가족이 모두 성인과 복자가 되는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한 집안의 부모 자식 온 식구가 모두 성인과 복자가 된 예는 아마 정약종의 일가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된다.

 

정약종은 자신의 가정을 성가정으로 만들어 가면서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전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을 아래의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신과 신분을 달리하는 천한 사람들에게 전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교회 활동으로 명도회57)와 그 회장직을 맡았던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먼저 자신과 신분이 다른 천한 사람들에게 전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포지방 홍주(洪州)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58)은 조선시대 가장 천대받던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이들은 종들보다도 더 낮게 다뤄지는 지경이었고,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황일광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자기 집안에서조차 모든 사람의 멸시와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지내왔다. 이러한 황일광을 정약종은 자기 집의 하인 일을 시키면서 거주를 허락하고,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그들을 돌보면서 함께 생활하였다. 오래지 않아 황일광은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을 만나 잡혀 옥으로 끌려갔고, 황일광은 추국 때 진술하기를, “1800년 2월에 저는 광주 분원에 있는 정약종의 이웃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59)라고 하였고, 그의 동생인 황차돌(黃次乭)은 “1800년 4월경에 저의 형 일광이 광주 분원에 있는 정약종의 집 행랑으로 이사하였습니다.”60)라고 말하고 있다. 황일광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갖은 고문을 받고, 다리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고, 그의 출생지인 홍주로 보내어 사형당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 따라왔으나, 그들을 보면 어떤 유혹을 당할까봐, 황일광은 그들을 절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홍주에 도착한 당일 참수되었다.61)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62) 황일광의 이러한 순교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러한 힘은 정약종의 교리 교육에서 기인한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황일광뿐만 아니라 홍주 사람으로 정약종 노비의 아들인 최기인(崔起仁)도 정약종에 의해 교리를 배웠다. 그는 “1798년에 광주 분원에 있는 정약종의 행랑채로 이사하여 교리를 배웠다.”63)고 말하고 있다.

 

또 충청도 남포(藍浦) 출신으로 오랫동안 정약종의 머슴으로 생활한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은 추국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정약종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임대인 : 보령 한천(寒川) 출신인 생원 홍락풍(洪樂豊)이 상민 김득근(金得根)의 집에 부쳐 살았는데, 저에게 말하기를, ‘생각건대 당신은 의탁할 데가 없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합시다.’라고 하였으므로, 저는 그를 따라 광주 두현(斗峴, 마재의 구술 오기)의 정 생원(즉 정약종) 집으로 가서 이른바 십계를 배웠습니다.”64)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외에도 정약종은 자신의 행랑채에 1800년 이전부터 살던 홍주 출신의 김한빈65)에게 신앙을 전파하였으며,66) 1798년 자신의 집에 거처하던 최기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1800년 초에는 홍주 출신 황일광을 다시 행랑채에 맞아들여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서 정약종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고, 또 남녀 구분도 뛰어넘으면서 전교를 하였던 것은 그 시대의 천주교를 대표하는 인물 중에서도 아마 거의 유일한 행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7) 이러한 차원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의 근본을 이해시키기 위해 『쥬교요지』를 저술하였을 것이다.68) 아마도 그는 아녀자들까지 포함해 하층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필요성을 느껴 교리의 근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문체 『쥬교요지』를 저술한 것으로 생각된다.69)

 

다음으로는 정약종이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던 명도회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명도회란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로서, 회의 목적은 우선 회원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 다음에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단체였다. 명도회의 구성은 회장과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로 구성되어 있다. 3~4명 혹은 5~6명으로 구성된 ‘6개의 모임 또는 모임을 갖는 장소’인 육회는 홍문갑의 집(창동), 홍익만의 집(송현), 황사영의 집(아현), 김여행의 집(사창동), 현계흠의 집(회현동),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집 한 집이었다. 황사영이 맡은 모임에는 황사영 자신과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愼行), 이재신(李在信) 등 6명이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70)

 

정약종이 주문모 신부에 의해 명도회 초대 회장에 발탁된 것은 시대의 지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적 지식도 해박하였기 때문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쥬교요지』에 대해서 주문모 신부는 예수회 신부인 드마이아(Moyriac de Mailla, 馮秉正, 1669~1748)가 저술한 중국어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더 요긴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그의 교리 지식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으며, 명도회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적임자였던 것이다.71) 특히 명도회의 창설은 『쥬교요지』의 완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룹 공부를 통해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했었고, 교리 교수법도 터득하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72) 주문모 신부의 지시 아래 정약종은 초대 회장으로서 명도회에서의 역할을 다하였는데,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명도회를 이끌어 나가는 동시에 신자들의 교리 연구 모임을 주도하거나, 전교활동을 관리하였고, 회원들의 신공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임무 이외에, 북경에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73) 이러한 명도회는 「명도회규(明道會規)」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그 목적인 교리의 연구74)와 강습 그리고 선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명도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주문모 신부에게 이름을 알린[報名] 후, 신공(神工, 교리를 공부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말함)을 1년 동안 부지런히 하면 명도회에 입회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명도회원은 먼저 가회원(假會員)이 되었다가, 신공의 성적 여하에 따라 정식회원이 되었다.75)

 

2) 서광계

 

서광계는 1603년(만력 31) 세례를 받았고, 부친 서사성(徐思誠)은 1606년 3월 26일에 세례를 받았고, 이때 서광계의 부인 오 씨와 외아들인 기(驥)도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아들 기(驥)는 세례명을 야고보라고 하였다.76) 서광계는 1607년 부친이 북경에서 5월 24일에 사망하자, 부친 시신을 상해로 운구77)던 도중 남경의 카타네오 신부에게 들러 상해에 와서 전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카타네오 신부는 1608년 9월 상해 남문(南門) 밖 교가빈(喬家浜) 서광계의 집인 구간루(九間樓)78)에 거처하게 되었다.79) 그리고 서광계는 자신의 친척 및 상해 거주 진신(縉紳)들을 모두 초청해 카타네오 신부의 강론을 듣게 하였다. 상해에 개교(開敎)한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는데, 세례자가 이미 50명이 되었으며, 서광계는 그 해 성탄절에 남경에 조문(弔問)갔다가, 자정미사에 참례하는 열성을 보였다.80) 그 다음 해인 1609년에는 상해에 두 번째 교당의 낙성식이 있었는데, 그 위치는 남문 서광계 주택 서측(西側)에 건립되었다.81) 서광계의 신앙생활의 정도를 잘 볼 수 있는 것은 부친 상중에도 두 차례 마카오로 피정을 다녀온 것을 볼 때, 그의 신심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82) 서광계 서거 이후로는 서광계의 아들 서기(徐驥)의 도움으로 상해에서는 천주교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특히 그는 1637년부터 상해에 온 블랑카티(F. Brancati, 潘國光, 1607~1671)의 상해 전교를 도왔는데, 이로써 매년 세례자가 2~3천 명이나 되었다. 또 그의 노력으로 상해 지역에 대소 교당을 135곳이나 세웠으며, 대략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1만 명에 달하였다. 서광계의 다섯 손자와 네 명의 손녀83) 모두가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장손의 손부인 유씨(兪氏)와 둘째 손녀인 칸디다(Candida, 1608~1680)가 가장 독실한 신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1640년(숭정 13) 상해에 거주하던 블랑카티는 서광계 넷째 손녀인 마르티나(Martina)의 도움을 받아 성북(城北) 안인리(安仁里)의 원 예원(豫園) 주인인 반은(潘恩)의 옛 집인 세춘당(世春堂, 현재 南市區梧桐路)을 구입해 중국 묘우식(廟宇式) 교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상해에서 “老天主堂”으로도 불리는 경일당(敬一堂)이다.84)

 

서광계는 자신의 직계가족이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자, 신앙 전파를 혼인관계를 통하여 더욱 확대하였다. 서광계는 자신의 장인인 오소계(吳小溪)를 천주교에 입문시켰다.85) 또 서광계는 그의 첫째 손녀를 애가구(艾可久)의 손자 애정괴(艾庭槐)와 혼인을 시킨 것과 서광계의 둘째 손녀를 허락선(許樂善)의 손자인 허원도(許遠度, ?~1653)와 혼인을 시킨 것은 그 두 집안이 모두 집안 선조들의 유훈을 잘 지키고, 교규도 잘 준수하는 것을 중시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86) 서광계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낮은 사람뿐만 아니라, 친구나 제자에게도 전교를 실천하였다.

