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 전통 안에서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8 ㅣ No.414

수도승 전통 안에서의 “Lectio Divina”1)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서론

하느님의 말씀은 위대한 신비이다. 그분은 말씀 안에서 자신의 전존재와 자신의 전(全)의지를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철저히 드러내셨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말씀이기에(요한 2,45) 그 말씀은 언제나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그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움을 바울로 사도는 직시했던 것이다(히브 4,12).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당신 말씀의 신비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셔서(1디모 2,4; 요한 8,32)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또한 우리가 온전한 말씀의 신비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요한 16,13). 그러므로 교회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한결같이 하느님께서 성서 안에 참으로 현존하심을 굳게 믿고 성서에 온전히 몰입하였다. 위대한 영성 작가인 가리구 라그랑제 신부는 성서에 대한 맛은 바로 영성적인 완성의 표시라고 말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고 들음으로써,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더욱 잘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맛들이고 음미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크나큰 힘이 되고, 영성생활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 되어, 마침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2)

교회는 초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성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제나 강조해 왔는데, 그렇다면 성서는 우리의 생활에서 과연 어떠한 위치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진실로 생명의 책인가? 성서는 과연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하느님의 메시지인가? 성서 안에 그리스도는 참으로 현존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우리는 솔직하게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성서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힘이 없이 죽어 있으며, 그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지 못한 말씀으로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먹고 마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 안에 결코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降生)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의미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주목하면서, 수도승 전통 안에서 훌륭히 꽃핀 성서에 대한 접근인 Lectio Divina 수행의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해 보고자 한다. 사실 Lectio Divina 수행은 수도승 전통에서 특히 베네딕도회 수도승생활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으며, 수도승들 역시 언제나 이러한 수행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해 왔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바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Lectio Divina 수행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말씀이 인간 전존재에 확산되는 하느님 말씀의 내면화 혹은 하느님 말씀의 인격화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도승들은 더욱 굳센 신앙과 열렬한 희망, 넘치는 사랑의 분위기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였던 것이다.3) 수도승 전통에서 Lectio Divina 수행은 수도생활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고, 또한 수도승생활의 본래의 모습에로 되돌아가려는 쇄신운동에 있어 언제나 역동적인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러한 면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수도승 전통 안에서의 Lectio Divina의 단계와 수도생활의 여러 주제와 Lectio Divina 수행과의 관계를 고찰한 후에, 마지막으로 현재 본인이 수행하고 있는 Lectio Divina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가능성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법에 대한 제시일 뿐이다. 이것이 결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갈증을 느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수도승 전통 안에서 지켜온 Lectio Divina 수행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이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제1장 수도승생활 안에서의 “Lectio Divina”의 단계

전통적으로 베네딕도회 수도원들 안에서는 성독의 수행으로서 Lectio Divina(성독) - Meditatio(묵상) - Oratio(기도)의 방법이 계속 행해져 왔다. 즉 수도승들은 먼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주로 성서본문을 펴들고, 입술로는 작은 소리로 읽으면서 귀로는 듣고 또 마음에는 각인시키는 “Lectio Divina” 수행을 행하였다. 그러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나 문장이 있으면 그것을 계속 반복하고 되뇜으로써 마음속 깊이 그 말씀을 되새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Meditatio” 단계이다. 그 후 주님의 현존 안에서 고요히 그분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께 응답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Oratio”의 단계였다.4)

이렇게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구체적인 이러한 수행방법을 계속 마음으로 터득하였고 또한 그것을 계속 후배들에게 전수하였다. 그러나 RB에서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Lectio Divina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 전통 안에서 Lectio Divina 수행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또한 훌륭하게 꽃피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수행에 대해서는 12세기 카르투시오회 원장이었던 귀고 2세5)가 그의 저서 The Ladder of Monks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먼저 그것을 살펴본 후에 각 단계들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해 보도록 하자. 물론 이러한 단계가 모든 수도승들에게 일률적으로 해당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에 인간적인 지식이나 어떤 고정된 틀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Lectio Divina 단계는 오랜 수도승 전통 안에서 계속 행해져 왔으며,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수도승들은 하느님과의 더 깊은 만남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수도승 전통 안에서 행해진 Lecctio Divina의 단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1. 귀고 2세의 The Ladder of Monks6)

