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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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상처 그 깊이만큼 그분은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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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7 ㅣ No.169

인간과 함께 하시고 싶어,

참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면서 생활하시고 싶어

하느님께서 일부러 마련하시는 집이 고통이다.

 

처음 인간이 그 집으로 초대받으면

그 두려움에 왠지 낯설어 싫어지나,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온갖 기쁨과 아름다움과 희망과 사랑을 발견하고부턴,

무엇보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부턴,

사랑의 기쁨에

어린아이처럼 통통거리며 거닐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될 그 때에,

그 고통의 집에서 나오게 된 뒤엔

하느님의 놀라운 뜻을 깨닫게 된다.

즉 고통에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알고서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따라서 "왜 이런 집에 데려다 놓았느냐"고

울고불고 앙탈만 부리지 말고

눈물을 닦고 맑은 눈으로 둘레를 둘러 볼 때,

그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거기엔 하느님의 모습이 있다.

그대가 그토록 기적을 통해,

계시나 환상을 통해 만나 보려고 했던

그분이 또렷이 계신다.

 

음성이 들리고

말을 걸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다.

 

모세처럼 산에 올라가지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 살지도,

에녹처럼 하늘로 올라가지도,

야곱처럼 돌벼개를 베지도,

이사야처럼 꿈을 꾸지도 않았건만

그대는 하느님을 만난 것이다.

 

더욱이 그 만남은 영원한 것.

순간적이지도 않고

그 어떤 이별도 없는 사랑이 낳은 사랑의 만남이다.   

 

그렇게 고통의 상처

그 깊이만큼 하느님은 오신다.

 

따라서 만일 고통이 없었다면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은

표피적인 것이 될뻔 하였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갈라진 상처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참으로 살과 살을 섞어 만나는

육화적 만남이 가능해 졌다.

 

고통의 상처는

하느님을 부르는 피리이다.

진정 고통의 상처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자비가 깃들인다.

자비는 상처라는 그릇 속에 담기는 것,

하여 자비를 만나려거든 상처를 입어라.

 

과연 고난은 인간을 가난케 한다.

그 가난 위로 하느님의 손길

곧 신적 은총이 다가온다.

터진 석류같이 벌려진 그대 속에

하느님의 빗물이 스며들게 되면,

가난은 은총의 그릇,

고난은 그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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