 

그 몇몇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표적인 사례로 허락선(許樂善, 1548~1627)에게 전교한 것을 들 수 있다. 1610년(만력 38) 서광계는 당시 포정사(布政使, 종2품, 청 말에는 정3품)였던 허락선을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閣, 1577~1628) 신부에게 인도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는 당시 천주교를 신봉하던 사대부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있던 중국인이었다. 그러나 허락선의 입교 후의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별 특이할 만한 내용이 없는 것을 다음 두 가지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입교 후 얼마 되지 않아 관계(官界)를 떠났다는 것, 둘째로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천주교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87)

 

서광계는 허락선과 이러한 세례를 인도한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고, 서광계는 자신의 둘째 손녀인 서 칸디다와 허락선의 손자인 허원도(許遠度)와 혼인을 맺어주었다. 혼인 후, 서 칸디다의 외아들인 허찬증(許纘曾, 1627~?)88)은 모친인 칸디다의 권유로 바실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관원으로 부임한 임지인 강서(江西) 및 남창(南昌), 성도(成都), 개봉(開封) 등지에 헌금을 출연하여 성당을 세웠고, 서 칸디다 본인은 상해(上海), 숭명(崇明), 태창(太倉) 등지에 교무를 추진하거나 개척하여 ‘중국교회의 어머니(中華敎會之母, Mother of the Mission)’ 또는 ‘예수회의 자매(Sister on the Company)’라고 불렸다.

 

특히 이 칸디다에 대한 언급은 은 5,500냥을 각지 25명의 선교사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고, 송강(松江)에 천주교당을 건립하는데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680년 예수회 선교사 쿠플레(Phillippus Couplet, 柏應理, 1624~1692)는 『허태부인전략(許太夫人傳略)』89)을 편찬하여 칸디다가 그의 고향에 설립한 학교는 35곳, 다른 성에 설립한 학교는 9곳, 또 130종의 천주교 서적 간행, 버려진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렀던 교양원(敎養院)의 설립 등에 대한 통계를 내어 수록하고 있다. 쿠플레 신부는 “전국의 성당, 기도소, 교구, 선회(善會) 어느 곳도 부인의 은혜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90)고 말하고 있다.

 

서광계는 자신의 제자를 천주교에 입교시키기도 하고, 혼인관계를 통해 교우 가족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며 신앙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손원화(孫元化, 이냐시오, 1581~1632)91)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서광계의 문하생으로 자는 初陽, 호는 火東으로 강소성 가정(嘉定) 사람이다. 1621년 그는 휴가를 얻어 고향인 가정으로 돌아갈 때, 먼저 항주(杭州) 양정균의 집으로 가서 선교사 카타네오와 세메도(Alvaro Semedo, 謝務祿, 남경교안 이후에는 曾德昭로 개명, 1585~1658) 신부를 자신의 고향인 가정으로 초청하였다. 이로써 가정에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그는 자신이 자금을 대어 고향에 교당을 건립하였으며, 교당 옆에 선교사들이 거처할 주택 10여 채를 지어 카타네오와 세메도 신부를 거처하게 하였다. 이후 2~3년 내에 가정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수백여 명이었고, 남녀노소 모두 고르게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92) 그러나 그의 천주교 전교와 서양 선교사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초청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게 하는 등 전교에 노력을 하였으나, 자결을 시도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천주교 관련서적에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93) 손원화는 자신의 외손녀 왕씨를 서광계의 셋째 손자인 이두(爾斗)의 처로 시집보냈고, 외손자인 심복기(沈卜琦)를 오교(吳橋)의 병변(兵變) 이후 서광계의 문하 제자로 들여보내 교육을 받게 하여 자신으로 인해 입게 될 화를 면하게 하였으며, 서광계가 죽은 후에도 그 가정에서 돌보아주어, 손원화 후대에 훌륭한 천주교인들이 배출되게 하였다. 손치미(孫致彌)는 양광선(楊光先)의 서학과 천주교를 비판하는 서적인 『부득이(不得已)』를 예수회 책임자에게 보냈고, 그의 손자인 농상(農祥)은 자를 若望(사도 요한)이라고 하여, 세례명을 자(字)로 사용하였다.94)

 

또 손원화와 같은 시기에 서광계로부터 교육과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한운(韓雲)95)을 들 수 있다. 한운에 의해 산서성(山西省)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한운은 1620년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 신부를 강주(絳州)로 초청하여, 한운의 모친과 두 아들과 두 딸을 모두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한림(韓霖) · 한하(韓霞) 두 동생 역시 이때 세례를 받았다. 한림은 알레니 신부로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첩은 아직 돌려보내지는 않은 상태였다. 1624년 트리고 신부가 강주에 와서 또 한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96) 이렇게 서광계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시키는 것이 서광계 자신이 상해에 천주교를 개교시켰듯이, 손원화는 가정(嘉定) 지역을, 한운은 강주(絳州) 지역을 천주교로 개교시키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방식은 서광계의 천주교 전교방식을 답습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한두 사람에게 전교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그 지역 전체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서광계에 의해 천주교를 수용했던 향신(鄕紳)과 사대부 명단은 아래와 같다.

 

 

 

 

4. 저술을 통한 문서 선교


1) 정약종

 

정약종은 문서 선교에서도 한글 최초의 교리서를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보이고 있다. 정약종은 한글교리서인 『쥬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다.98) 이 책은 언문으로 쓰인 최초의 교리서로서 비유나 표현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서술되어 있다.99) 주문모 신부는 이 『쥬교요지』를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아(de Mailla)가 쓴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우수한 교리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00)

 

이 교리서는 한글로 쓰여 있어101) 아낙네와 나이 어린 사람까지도 이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깨우치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하며, 교리 문제로 고민하거나 미심쩍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깨우친 바가 많았다고 한다.102)

 

황사영은 「백서」에서 정약종의 저서인 『쥬교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그는 교우들 가운데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언문으로 『쥬교요지』 2권을 저술하여 넓게 성교의 교리를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보다 분명하게 교리를 언급하여 우매한 부녀자나 아동들이 책을 펴 보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의문이 들거나 애매모호한 곳이 없다.”고 하여 한글로 만들어진 『쥬교요지』를 통해 부녀자나 어린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전교를 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103) 이렇게 정약종 자신이 하층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권하면서,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쉬운 교리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만든 것이 이 『쥬교요지』이다.104) 이어 그는 여러 서적을 통해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는 천주의 덕과 도리를 한데 모은 총론서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나, 절반도 작성하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였다.105) 이 『쥬교요지』는 신자들에게 필사되어 널리 읽혔고,106) 주문모 신부도 『쥬교요지』의 내용이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하였으며, 오랫동안 신자들에게 유익한 교리서요 신학서가 되어왔기 때문에 정약종을 천주교회의 초대 교부(敎父) 신학자(神學者)라고 해도 좋을 것107)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쥬교요지』는 정약종에 의해 편찬된 이후, 1932년 활판본으로 개정되기까지 100여 년을 넘게 한국 교회의 교리서 역할을 담당하였고,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쥬교요지』가 총 46책이나 된다는 것을 볼 때,108) 교리서로서의 위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권위자인 최석우 신부 역시 “『쥬교요지』는 한국 교회의 교리서 변천에 있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109)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서광계

 

서광계는 생전에 많은 저작활동을 벌여 많은 저서를 남겨놓았다. 특히 대표적인 것은 1606~1607년에 그와 마태오 리치가 함께 번역한 『기하110)원본(幾何原本)』 6권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한문으로 번역한 최초의 서방 수학의 명저이다. 서방 근대수학 기본이론 체계를 도입하였고, 중국 근대 과학기술을 일으키는 초석이 되었다. 또 서광계는 용어를 점 · 선 · 면 · 평행선 · 직각 · 예각 등의 단어를 아주 적절하게 번역하였으므로, 현재까지도 그러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특히 기하학(幾何學),111) 삼각학(三角學),112) 대수표(對數表), 대수학(代數學), 할원학(割圓學) 등113)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많은 분량의 서양 학문에 대한 번역은 그의 서양학술에 대한 지적 관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그가 작성한 『기하원본』의 서(序)114)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외에도 서광계는 여러 방면에서 저술활동을 벌였다. 농업 부문에서는 1639년 정식 출간된 『농정전서(農政全書)』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농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둔간(屯墾)으로 입군(立軍)하는 것과 물을 농업에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구황작물 등에 대하여 잘 기록하고 있어, 중국의 5대 농서(農書)115) 중 가장 완벽하다는 칭송을 듣고 있다.