12세기 카르투시오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2세는 수도승적인 성독 방법을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하였다. 즉 ① 독서(Lectio) ② 묵상(Meditatio) ③ 기도(Oratio) ④ 관상(Contemplatio)이다. 이러한 과정은 수도승들을 지상에서 천국으로 오르게 하는 하나의 사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독서(Lectio)는 영성생활의 초심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를 말한다. 묵상(Meditatio)은 좀더 진보한 이들의 단계로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 숨은 심오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독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로서 묵상에 사용할 주제를 제공해 준다. 묵상은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의미를 조심스럽게 숙고하는 것으로, 마치 어떤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땅을 파다가 그것을 발견함과 같다. 그러나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은 묵상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묵상은 단지 우리를 기도에로 이끌어 줄 뿐이다. 셋째 단계에서 기도(Oratio)는 좀더 열심한 사람들, 즉 사랑에 불붙은 자들의 단계로서 “악을 버리고 선을 얻기 위해”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의 인식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말씀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지게 된다. 이와 같이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가고 그것이 갈망하는 보물인 감미로운 관상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로, 관상(Contemplatio)은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들의 단계로서 자신들을 벗어나 하느님께로 올라가 영원한 즐거움과 감미로움을 맛보게 되는 단계이다. 비록 이것이 지상에서는 짧게 체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써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상은 천국의 감미로움을 목말라하는 영혼에게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의 인간적인 말이나 생각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된다. 단지 하느님이 내 곁에 현존하시며 내가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귀고 2세는 여기에서 독서의 단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로 보았고, 묵상, 기도, 관상의 단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의 단계로 보았는데 이것은 기도의 리듬인 들음과 응답의 관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단계를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였다. 즉 제1단계인 독서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제2단계인 묵상은 음식을 먹고 씹는 과정으로 제3단계인 기도는 음식을 마음의 내부로 삼켜서 맛보기 시작하는 것으로 제4단계인 관상은 기쁨과 감미로움을 즐기는 단계로 비유하였다. 아무튼 그는 이 모든 단계를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묵상 없는 독서는 헛되고, 독서 없는 묵상은 잘못되기 쉽다. 또 묵상 없는 기도는 열의가 없고,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기도가 열렬하면 관상에 이르지만 기도하지 않고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오히려 그 같은 경우는 기적적일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러한 단계가 내면생활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어떤 연속적인 단계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수도승들에게 성서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능케 하였고 또한 그에 합당한 응답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7) 이러한 면을 직시할 때 우리는 수도승들이 어떻게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는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각 단계들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자.


2. Lectio Divina(성독)와 Meditatio(묵상)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첫 단계로서 가장 기초적인 Lectio Divina 수행은 수도승 전통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것은 단순히 기도의 준비단계가 아니라 기도와 관상에로 직접 수도승들을 인도하는 것이었기에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Boheries의 Arnould는 ‘독서 그 자체 안에서 기도와 관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소에 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8)

수도승들이 주로 성서를 Lectio Divina하는 수행은 단순히 오늘날과 같이 머리로만 이해하는 독서의 형태가 아니라, 입술로 성서본문을 읽고 그것을 듣고 반복함으로써 마음으로 배우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즉 이것은 마음과 인간 전존재(눈과 귀 그리고 마음과 기억 모두를 동원함)로써 행하는 수행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에 있어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걷고 달리고 하는 인간 전존재와 관계되는 육체적인 훈련으로써 독서를 권고하기도 했다.9) 그러나 Lectio Divina와 Meditatio를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는 않다.10) 즉 Lectio Divina로부터 Meditatio에로의 변화는 거의 감지될 수 없기 때문에 가끔 그것들은 동의어로 씌어지기도 했다. RB 48,23에도 그러한 면이 발견된다.

장 르끄레르 신부는 이러한 Meditatio 단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즉 Meditatio와 Meditari 두 단어는 고전 라틴어권 안에서 세속적인 의미로 생각하고(to think), 숙고하는 것(to reflect)을 의미하였고 동시에 그것은 시와 음악, 수사학, 육체적인 훈련이나 운동 그리고 윤리적인 실천에 적용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언어에서는 그 단어를 성서나 성서주석을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이 두 상이한 의미들이 모두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이 둘이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고대에서 Meditatio는 Lectio Divina의 연장이며 또한 그것을 완성에로 인도하고 그 열매들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11) 드 보궤 신부는 이에 대해서 독서와 되새김이 서로 상호보완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독서가 계속되려면 되새김이 요청되고, 되새김이 솟아나려면 독서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음으로 배운 본문들을 입으로 다른 시간 중에 계속 반복하는 “Meditatio” 수행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고찰이 필요함으로 다음에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3. Ruminatio(되새김)