 

서광계는 이러한 과학 서적뿐 아니라, 천주교의 호교론적인 여러 저작을 펴냈다. 천주교 관련 저서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1608년에 마태오 리치가 저술한 『기인십편(畸人十篇)』을 들 수 있다. 『기인십편』은 천주교 호교서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3~4편은 마태오 리치와 서광계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교리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다.116)

 

또 서광계는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신부의 저작인 『칠극(七克)』 7권 내용의 단어들을 뜻이 통하도록 윤색하는 도움을 주었다. 『기인십편』과 『칠극』의 출간으로 천주교의 보급 효과는 파격적이었다.117) 특히 이러한 책들은 중국은 물론 천주교가 한국과 일본으로의 전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광계가 명대 최초의 교난에 직면하여 호교를 주장하기 위해 직접 저술한 호교서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변학소고(辯學疏稿)」118)와 「벽석씨제망(闢釋氏諸妄)」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첫째로 「변학소고」는 1616년 남경 예부시랑인 심각(沈㴶)의 1차 상소로 인해 남경교난(南京敎難)119)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광계는 좌춘방(左春坊), 좌찬선(佐賛善) 겸 한림원검토(兼翰林院檢討)의 신분으로 6월에 상소를 올려 천주교와 모함을 받는 사람들을 변호한 내용이다. 그 내용은 “멀리서 온 사람의 학술이 가장 정확합니다. 어리석은 신(臣)이 보기에는 진리라고 생각하므로 진실로 받아들이기를 청합니다.”120)라고 얘기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호교를 언급하고 있다. 불교가 동방에 전파된 지 1800년이나 되었으나, 세상의 도리나 인심을 아직 변화시키지 못하였으며, 노장사상 역시 헛된 것이며, “서학은 왕권을 보조할 수 있는 것”121)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세 가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첫째는 서방의 관련 서적을 번역하여 그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려달라는 것이다. 둘째는 서양인 신하들의 말이 유가와는 부합하고, 불가와 도가와도 어긋나서 승려나 도사들이 모두 분노하고 질시해 비방하고 헐뜯으며 유언비어를 퍼뜨리니 반드시 그 시비를 가려달라며, 만약 서양인의 죄가 드러날 경우 자신도 그들과 함께 죄를 받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미 번역된 서양 서적 30여 권과 본래의 원서 경전 10부를 모두 다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며, 그 내용이 난잡하고 도리에 어긋나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고 풍속을 바꿀 수 없다면, 즉시 추방하시고, 역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죄를 받겠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조치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관찰하여 잘못됨이 있는지, 또 연말에 정인관(正印官)이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지, 죄명이 있는지를 별도로 기록하여 3년마다 종합적인 평가를 하여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하고,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면 표창을 하여 격려하면 좋은 표징이 될 것이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적(敎籍)을 없애버리라고 강조하고 있다.122)

 

다음으로 서광계는 「벽석씨제망(闢釋氏諸妄)」이라는 글을 써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명대 천주교로 귀의한 서광계·양정균 등은 모두 불교도였던 관계로 이들의 천주교 귀의는 불교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로써 항주(杭州) 운루사(雲樓寺) 승려 연지(蓮池), 영파(寧波) 천동사(天童寺) 승려 원오(圓悟), 항주(杭州)의 이름난 유학자 우순희(虞淳熙) 등이 모두 불교를 변호하고 나섰다. 이에 서광계가 이를 반박하는 글인 「벽석씨제망」 또는 「벽망(闢妄)」123)이라고 불리는 글을 쓰게 되었다.124) 서광계는 「벽석씨제망」의 첫 문장에서 “석가모니는 사람의 혼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파옥(破獄), 시식(施食), 소지(燒紙) 등의 내용은 어리석고 유치한 것이다.”125)라고 말하고 있다.126) 특히 본고가 참고한 鐘鳴旦等編의 「벽석씨제망」 문장에는 吳湘相主編의 「벽망」에는 없는 부분이 수록되어 있어 아주 흥미가 있다. 그것은 “변불봉조선설(辨不奉祖先說)”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천주교에서는 조상을 받들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에 관련되는 사람이 아주 많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언급한다는 것이다. 천주교에는 십계가 있는데, 앞의 3계는 교인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인 천주를 흠숭하는 것이고, 뒤의 7계는 교인은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7계의 가장 첫 번째 내용이 부모를 효도하고 공경하라는 내용으로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부모 생전에는 공손한 마음과 물질로 잘 공양하고, 돌아가셨으면 살아계실 때와 같은 마음으로 모시라는 것으로 이것이 효경이라고 말하고 있다.127) 아울러 돌아가신 분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나무를 신주로 모시고 음식을 차려 놓고 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아울러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지, 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28)

 

 

5. 맺음말 : 신앙 실천의 결실 및 영향

 

정약종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세례를 받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극복 사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인해 배교한 형제와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서도 그는 위축되지 않고 강직하게 신앙을 실천하였다.129) 정약종의 신앙 실천에 있어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부친 정재원(丁載遠)의 천주교 신봉 금지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였던 당시 부친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양반사회에서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부친이 천주교를 헐뜯고 비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종은 효성 있고 헌신적인 아들 역할은 계속하면서도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이에 수반되는 모든 학대를 변치 않는 인내로 참아내었다.130)

 

그러나 정약종은 그의 일기에 남겨둔 기록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궁흉지언(窮凶之言)’의 내용으로 그 뜻은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君主)요, 집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비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 父也)”라는 뜻의 12자로 압축되어 있는 말이다.131) 이러한 말은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이 글에 대한 반향은 엄청났다. 그렇다면 과연 정약종은 왜 이런 말을 기록해 놓았을까? 이러한 말을 한 의도는 그가 한 다음 두 답변으로 그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금부도사가 자신을 잡으러 가고 있을 때, 그 찾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있는 것과 다음으로는 이러한 ‘궁흉지언’을 언급함으로써 불대시참형(不待時斬刑)을 선고받아 1801년 2월 26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천주교인으로서의 주장을 통해 기존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성리학적 국가질서를 동시에 극복해 낼 수 있기를 바랐던 것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후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한 흔들림 없는 결심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 상황에서 천주교를 보급하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약종은 옥에서 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려 하자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변하여 진정한 즐거움이 될 것이며,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변하여 진정한 고통이 될 터이니, 당신들은 서로 비웃지 마시오.” 정약종은 형벌에 처해질 때 관중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 마시오. 이는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오. 당신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이후로 본받아서 이를 행하시오.”라고 하였다. 형리가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자,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자, 망나니는 벌벌 떨며 내려친 칼질로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 번째의 자세로 돌아가자 두 번째 칼에 순교하였다.132)

 

또 정약종은 신앙 실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양반으로서 천민인 황일광 등과 같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교리를 가르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또 효성이 남달랐던 약종이 아버지 정재원의 배교 회유와 형과 동생이 배교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뜻을 지키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보인 이러한 사랑의 실천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순교한 것은 그의 첫째 아들인 정철상과 두 번째 부인인 유조이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과 딸 정정혜 등이 모두 남편이자 아버지를 따를 수 있게 하였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종이 한글로 저술한 『쥬교요지』와 정약종이 초대회장을 지낸 명도회는 천주교의 대중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쥬교요지』는 중국의 『성세추요』보다도 우리나라에 더 긴요하다는 주문모 신부의 말로 그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쥬교요지』를 그 후 설립되는 명도회에서는 대중들에게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교리서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외교인을 천주교로 안내하는 입문서와 교리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명도회와 육회에서는 이 교리서를 중심으로 대중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쥬교요지』를 통한 문서 선교와 명도회와 육회를 바탕으로 한 천주교의 대중 전파의 공로는 정약종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광계의 경우는 어떠하였는가? 서광계는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식이 대를 잇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과 첩을 둘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점이라고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유학자에게 있어서는 극복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서광계는 과감하게 천주를 택한 것과 과거에 수차례 낙방으로 인하여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은 모두 첩실을 들이지 않게 하였던 천주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대단한 믿음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3)

 

다음으로 서광계는 서양 수학 및 과학의 중국 도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뿐 아니라 그의 각고의 노력과 윤색으로 번역된 『기하원본』과 『칠극』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던 것과 「변학소고(辯學疏稿)」와 「벽석씨제망(闢釋氏諸妄)」 등으로 천주교를 호교하는 내용의 글을 쓴 것 등은 중국 천주교의 기둥이라고 할 만한 문서 선교를 이룩한 서광계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의 하나는 서광계가 마카오로 피정을 다녀왔다는 것과 서광계식 전교방식을 들 수 있다. 서광계는 상해에서 부모 상중(喪中)에도 두 차례 마카오로 가서 피정신공(避靜神功) 참여 후 신심이 더욱 돈독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미사 제례 때에 조복을 입고 신부를 도왔다는 것을 볼 때, 그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주변 사람들을 천주교로 인도하였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천주교 전교방식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실생활에서 실천에 옮기면서 전교를 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서광계는 스스로 선교사를 찾아가 천주교를 알고자 노력했고, 천주교를 알게 된 후에는 선교사를 자기 고향으로 모셔와 그 지역 전체를 전교시키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손원화(孫元化)의 경우는 가정(嘉定) 지역의 전교를, 한운(韓雲) 같은 경우는 강주(絳州) 지역의 전교로 산서성(山西省) 지역으로 천주교가 전파하는 등 불모지에 천주교를 개교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모습을 볼 때, 이러한 방법은 서광계식의 전교방식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26년에 간행된 『천주교전행중국고(天主敎傳行中國考)』에서는 현재 강소성의 중국 교무(敎務)가 중국 전역에서 가장 흥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서광계의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134)

 

서광계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생활 안에서 교리를 실천하였는지에 대한 연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국 상해교구135)에서는 서광계에 대한 시복 운동136)을 벌이고 있고, 시복을 위한 기도문137)도 바치는 등 일련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가 이미 꽤 오래되었다. 서광계의 시복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생활 속에서 교리를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을 살펴보는 일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성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정약종과 중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서광계를 비교 언급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순교자와 순교자가 아닌 자, 성인과 가경자 그리고 두 사람 간의 약 200년이란 시간을 극복하고 비교해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부분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첫째로 두 사람은 모두 두 나라의 초기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주교 전파를 실천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정약종의 경우 천민에게 일거리를 주면서 자신의 거처에 머물게 하면서 천주교를 전교하는 정약종식 천주교 전교방식이나, 서광계의 경우 선교사를 불모지인 땅에 모셔와 천주교를 개교하는 식의 서광계식 전교방식을 구축하였다는 점 역시 비슷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둘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저술활동을 통한 전교 즉 문서 선교라는 방식을 통해 초기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정약종은 순교로, 서광계는 백색 순교로서 삶을 마감하였던 점이 이 둘을 비교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 흥미 있는 부분으로,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42살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시간이었다. 정약종은 순교로 천주교를 전교한 나이와 서광계가 과거에 급제하여 더 많은 곳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교하게 된 나이가 42세였다. 천주교 교리 실천 방법으로 정약종은 정약종 시대에 맞는 순교라는 방식을 택하였고, 서광계는 서광계의 시대에 맞는 전교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적인 방식은 몸소 교리를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정약종은 전통시대의 성리학적인 가부장적인 사회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궁흉지언’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당할 일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것을 택한 것은 하느님과 임금 그리고 생부를 더 이상 함께 놓고 왈가왈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138) 또 한국과 중국에서 천주교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첩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 사대부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정약종과 서광계가 이러한 어려움을 쉽게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신앙에 대한 견고한 믿음 때문이다.

 

이상의 비교 논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믿을 교리와 실천 교리에서의 모범을 보였던 한·중의 대표적 인물을 비교해 보면서 그들의 신앙을 재조명해 보는 것 자체가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 논문은 우리의 신앙이 한 단계 더 중요한 바로미터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한·중 두 나라의 초창기 천주교를 대표하는 평신도인 정약종과 서광계의 삶을 고증해 본다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한 일이었다. 특히 향후 발전적인 한·중 천주교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한·중 천주교의 토대를 살펴보는 것은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본 논문은 향후 한·중 천주교가 상생하는 좋은 자료로서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

 

* 본고는 2019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명도회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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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에 교회가 창설된 직후 천주교회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로 정약종을 언급하고 있다(조광, 「정약종 가족의 천주교 신앙 실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3 -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후손들의 천주신앙』, 하상출판사, 2013년, 249쪽.

 

2) 중국 천주교회의 3대 기둥이라 하면, 중국 천주교 개교에 큰 역할을 한 서광계(徐光啓, 1562~1633, 1603년 세례받음, 세례명 바오로), 이지조(李之藻, 1565~1630, 1610년 세례받음, 세례명 레오), 양정균(楊廷筠, 1557~1627, 1611년 이지조의 권유로 세례받음, 세례명 미카엘)을 지칭한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 급제한 순서를 보면 양정균, 이지조, 서광계였으나, 세례를 받고 입교한 순서는 이와 반대로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순이었다.

 

3) 韓國學文獻硏究所編, 『推案及鞫案』, 亞細亞文化社, 1978년.

 

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년, 9~70쪽.

 

5) 샤를르 달레 원저, 安應熱·崔錫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년.

 

6) 『明史』, 中華書局, 1974年.

 

7) 顧保鵠編著,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臺中 : 光啟出版社, 1970年.

 

8) [法]費賴之著, 馮承鈞譯, 『在華耶穌敎會士列傳及書目』 上·下, 北京 : 中華書局, 1995年.

 

9) [法]史式徽著, 天主敎上海敎區史料譯寫組譯, 『江南傳敎史』 1·2卷, 上海 : 上海譯文出版社, 1983年.

 

10) [法]榮振華著, 耿昇譯, 『在華耶穌敎會士列傳及書目補編』 上·下, 北京 : 中華書局, 1995年.

 

11) 張力, 劉鑒唐著, 『中國敎案史』, 城都 : 四川省社會科學院出版社, 1987年.

 

12) 張貞蘭, 『그리스도교의 中國 傳來와 東西文化의 對立』, 부산 : 釜山敎會史硏究所, 1997년.

 

13) 中國第一歷史檔案館編,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全四冊, 北京 : 中華書局, 2003年.

 

14) 吳湘相主編, 『天主敎東傳文獻續編』(一), 臺北 : 學生書局, 1966年, 19~36쪽.

 

15) 吳湘相主編, 『天主敎東傳文獻續編』(二), 臺北 : 學生書局, 1966年, 617~652쪽.

 

16) 鐘鳴旦等主編, 『徐家滙藏書樓明淸天主敎文獻』(一), 臺北 : 輔仁大學神學院, 1996年, 37~70쪽. 재미있는 것은 각주 15)의 「闢妄」은 활판본으로 첫 장 바로 다음 페이지에 ‘闢釋氏諸妄目錄’이라고 하여, 一破獄, 一施食, 一無主孤鬼血湖, 一燒紙, 一持呪, 一輪迴, 一念佛, 一禪宗으로 내용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鐘鳴旦等主編의 책은 필사본으로 제목이 「闢釋氏諸妄」이고, 吳淞徐光啓撰이라는 것과 본론인 각 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아울러 각 장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적고 있다. 一破獄之妄, 一施食之妄, 一無主孤魂血湖之妄, 一燒紙之妄, 一持呪之妄, 一輪迴之妄, 一念佛之妄, 一禪宗之妄, 辨不奉祖先說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구성상에서도 두 책은 상이함을 보이는데, 吳湘相主編의 책에서는 一無主孤鬼血湖으로 鐘鳴旦等主編의 책에서는 一無主孤魂血湖之妄으로 鬼를 魂으로 표기한 것과 吳湘相主編의 책에는 없는 부분인 “辨不奉祖先說” 부분이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고는 鐘鳴旦等主編의 「闢釋氏諸妄」을 저본으로 삼아 논문을 작성하였다.

 

17) 高龍鞶, 周士良譯, 『江南傳敎史』 第一冊, 臺北 : 輔仁大學出版社, 2009년.

 

18) 直隷獻縣耶穌會主敎劉准, 『天主敎傳行中國考』, 上, 獻縣天主敎, 1926년.

 

19) 黃一農, 『兩頭蛇―明末淸初的第一代天主敎徒』, 上海 : 上海古籍出版社, 2008년.

 

20) 명도회에 관련해서는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집, 1996년, 213~236쪽을 필두로,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집, 2000년, 5~49쪽의 논문을 시작으로 학회지를 통한 본격적인 정약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발표되었다 : 조광, 앞의 논문, 249~276쪽 ; 조광, 「丁若鍾과 初期 天主敎會」, 『韓國思想史學』 18집, 3~40쪽 ; 주명준, 「丁若鍾家門의 天主敎信仰實踐」, 『韓國思想史學』 18집, 41~85쪽 ; 元載淵, 「정약종 『쥬교요지』와 漢文西學書의 비교연구―『盛世芻蕘(셩셰추요)』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韓國思想史學』 18집, 2002년, 157~195쪽 ; 신주현, 「정약종(丁若鍾)의 『쥬교요지』에서 불교 비판 담론이 갖는 사상사적 함의」, 『韓國思想史學』 61집, 319~345쪽 ; 鄭杜熙,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한국사상사에 미친 영향」, 『교회사연구』 20집, 221~235쪽 ; 徐鍾泰,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18집, 2002년, 197~231쪽 ; 史 習隽, 「明末奉敎士人の社會關係と天主敎受容―徐光啓を中心に―」, 『九州大學學術情報リポヅトリ』, 2015年, 1~188쪽.

 

21)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집, 8쪽.

 

22) 「백서」 40행 : 그러나 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년, 169쪽에서는 정약종의 순교 당시 나이를 41세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음력으로 계산한 것이고 백서에서 언급한 42세의 나이는 양력으로 계산한 것이므로 한 살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 『추안급국안』 조선(朝鮮) 가경(嘉慶) 6년 2월 16일 추고자 정약종의 문초기록에는 42세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또한 음력으로 나이를 계산한 것이다.

 

23) 조광, 「丁若鍾과 初期 天主敎會」, 『교회사연구』 18집, 6~7쪽 : 초기 천주교 신자와 순교자에 대한 표는 조광, 「辛酉敎難과 李承薰」, 『敎會史硏究』 8집, 67~68쪽의 초기 천주교 신도 가계표를 작성하여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혼인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十 표시는 천주교 신자 혹은 순교자를 표시하고 있으므로 신자와 비신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또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11쪽에서는 정약종의 가계도를 표로 작성하였는데, 여기에서는 ⊕ 표시로 성명 뒤에 붙임으로 천주교 신자 또는 순교자를 표시하고 있어, 한눈에 천주교 신자 혹은 순교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24) 조광, 「丁若鍾과 初期 天主敎會」, 6~7쪽.

 

25) 韓國學文獻硏究所編, 『推案及鞫案』 1, 1801년 2월 12일, 亞細亞文化社, 1978년, 51쪽.