수도승들은 성서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듣고, 기억하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되씹음으로써 영적 자양분을 얻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묘사한 단어가 바로 “Ruminatio”(반추, 되새김)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낙타가 음식을 저장하였다가 그것을 살과 뼈에 스며들 때까지 천천히 되새김하는 것과 같다. 즉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서본문을 되씹음으로써 그것을 맛보고 또한 그 본문의 깊고 충만한 의미를 깨닫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12) 특히 이러한 되새김은 수도승 전통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수행 중의 하나였다. 사막의 교부였던 마카리오(St. Makarius) 성인은 우리 모두가 되새김하는 양과 같이 음식을 계속 되씹음으로써, 그 음식의 달콤한 맛을 보게 되고 마침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그 음식을 집어넣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예로니모 성인도 끊임없는 독서와 반복적인 묵상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서고(書庫)”로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Ep. 60,10). 까시아노(Cassianus)도 『제도서』에서 수도승은 일하면서 동시에 성서본문을 되새김(Meditatio)해야 한다고 말하였고(Inst. 4,12), 빠코미오 성인(St. Pachomius)은 수도승들로 하여금 최소한 신약성서나 시편을 암기하도록 요구했으며(Prae. 140), 또한 그러한 본문들이 각자의 소임지에서 혹은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언제나 성서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계속 반복되기를 바랬다(Prae. 3. 6. 13. 28. 36. 37. 59. 116. 122 참조).

펠라지오도 이러한 수행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그와 동시대 사람인 성 아우구스띠노는 펠라지오보다도 더 분명하게 독서를 하루 동안 연장되는 되새김과 관련하여 언급하였다. 즉 사람이 매일 빵을 먹듯이 낮과 밤 언제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성서독서를 할 때 그는 성서본문을 먹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반복할 때 그는 그것을 되새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승들이 일하는 중에도 시편을 낭송하고 되새김을 계속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De Opera Monachorum 17.20) 현명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되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후 체사리오(Caesarius)는 『수녀들을 위한 규칙서』에서 식당이나 일터에서 공동독서가 끝나더라도 마음에서는 되새김이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RCV 18.20.22 참조).

베네딕도 성인 역시 이러한 “되새김”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하는 중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유시간이나 독서시간에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일하면서 계속 성구를 되뇌던 RB 이전의 모습과는 크나큰 차이 중의 하나이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RB의 권위자인 드 보궤 신부는 일하는 중에 성서를 계속 되새기는 수도승 전통이 불행하게도 베네딕도회 전통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핵심적 표현인 “Ora et Labora”(기도하고 일하라!)는 표현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Ora et Labora et Lege et Meditare”(기도하고 일하고 읽고 묵상하라!)로 바뀌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수도승 삶에서 ‘되새김’이 없다면 독서의 연장도 그리고 계속적인 기도의 뒷받침도 없게 되어 그 생활은 불완전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13) 아무튼 이러한 “되새김”은 그 이후에도 계속 강조되었다. 그래서 12세기의 성 안셀모는 Meditation on Human Redemption에서 말하기를, 독서자는 자기의 구원자이신 분의 선을 맛보아야 하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되씹어야 한다고 했다. 중세 시토회의 유명한 아빠스였던 베르나르도 성인 역시 우리 모두가 ‘순수한 양’과 같이 되어 성서를 맛들이고 반추함으로써 우리의 내장을 채워야 한다고 했다(Sermo 16 Super Cantica II.2, Opera Omnia I, ed 참조).

이렇게 수도승 전통 안에서 되새김(Ruminatio)은 매우 중요한 수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 보궤 신부가 지적하였듯이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성서본문을 음송하고 반복하고 되씹음으로써, 헛된 세상의 가치에 휩쓸리지 말고 또한 잡다한 생각이나 온갖 말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어 하느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장 르끄레르 신부는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되새김”의 수행이 수도승들의 내면생활을 훨씬 더 진보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4. Lectio Divina(성독) - Meditatio(묵상) - Oratio(기도)