 

26) 정약종의 세례에 대해서 정약종은 권일신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권일신이 그의 대부라고 말하고 있다. 『推案及鞫案』 1, 1801년 2월 13일, 66~67쪽, 崔昌顯, ‘供曰 若鍾之神父李承薰 代父權日身 而神父者領洗之謂也 代父者敎授之稱也’.

 

27)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쪽.

 

28)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쪽.

 

29) ‘丁奧斯定若鍾 性直而志專 詳密過人 嘗有學仙長生之志 誤信天地開闢地說 歎曰 天地變改時 神仙亦不免消融 終非長生之道 不足學也’(「백서」 35행).

 

30)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40~441쪽.

 

31) 「백서」 36~37행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442쪽.

 

32) 서광계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은 리우후이우 편, 신의식 옮김, 『上海近代史』, 경인문화사, 2016년, 62~65쪽 참조.

 

33) 일부 자료에는 서광계와 카타네오와의 만남이 1593년이라고 언급하는 곳이 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왜냐하면 카타네오가 마카오에 도착한 것이 1594년이기 때문이다.

 

34)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13~14쪽. 남창(南昌)에는 마태오 리치가 1595년 6월 17일부터 거주하였다. 또 이 해부터 마태오 리치는 유학자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이때부터 ‘堂’자가 성당을 말하는 것으로 되었고, 이후로는 성당에 ‘寺’라는 말을 쓰는 것은 폐지되었다(앞의 책, 14쪽).

 

35)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14쪽 ; 조너선 D. 스펜스 저, 주원준 옮김, 『마태오 리치, 기억의 궁전』 서울 : 이산, 1999년, 200~201쪽.

 

36)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14쪽.

 

37) 그러나 마태오 리치는 서광계가 직접 언급한 꿈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것으로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주는 꿈으로 서광계에게 삼위일체의 오묘함을 계시하였다 : 그는 꿈에서 큰 대전(大殿)에로 이끌려갔는데, 가운데가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한 방에는 사람 상이 걸려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분은 ‘천주 성부’라고 알려주고, 두 번째 방에는 상이 걸려 있는데, 왕의 면복(冕服)을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는 천주 성자’라고 말하며,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제3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공경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천주가 외교인들에게는 나타내 보이기를 원치 않아 ‘성령[聖神]’이 흰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일에 대해 서광계는 남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듣고 나서 꿈에서 나타난 것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마태오 리치의 천주는 꿈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린다는 말을 듣고 서광계는 꿈의 일을 믿어도 되냐고 묻고는 더욱더 믿게 되었다”(高龍鞶, 앞의 책, 115쪽).

 

38) 梁家勉, 『徐光啓年報』, 上海 : 上海古籍出版社, 1981년, 57쪽.

 

39) 梁家勉, 앞의 책, 57쪽.

 

40) 『天主敎傳行中國考』 상책, 獻縣天主敎, 1926년판, 142쪽.

 

41) 黃一農, 『兩頭蛇 : 明末淸初的第一代天主敎徒』, 上海 : 古籍出版社, 2008년판, 76쪽.

 

42) 서광계의 영세 일자를 顧衛民은 1603년 2월 11일로 말하고 있다(顧衛民, 『中國天主敎編年史』, 上海 : 書店出版社, 2003년, 97쪽).

 

43) 黃一農, 앞의 책, 76쪽 ; 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서울 : 가톨릭신문사, 2001년, 197쪽.

 

44) 『明史』, 21권 傳[10] 列傳第一百三十九 徐光啓, 中華書局, 1974년, 6493쪽.

 

45) 서광계의 아들 서기는 5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서이각(徐爾覺), 서이작(徐爾爵), 서이두(徐爾斗), 서이묵(徐爾黙), 서이로(徐爾路)이다(黃一農, 앞의 책, 78쪽).

 

46) 黃一農, 앞의 책, 76쪽.

 

47) 『明史』, 徐光啓, 6496쪽 ; 高龍鞶, 앞의 책, 227쪽, 徐光啓의 관직 임기 참조 ; 高龍鞶, 앞의 책, 228~229쪽, 徐光啓의 大事年表 참조.

 

48) 郭守敬(1231~1316)은 원(元)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수학자, 수리공전 전문가이었다. 1276년 황제의 명령으로 신역법 제작의 명령을 받들어 4년여 만에 『修時曆』을 완성하였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일종의 역법(曆法)이었다.

 

49) 『明史』, 徐光啓, 6496쪽.

 

50) 『明史』, 徐光啓, 6496쪽 ; 張貞蘭, 『그리스도교의 中國 傳來와 東西文化의 對立』, 부산 : 부산교회사연구소, 1997년, 43쪽.

 

51) 서광계와 아담 샬의 조선 전교에 대한 내용은 장정란, 앞의 책, 79~84쪽 ; 서양자, 앞의 책, 229~231쪽 참조.

 

52) 이천경은 1613년(만력 41)에 실시한 시험에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실시한 회시(會試)의 시험 감독관이 서광계였으므로, 서광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으며, 서광계의 추천으로 서광계의 역국 업무를 계승하게 되었다(黃一農, 앞의 책, 96~97쪽 ; 史 習隽, 「明末奉敎士人の社會關係と天主敎受容-徐光啓を中心に-」, 『九州大學學術情報リポヅトリ』, 2015년, 75쪽.

 

53) 서광계가 병으로 역무(曆務)를 사직할 때, 당시 섬서(陝西) 안찰사(按察使)인 이천경으로 하여금 역법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천경은 正三品의 관직에 光祿寺卿(從三品)의 직함을 더해 역국 업무를 관리하게 되었다(黃一農, 앞의 책, 96~97쪽).

 

54) 『天主敎傳行中國考』, 189쪽 : 이후 역법은 흠천감(欽天監)에서 관장하였는데, 이 흠천감은 중국 강희, 옹정, 건륭 가경제 때에 중국의 혹독한 박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든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축출될 때에도 흠천감에서 감정과 부감을 맡은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 북경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로써 중국에 천주교의 명맥이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이 있는 구베아 주교 역시 흠천감 감정을 역임했다.

 

55) 『天主敎傳行中國考』, 189쪽.

 

56) 정약종은 1801년 음력 2월 26일 서울에서 순교하였는데, 아들인 정철상은 같은 해인 1801년 음력 3월 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년, 181~182쪽).

 

57) 명도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단체로서 북경에 있는 비슷한 단체를 모방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방상근, 앞의 논문, 214쪽 각주 3 재인용) ; 명도회의 창설 배경, 조직, 명도회의 성과 및 역할,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의 명도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앞의 논문, 213~236쪽 참조 ; 명도회의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방상근은 주문모 신부 입국 초기 6개월의 기간으로 1797년 5월부터 1898년 중순까지로 언급하고 있으나(방상근, 앞의 논문, 218쪽), 차기진은 명도회의 설립과 보명의 시작은 1800년 4월 초에서 멀지 않은 시기, 다시 말해 1년간의 신공 절차를 감안한다면 ‘1799년 초’라고 주장하고 있다(차기진, 앞의 논문, 27쪽).

 

58) 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 앞의 책, 183쪽과 408쪽에서 본문에서는 세례명이 ‘알렉시오’라고 하고 각주 처리를 하고 있는데, 각주에서는 모두 ‘시몬’으로만 언급하고,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이유는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47쪽, 「黃日光」에서 “사호는 ‘심연(深淵)’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세례명을 ‘시몬’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근거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상권에서는 황일광의 세례명을 ‘알렉시스’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임을 밝혀 둔다.

 

59)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47쪽, 「黃日光」.

 

60) 『사학징의』 권2, 작배죄인질, 316쪽, 「黃次乭」.

 

61)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84쪽 각주 140에서는 형 집행일을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62)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73~475쪽.

 

63)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73~475쪽 ;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16쪽.

 

64) 『추안급국안』, 1801년 2월 12일, 53쪽, 任大仁, ‘保寜寒川洪生員樂豊 寓接於常漢金得根家 以爲汝旣無依託 與我同事云云 故矣身隨往于廣州斗峴丁生員家 學得所謂十戒矣.’ 앞의 내용에서 임대인이 지칭하는 광주 마재의 ‘정 생원’은 정약종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임대인은 이후에도 정약종의 머슴으로 있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기 때문이다. 임대인은 마재 정약종의 집에 자주 왕래하던 사람으로 양근 漢江浦의 윤 생원(윤유일이나 그 집안 신자인 듯), 저탄(猪灘)의 김 생원을 꼽았으며, 포천의 홍교만이 가장 빈번하게 그 집을 왕래하였고, 편지 수발은 최기인(崔起仁)이 맡았다고 진술하였다(위의 기록 및 『사학징의』 권2, 作配罪人秩, 임대인, 251쪽) ;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13~14쪽 및 각주 22 재인용 ; 임대인은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책 궤짝 사건(冊籠事件)’이 1월 19일에 발생하였다. 1800년에 있었던 양근 지방의 박해를 피하여 서울에 와 있던 정약종은 송재기(宋再紀, ?~1802) 집에 맡겨 둔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및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 있는 책 궤짝을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자신의 사환인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을 시켜 아현에 있는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는 도중 한성부 관원에게 발각되어 임대인은 체포되고 책 궤짝은 압수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37쪽).

 

65) 김한빈(金漢彬)은 1801년 10월 2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김진소 등 저,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269쪽).

 

66) 김한빈은 『추안급국안』 1801년 10월 10일, 807쪽, 김한빈 추국 내용에서 1800년 9월에 정약종의 집으로 이주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으나, 황일광과 황차돌의 진술을 보면 1800년 초 이전에 이미 분원에 있는 정약종의 행랑채에 거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4쪽 황일광 ; 작배죄인질, 316쪽, 황차돌). 또 김한빈은 1800년 2월에 공주 사람인 한은(韓銀)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사학징의』 권2, 작배죄인질, 319쪽, 한은 ;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21쪽).

 

67) 이에 대해서는 명도회가 창설되고 난 후, 명도회원이었던 이합규와 정광수가 한신애(韓新愛, 아가타, ?~1801)의 요청에 따라 한신애의 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사실은 교리 교육과 관련된 명도회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323쪽). 이러한 이유로 명도회의 창설 시기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명도회의 설립 시점에 대해서는 1800년 4월 이전으로 보는 견해(기존설), 1797년경으로 보는 견해(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1799년 초로 보는 견해(차기진, 「丁若鍾의 교회활동과 신앙」)가 있다(『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321쪽). 명도회의 창설 시점을 어느 한 주장으로 특정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본 논문에서는 정약종이 천민에게 교리 강습을 시작한 내용을 명도회원인 이합규, 정광수가 한신애의 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것보다 먼저라는 판단으로 명도회에 앞서 정약종의 천민에 대한 교리 강습을 서술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68) 정약종과의 관계를 진술한 인물에서 사돈 홍교만의 婢 永愛 등이 정약종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19쪽).

 

69)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42쪽.

 

70)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321쪽.

 

71) 방상근, 앞의 논문, 219쪽.

 

72) 조한건, 「『쥬교요지』와 韓譯西學書와의 관계」 『교회사연구』 26집, 2006년, 20쪽.

 

73) 이러한 내용은 특히 정약종의 소공동체원과 친밀자 일람표(차기진, 「丁若鍾의 교회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집, 2000년, 34쪽의 각주 113)를 참고해 볼 때, 초기 교회에서 정약종

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차기진, 「丁若鍾의 교회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집, 2000년, 34~35쪽).

 

74) 1801년 이전에 이미 초기 형태가 존재했던 『성경광익직ᄒᆞ』와 1801년 한글본 『성년광익』 등의 한글본 번역서의 번역이 명도회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는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한건, 「성경직ᄒᆞ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년 ; 방상근, 「『성년광익』의 서지 연구」, 『신앙의 노래 역사의 향기』, 흐름출판사, 2014년, 311~339쪽 참조.

 

75)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321~323쪽. 특히 그 성과에 대해서는 『사학징의』에 나오는 신자 118명 중 69%가 강완숙 등 19명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이 19명의 이름은 강완숙, 권일신, 김권순, 김한빈(金漢彬, 베드로, 1764~1801), 윤현(尹鉉), 이합규, 이존창, 정광수,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한조이[召史], 황사영 등으로 대부분 명도회 회원이었다.…(중략)…그 결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이었던 신자 수는 1800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76) 顧保鵠編著, 《中國天主敎大事年表》 光啟出版社, 1970年, 16쪽, 直隷獻縣耶穌會主敎劉准, 『天主敎專行中國考』 上冊, 獻縣: 1926年 149쪽의 내용에서도 서광계부친은 사망하기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顧衛民, 앞의 책, 102쪽에서는 1606년 그의 부친 73세 때에 서광계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고, 서광계 부인 오 씨와 아들 서기(徐驥)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高龍鞶, 앞의 책, 115~116쪽과 黃一農, 앞의 책, 77쪽에는 1607년에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77) 顧保鵠編著, 앞의 책, 16쪽.

 

78) 구간루(九間樓)는 현재의 上海市 南市區 喬家路 234~244호에 위치한 옛 서광계의 고택이다. 명 만력 연간에 건립되었는데, 위아래 2층으로 각 9間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구간루라 불리게 되었다. 1608년 서광계가 카타네오 신부를 초청해 상해전교를 부탁할 때, 이곳에 거주하게 하였다. 명대에 수리하여 현재는 7間으로 되어 있다. 顧衛民, 앞의 책, 105쪽에서는 이곳을 ‘雙園’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간루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구간루 서측 성모당(聖母堂 또 第一天主堂으로도 불림)에서 교리의 강론과 미사를 집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이곳이 협소하여 1640년 블랑카티 신부 때에는 敬一堂을 건립하게 된다.

 

79) 리우후이우 편, 신의식 옮김, 앞의 책, 359쪽.

 

80) 顧衛民, 앞의 책, 105쪽.

 

81) 顧保鵠編著, 《中國天主敎大事年表》 光啟出版社, 1970年, 17쪽; 1609년 12월 24일 성탄전야에 상해에 최초의 교당이 열렸다. 밤이 되자 서광계와 모든 교우들이 새로운 성당에 모였고, 카타네오 신부는 기도문을 바치며, 3대의 미사를 올렸다. 서광계는 朝服과 朝帽를 갖추고 사제를 도왔다. 당시 상해에는 이미 200명의 교우가 있었다. 顧衛民, 앞의 책, 106쪽; 카타네오 신부가 미사를 집전할 때 서광계는 화려한 조복(朝服)을 입고 옆에서 복사하였으며, 양반과

노비가 한데 어울려 미사를 봉헌하므로 ‘불분귀천 일률평등’(不分貴賤 一律平等)이라 하였다. 서양자, 앞의 책, 198쪽.

 

82) 顧保鵠, 앞의 책, 17쪽; “서광계는 마카오 예수회 수도원에 가서 성 이냐시오 영성 수련을 가지고 한 달 피정을 하였다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확한 전거를 대고 있지는 않다. 서양자, 앞의 책, 198쪽.

 

83) 서광계의 네 명의 손녀는 첫째 손녀 펠리치타스, 둘째 손녀 칸디다, 셋째 손녀 구서씨(瞿徐氏), 넷째 손녀 마르티나이다. 첫째 손녀인 펠리치타스는 애정괴(艾庭槐)와 결혼하여 애씨(艾氏) 집안에 천주교를 전교하였으므로, 애서씨(艾徐氏)라고도 불린다. 둘째 손녀인 칸디다는 허원도(許遠度)와 혼인하여 아들인 허찬증(許纘曾)과 허찬증의 형제자매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였으므로, 허서씨(許徐氏)라고도 불린다. 셋째 손녀는 본명이 드러나지 않고, 구서씨(瞿徐氏)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국자감생 구엽(瞿葉)에게로 시집을 갔으므로, 구서씨라고 불리는 것이다. 넷째 손녀 마르티나는 국자감생이며 사천 우포정사 반윤서(潘允端)의 손자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반서씨(潘徐氏)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주변 인물 누구에게 전교하였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史 習隽, 앞의 논문, 125~127쪽).

 

84) 리우후이우 편, 신의식 옮김, 앞의 책, 359쪽 ; 경일당은 “老天主堂”으로도 불린다. 1730년(옹정 8) 국가에 몰수되었다가 1861년(함풍 11)에 교회에 반환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梧棟路 第2小學이 되었다 ; 이곳은 블랑카티 신부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경내는 태호석(太湖石)으로 된 돌을 쌓아 경관을 좋게 하였고, 미사를 집전하는 곳 이외에도 천문을 연구하고 기상을 예측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施宣圓, 『上海 700年』, 上海 : 人民出版社, 2000년, 349쪽).

 

85) 黃一農, 앞의 책, 77쪽.

 

86) 黃一農, 앞의 책, 78쪽.

 

87) 허락선은 부인 오(吳) 씨와의 사이에 아들을 둘을 낳았으나 낳은 지 얼마 되지 모두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30세인 1577년에 이르러서야 장남인 사위(士偉)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대를 잇지 못하고 1596년에 사망하였다. 둘째 아들인 사준(士儁)은 부인 송 씨와의 사이에 4남(遠器, 遠猷, 遠識, 遠度)을 낳았으나, 며느리 송씨 역시 1599년 전후로 사망하는 등 자식이 자신보다 앞서가는 것에 대해 허전한 마음을 의탁할 곳을 찾던 중 허락선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입교한 그 해에 모친이 사망하자 모친의 장례 때와 1613년에 있었던 둘째 아들 사준의 장례 때에 불교와 도교식 예법에 따라 장사 지냈다. 1622년에는 출가한 지 오래지 않아 과부가 된 외동딸이 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아픔을 겪는 등 액운이 호전되지 않은 것과 그 스스로 전통사상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천주교의 교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는 점 등을 볼 때, 그의 천주교에 대한 열정은 점차 식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黃一農, 앞의 책, 86쪽.