영적 여정으로서 Lectio Divina와 Meditatio 그리고 Oratio의 단계는 수도승들을 점진적으로 더 깊은 내면세계에로 인도하는데,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될 뿐이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수도승들은 성서본문을 Lectio Divina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Meditatio함으로써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그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응답하게 된다. 이에 대해 성 예로니모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분께 귀 기울이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14)(Ep. 22. 참조). 이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주도권을 그분께서 온전히 쥐고 계시다는 철저한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는 성서독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소리에 올바로 응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기도에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독서는 일반적으로 기도보다 선행되고 또한 기도를 일으킨다. 이것은 마치 노래가 음악으로부터 생기듯이, 기도 역시 독서로부터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RB에도 Lectio와 Oratio 단어의 밀접한 관계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RB 4,55에서는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으라”고 했으며, RB 4,56에서는 “기도에 자주 열중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RB 49장에서는 독서와 기도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수도승들은 언제나 독서와 되새김과 기도를 해야 한다. 성 치쁘리아노는 『도나뚜스에게』라는 작품에서 “결코 기도와 독서를 중단하지 말고 항구하게 독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할 것”을 권하고 있다.15) 장 르끄레르 신부는 수도승들의 독서가 Meditatio와 Oratio를 향해져 있음을 강조하였다.16) 즉 성서독서가 질문이나 지적욕구의 충족을 향하지 않고 Oratio와 Contemplatio를 향하고 있으며, Oratio와 Contemplatio는 바로 Lectio Divina와 Meditatio로부터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Lectio Divina” 수행을 통해 그 본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음미하는 Meditatio의 단계로 넘어갔으며, 또한 Lectio Divina와 Meditatio의 결과로, Oratio의 단계와 Contemplatio의 단계로 넘어감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장 수도승생활과 “Lectio Divina”

1. 수도승생활 안에서의 “Lectio Divina”의 위치


사막 교부들과 성 베네딕도 이후에 서방에서 발전한 수도승생활의 중요한 세 요소는 ① 성독(Lectio Divina) ② 노동(Manual Work) ③ 기도(Oratio)의 리듬에 의해서 형성되게 된다. 특히 “Lectio Divina”는 가장 전형적인 수도승적이고 관상적인 수도생활의 요소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행은 참으로 수도승다운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7)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으며 또한 당신의 구원신비를 그 안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수도승 삶에서 그 말씀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그 말씀으로 자양되고 새로 태어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말씀이 바로 “내 발의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 119,105)라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기에 성 베네딕도는 RB 첫 마디를 “Obsculta, O Fili ...”(오! 아들아 ... 들어라!)로 시작하였다. 즉 겸손하게 듣는 자의 모습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으로 배우는 “Lectio Divina” 수행을 하였던 것이다.18) 그들은 이러한 “Lectio Divina”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거나 체험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수도승들의 마음과 전존재에 인격화되고 육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확고한 신?망?애의 마음 안에서 “Lectio Divina”를 통해 하느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수도승들은 이러한 “Lectio Divina” 수행이 진실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리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들은 성서독서를 통한 직관적인 통찰과 체험을 갖게 되었고,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고 하신 그러한 높은 영적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우리는 오랜 수도승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다.19)

수도승생활 안에서 이렇게 중요시되었던 “Lectio Divina” 수행이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별로 강조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몇몇 수도승들은 “The Death of Lectio Divina”(Lectio Divina의 죽음)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이러한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수도승 삶 안에서 새롭게 재발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2. Lectio Divina와 들음

수도승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이기에 그것은 “들음의 삶”인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사도 16,14),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며(루가 2,19), 늘 마음에 ‘되새기는 것’(시편 1,2)을 의미한다. 수도승 전통에 의하면 수도승들은 매일 특히 정해진 시간에 듣는 수행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Lectio Divina”였다. 그들은 성서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그 심오한 신비를 마음속에 언제나 간직하였고 또한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뜻과 요구가 무엇인지를 “Lectio Divina”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20) 이렇게 그들은 성독시간에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실 인간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건강한 몸의 상징이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은 영혼이 건강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는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수도승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안에 깨어 있고자 했으며, 매순간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 그들이 봉헌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특히 성독시간은 깨어 있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었기에, 그들은 온 마음과 정신을 개방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던 것이다.21)

성 베네딕도 역시 수도승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개방하고 귀기울이고 듣는 수행의 중요성을 직시했다. 그래서 그는 RB 서두를 “Obsculta, O Fili...”로 시작했으며, 계속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니,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4,8), 또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라”(머리말 9-11절)고 권고하였다. 또한 규칙서 전체에서 드러나는 “침묵과 고요와 잠심의 분위기”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귀 기울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RB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수도승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였다. 잘 들을 수 있을 때 지혜는 시작되며 바로 이때 마음과 정신은 개방되고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과 “수용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22)