 

88) 허찬증(許纘曾)의 자는 효수(孝修), 호는 鶴沙이다. 1649년 진사가 되었고, 부친이 사망 후, 1655년에는 한림원 檢討에 부임하였다. 1657년에는 右春坊 右中允으로 승임되었으며, 1658년에는 江西驛傳道 副使로, 1660년에는 사천 포정사사(布政使司) 아래에서 상하천동도참정(上下川東道參政)을, 강희 2년인 1663년 하남 안찰사(按察使)에 부임하였다. 1년 뒤인 1664년 천주교당 건립문제로 고소되어 동국기(佟國器)와 허지점(許之漸)과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관직도 박탈되었다. 5년 후인 1669년에 후에 누명을 벗게 되어, 원 관직에 복직되었다. 1년 후인 1670년에는 운남(雲南) 안찰사에 임명되었고, 1672년에는 노모를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수 십 년을 거주하였다. 黃一農, 앞의 책, 87쪽; 관련된 몇 편의 논문이 있다. 延經苹, 「淸初天主敎文人許纘曾硏究」『上海師範大學碩士學位論文』 2009년; 柳耘華, 「雜糅的信仰與情感世界-淸初天主敎文人許纘曾再論」『上海師範大學學報』 2008년, 37권(4기); 柳耘華, 「徐光啓姻親脈絡中的上海天主敎文人:以孫元化,許樂善以家族爲中心」『世界宗敎硏究』 2009년(1기).

 

89) 원문에는 ‘夫人許甘第大傳’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許는 徐자의 誤字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서광계의 손녀를 말하는 것으로 그의 성 역시 徐씨이며, 이러한 오자가 나온 것은 중국어 발음으로는 許와 徐는 ‘Xu’라는 동음이기 때문이다. 또 칸디다의 남편이 許씨 姓이었던 관계로 혼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柏應理著, 許采白譯, 『許太夫人傳略』, 傅斯年圖書館藏 光緖8年刊本, 10~11쪽) ; 許太夫人의 太夫人은 자당(慈堂) 또는 모당(母堂)으로 모친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이는 허찬증의 모친을 언급하는 말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

 

90) 方豪, 『中國天主敎史 人物傳』(上), 177쪽.

 

91) 자는 初陽, 호는 火東으로 강소성 가정(嘉定) 사람이다. 서광계로부터 화기(火器)와 산법(算法)을 배웠으며, 서광계를 도와 『句股義』를 다듬어서 정리한 것 이외에, 『經武全編』, 『西法神機』 등의 병법서를 저술하였고, 『西學雜著』, 『幾何用法』, 『幾何体論』, 『泰西算要』 등도 저술하였고, 판도하와 『日晷圖法』을 공동으로 저술하기도 하였다. 1630년 그는 파격적으로 등래(登萊) 순무(巡撫)직에 오르게 되었고, 서광계의 제자 중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천주교 전교에 대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휘하 부장인 孔有德의 오교병변(吳橋兵變)으로 등주(登州)가 반란군 수중으로 넘어가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후에 포로에서는 풀려났으나, 조정의 정적인 余應桂 , 李蒙辰 등의 모함으로 북경 서시(西市)에서 1632년 9월 7일 참수 당하였다. 黃一農, 앞의 책, 91~93쪽.

 

92) 顧衛民, 앞의 책, 123쪽.

 

93) 黃一農, 앞의 책, 93쪽.

 

94) 黃一農, 앞의 책, 93쪽.

 

95) 한운(韓雲)의 자는 경백(景伯)으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그는 평양(平陽)의 강주(絳州) 출신이었으나, 부친이 화를 피해 1607~1608년(만력 35~36)에 고향을 떠나, 송강부(松江府) 청포현(靑浦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현(上海縣)에 거주하던 손원화(孫元化)와 함께 서광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서광계의 영향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한운은 서양 선교사인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 1577~1628)가 라틴어·중국어 대조 자전인 『西儒耳目資』를 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628년에는 서주(西州) 지주(知州, 종5품)를 역임하였고, 이후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섬서(陝西) 한중부(漢中府, 현재의 南鄭縣)의 추관(推官, 종7품)으로 좌천되었고, 후에 다시 관직이 섬서성 가주(葭州)의 지주(知州)에 제수되었다고 강희 『강주지(絳州志)』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가주지(葭州志)』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작은할아버지인 한과(韓科)의 이름만이 언급되어 있다. 또 한운은 포대 구축 방법 등에 조예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黃一農, 앞의 책, 229~232쪽).

 

96) 黃一農, 앞의 책, 240쪽.

 

97) 서광계에 의해 천주교를 수용했던 향신과 사대부의 명단이다. 이를 보면 전교에 대한 서광계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史 習隽, 「明末奉敎士人の社會關係と天主敎受容-徐光啓を中心に-」, 『九州大學學術情報リポヅトリ』, 2015年, 81~83쪽의 表一 天主敎信仰を受容した

鄕紳·士人).

 

98) 조한건, 「『쥬교요지』와 韓譯西學書와의 관계」, 『교회사연구』 26집, 2006년, 5~74쪽에서 저술 배경, 상편 · 하편 분석 및 그 영향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99) 『주교요지』는 『셩셰추요』에는 없고 『진도자증(眞道自證)』에 보이는 “천주교가 매우 행하기 쉬운 종교이며, 그 교리를 알게 된 만큼 지체없이 봉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직설적이고 진솔한 宣敎 관련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정약종이 『주교요지』의 저술을 통해서 대중전교를 강화하고 그리스교의 핵심인 救援觀을 분명히 밝혀줌으로써 신자 대중에 대한 교리 교육의 수준을 질적으로 한 단계 고양시키고자 하는 저술 의도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면모로 파악된다(元載淵, 앞의 논문, 2002년, 188~189쪽).

 

100) 「백서」 36~37행. ‘嘗爲敎中愚者 以東國諺文 述主敎要旨二卷 博採聖敎諸書 參以己見 務極明白愚婦幼童 亦能開卷了然 無一疑晦處 緊於本國 更勝於芻蕘 神父准行之’.

 

101) 『쥬교요지』가 한글로 작성된 배경의 하나로 趙珖, 『朝鮮後期天主敎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년, 89쪽에서 “丁巳戊午間 邪書大行 賃書者 獲大利 諺文過半矣”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또 金世博, 청주의 金사집, 孫景允과 鄭光受 등도 모두 천주교 서적의 필사와 판매를 했던 인물들이라는 것을, 당시 교회의 신도 중 상당수는 漢文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이었고, 이러한 신도들을 위해 諺文 교리서가 필요하였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조한건, 「『쥬교요지』와 漢譯西學書와의 관계」, 24쪽 ; 金世博의 경우 신도들의 집을 떠돌아다니며 성서를 베껴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한글로 작성하였으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가 쉽게 전파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모진 박해 속에서도 수천 명의 무지한 신자들이 순교로써 이 새로운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며, 한글로 번역된 성서가 없던 당시에 이 『쥬교요지』는 그런 가르침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조는 멸망했어도 천주교로 상징되는 기독교적 영향력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한다(鄭杜熙,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한국 사상사에 미친 영향」, 『교회사연구』 20집, 235쪽).

 

102) 김진소 등 저, 앞의 책, 54쪽.

 

103) 「백서」 36~37행 ;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442쪽.

 

104) 특히 정약종은 삼위일체론을 “그 본체가 하나이고, 얼굴이 하나이시고, 그 사랑하는 정이 하나이시므로 삼위(三位)라고 하는데, 삼위란 말은 천주의 체가 셋이 아니라 위는 비록 셋이지만 그 체는 오직 하나이시라.…그 본체는 아비라 이르고 그 낳으신 얼굴은 아들이라 이르며 그 아비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여 발하신 정은 聖神이라 이르니라.…아비와 아들이 한 체이시고, 또 그 체가 형태가 없으므로 아비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이 서로 형체에 걸리는 것이 없이 통하시어 성신을 발하시니, 성신이란 말은 지극히 착하시고 형태가 없으신 사랑을 이룸이니라.”라고 하였다. 삼위일체설은 오늘날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리인데, 정약종은 이것을 나름대로 깊이 이해하고 이처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론은 조한건, 위의 논문, 33~37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鄭杜熙, 앞의 논문, 228~229쪽).

 

105) 「백서」 36~37행. 정약종이 『성교전서』를 저술하는 데 김건순(金建淳, 요사팟)과 협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한국천주교회사』 상, 443쪽, 457쪽). 김건순은 유명한 老論 집안에서 태어나 여주의 종가로 양자를 가서 생활하였으며, 양근의 권철신과 가깝게 지냈고, 1797년 8월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2년 후인 1799년 6월 6일에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정약종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성교전서』를 함께 편찬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106) 신유박해 때 한신애(韓新愛, 아가타)의 집에서 압수된 서적 가운데에도 『주교요지』 1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차기진, 앞의 논문, 각주 134 재인용).

 

107) 차기진, 앞의 논문, 41쪽.

 

108) 『쥬교요지』의 판본 변화와 내용 변화에 대해서는 서종태, 「丁若鍾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18집, 2002년, 197~231쪽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주교요지』는 총 46책에 달한다(서종태, 앞의 논문, 227쪽).

 

109) 崔奭祐,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년,

353~366쪽.

 

110) 幾何는 원래 虛辭였으나, 서광계가 모든 도수(度數)의 학(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여 현재는 수학에서 전용 단어로 활용되고 있다.

 

111) 기하학과 관련된 서적으로는 『測量法義』, 『測量異同』, 『句股諸義』, 『圓容較義』가 있다(張力 等著, 『中國敎案史』, 四川省社會科學院出版社, 1987년, 87~89쪽).

 

112) 삼각학과 관련된 서적으로는 『割圓八線表』, 『大測』이 있다(張力, 앞의 책, 89~90쪽).

 

113) 張力, 앞의 책, 86~90쪽.

 

114) 한마디로 “격물궁리(格物窮理)”로 표현할 수 있다(崔韶子, 『東西文化交流史硏究』, 三英社, 1987년, 96쪽).

 

115) 중국 5대 農書란 서한 範勝이 지은 『範勝之書』, 북위 賈思勰이 지은 『齊民要術』, 송대 陳敷가 저술한 『陳敷農書』, 원대 王禎이 지은 『王禎農書』 그리고 명대 서광계가 저술한 『農政全書』이다.

 

116) 顧衛民, 앞의 책, 105쪽.

 

117) 『天主敎傳行中國考』(上), 143쪽.

 

118) 吳湘相主編, 앞의 책, 19~36쪽 ; 이 내용에 대해서는 方豪가 「影印辯學疏稿序」를 작성하여 그 판본 및 내용에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吳湘相主編, 앞의 책, 3~4쪽 참조).

 

119) 1615년(만력 43) 남경 예부시랑으로 남경에 부임한 심각(沈㴶)은 천주교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으므로 공개적으로 비방하였다. 그는 특히 양정균의 배교(독실한 불교도에서 천주교로의 귀의), 항주(杭州) 운루사(雲樓寺) 승려인 연지(蓮池)가 심각 자신의 스승이었던 연고, 그리고 『天問略』을 양정균(楊廷筠), 이지조(李之藻), 서광계 등이 함께 연구하였다는 것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발과 천주교인들이 풍속을 해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1616년(만력 44) 5월 8일 만력제에게 첫 번째 상소한 상소문으로 교난이 시작되었다. 5월의 첫 상소를 시작으로 8월 12월까지 계속 상소하였다(吳湘相主編, 앞의 책[一], 3쪽).

 

120) ‘爲遠人學術最正, 愚臣知見甚眞懇乞’(吳湘相主編, 앞의 책[一], 21쪽).

 

121) “西學可以輔王化”라는 말로 서학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122) 吳湘相主編, 앞의 책(一), 21~36쪽.

 

123) 崔韶子, 앞의 책, 95~96쪽 참조.

 

124) 「影印闢妄序」(吳湘相主編, 앞의 책, 21쪽).

 

125) ‘釋氏不知人魂歸於何所 創爲破獄施食燒紙等說 以誘愚痴’(鐘鳴旦等編, 앞의 책, 37쪽).

 

126) 「闢妄」에 대한 한국어 자료는 장정란, 「서광계연구」, 1970년,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고.

 

127) ‘世俗訛傳 天主正敎不奉祖先 此事關係人道極大極宜辨明 夫聖敎十誡爲人殼率前三誡敎人欽崇天地萬物眞主後七誡敎人愛人如己而七誡之首曰孝敬父母誠以愛 天主之下莫如此爲重也 故父母生卽養盡志盡物死則事如生如存斯爲孝敬’(鐘鳴旦等編, 앞의 책, 68~69쪽).

 

128) 鐘鳴旦等編, 앞의 책, 70쪽.

 

129) ‘及聞聖敎 篤信而力行之 辛亥之窘 兄弟親友 少有全者 而獨不撓動’(「백서」 35~36행) ; 『한국천주교사』 상, 441쪽.

 

130)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쪽.

 

131) 이 ‘窮凶之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기경(李基慶) 『闢衛編』(影印本)의 罪人若鍾云云의 맨끝 행에 본문 글자 크기보다 약 ¼ 정도 크기로 중간 부분에서 시작하여 세로로 3줄에 걸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문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는 편리를 위해 띄어쓰기를 하였다. “窮凶之言云者 搜探文書中 渠之日記有曰 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 十二字 伊時諸臣兩司諸臺請對 施以不待時之律 以不忍筆諸文字之意, 漏於公私文跡”(李基慶)編, 『闢衛編』(影印本), 曙光社, 1978년, 313쪽) ; 조광은 그의 논문 「정약종과 초기 천주교회」 30~33쪽에서 ‘흉언(凶言)’이라 지칭하며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32) 「백서」 40행 ; 조광, 「정약종과 초기 천주교회」, 각주 116 재인용.

 

133) 이지조(李之藻)는 마태오 리치와 서로 교제하면서 서학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 어문에도 관심을 보여 열심히 배웠으나, 천주교 교규에 첩이 있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첩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갖은 이유를 들어 세례 받기를 미루었다. 그러다 1610년(만력 38년) 이지조는 자신이 중병에 들었을 때, 마태오 리치의 지극한 간병에 감화되었고, 리치의 권유로 첩을 떠나보낸 후, 레오(Leo)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高龍鞶, 앞의 책, 133쪽; 이지조의 가정에 대한 자료는 매우 드문데, 그의 아들인 차빈(次虨)이 흠천감 감생(監生)에 임명되자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을 것을 전교하였다. 黃一農, 앞의 책, 82쪽; 楊廷筠은 본처 소생의 아들 균(均)을 얻었으나 요절하자, 고(賈) 씨 성의 첩을 들여, 선후로 약지(約之)와 요지(繇之) 아들 둘을 얻었다. 이후 50세가 되었을 때, 양정균은 첩을 다른 곳에 거주하게 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부친인 양조방(楊兆坊) 역시 오래지 않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어 입교를 거절하자, 양정균은 60세를 넘겼을 때, 모친을 설득하지 못하자, 자신이 “성교(聖敎)의 규율을 지키며, 주님을 바라며, 침묵 속에서 깨우치고자 한다.”고 하면서 연속 10여 일 동안 의관을 풀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자, 모친이 더 이상 볼 수 없어 세례를 받겠다는 응낙을 받아내어, 이로써 집안 전체가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예절에 따라 묘를 꾸몄다. 黃一農 , 앞의 책, 83쪽.

 

134) 『天主敎傳行中國考』 상책, 150쪽.

 

135) 상해교구의 역대 주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핀메이(龔品梅, 1949. 10. 7~1988)는 중국 국적의 상해교구 최초 주교이고, 판중량(範忠良, 1955~2014)은 중국 국적으로 예수회 소속이며 상해교구 주교(교황청 승인, 중국 불승인)이었다. 장자수(張家樹, 1960~1988)는 중국 국적의 예수회 소속으로 상해교구 주교(自選自聖)로 교황청에서는 파문으로 처벌하였고, 진루셴(金魯賢, 1988~2013)은 중국 국적 예수회 회원으로 상해 주교(중공 승인 정권 주교, 교황청에서도 승인한 주교)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재임하고 있는 상해 주교는 마다친(馬達欽, 2014~현재)으로 전임 진루셴 주교가 보좌주교로 위임한 주교로서 교황청도 인정한 합법 주교이다.

 

136) http://www.catholicsh.org/ZhuanLan/XuAndRicci/liepinHuyu.html 强烈呼吁将利玛窦与徐光启列为真福品! 여기에서는 서광계의 스승인 마태오 리치 신부와 함께 시복 운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https://www.rfa.org/mandarin/yataibaodao/tzj-04212011090325.html의 2011년 4월 21일 내용으로 제목은 “天主敎徒徐光啓有望被列爲眞福品”. 최근 바티칸에서 중국 천주교 관련 최신보도에서“我們滿懷喜悅地獲悉上海敎區可以開啓徐光啓列眞福品案的審理程序了,幷與耶穌會士利瑪竇神父列眞福品案同時進行”(원문 簡體字인 것을 繁體字로 옮겨 기록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https://www.douban.com/group/topic/9784182 天主教上海教区筹备呈报徐光启列品事宜! 등 여러 곳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링크한 사이트가 안 열리는 경우에는 중국어 제목을 Google에 붙여넣기하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음).

 

137) 求主賞徐光啓敎友早日列品眞福!

     佘山聖母進敎之佑, 爲我等祈!

     中華殉道聖人聖女, 爲我等祈!

     可敬者徐光啓敎友, 爲我等祈!

 

138) 이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를 심문하는 관원들에게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萬死無惜)”라고 표현한 것으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알 수 있다(조광, 「정약종과 초기 천주교회」, 33쪽).

 

[교회사 연구 제56집, 2020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의식(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무처(교양)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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