사실 초기 수도승 작품들을 보면 독서(Lectio)와 들음(Auditio)은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중세 때까지 수도승들은 주로 입술로 소리를 내어 읽고 귀로는 그것을 듣는 독서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동시에 듣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의 Lectio는 단순히 읽는 수행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수행이었다.23) 그래서 장 레끌레르 신부는 이러한 수행을 일컬어 “청각적인 독서”(Acoustical Reading)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이렇게 수도승 생활 안에서 행해진 Lectio Divina 시간은 곧 들음의 시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시토회의 유명한 아빠스 Andre Louf는, 모든 수도승들이 믿음을 가지고 매일 매일 영원한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각자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4)


3. Lectio Divina와 침묵

수도승이 성서독서를 할 때 고요와 침묵의 분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서본문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침묵의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고대나 중세의 수도승 전통 안에서 Lectio Divina는 성서본문을 입술로 적게 소리 내어 읽고, 그 소리 낸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는 인간 전존재를 동원하는 수행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중요한 시간에 수도승들이 무익한 재잘거림, 한담, 농담을 하는 것은 수도승 전통에서 금기였다. 사실 옛 금언들을 보면 너무 많은 말, 유희를 위한 말, 시끄럽고 천박한 말과 같은 번잡한 말의 남용을 꾸짖고 있다. 아를의 체사리오 역시 그의 설교를 통해, 집이나 교회 어디에서나 무익한 한담이 거룩한 독서에 크나큰 장애가 됨을 지적하였다. 더욱이 RM은 내면생활에 백해무익한 “잡담”이나 “한담”을 피하기 위해서, 형제들은 십인장을 중심으로 여러 그룹별로 나뉘어져 행하는(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독서하고 나머지는 귀기울여 들음) 공동독서의 양식을 취했다.25) 성 베네딕도 역시 RB 48장에서 “Lectio Divina”에 전념해야 할 시간에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Vacat otio aut fabulis)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무익하고 방해가 되는 형제들이 없도록, 특별히 한 사람의 장로들로 하여금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였다(RB 48,17-18).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점차로 Lectio Divina는 내면화되기 시작하여,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수도승들로 하여금 공적인 장소에서 침묵 중에 Lectio하도록 하였다. 그 후 12세기 시토회의 아빠스였던 Richalm of Schonthal은 수도승들이 소리내어 독서하는 것을 일컬어 악마의 유혹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이후로 수도승 전통 안에서 적은 소리로 Lectio Divina하던 수행은 거의 사라지고 완전한 침묵 중에 하는 Lectio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26) Lectio Divina는 어느 정도 침묵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옛 수도승 전통 안에서 행해졌던 “Lectio Divina” 수행(적은 소리로 읽고 들었던 수행)의 상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4. Lectio Divina와 마음의 순결

성독시간에 수도승들에게 참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순결이었다. 순결한 마음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라고 가르치셨다. 바울로 사도 역시 사랑하는 아들 디모테오에게 “청춘의 욕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힘써 구하십시오”(2디모 2,22)라고 권고하였다. 이렇게 오직 순결한 마음만이 주님을 뵈올 수 있고, 하느님 역시 그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 주신다. 특히 그분은 순수한 마음을 추구하는 모든 수도승들을 Lectio Divina 중에 기도에로 인도하신다.27) 그러므로 수도승들이 성독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순결이었다. 특히 이러한 마음의 순결은 이집트 수도승 전통을 서방에 소개했던 까시아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는 『담화집』에서 모세 아빠스를 통해 수도승생활의 궁극목표는 바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라고 언급하면서 거기에 이르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마음의 순결”을 강조 하였다. 수도승들의 모든 금욕생활은 바로 이것을 얻기 위한 것이며 그로써“하느님 나라” 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결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해서 철저한 자기포기와 끊임없는 기도라는 두 가지 구체적인 수단을 언급하였다.28)

이렇게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마음의 순결”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성서독서에 임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신비와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5. Lectio Divina와 항구성

수도승 전통에서 성독수행은 RM이 말하고 있듯이 영적인 노동으로서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항구성을 요구한다. 실제로 수도승들이 하루의 여러 시간 동안 성서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따분함과 지루함 그리고 잡담하고자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들은 항구히 성독수행에 정진함으로써 그러한 유혹들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마침내 주님의 심오한 말씀 안에 머물며 그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성 베네딕도는 혹시라도 형제들이 이러한 여러 유혹들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한 두 사람의 장로들로 하여금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수도승들이 항구하게 성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RB 48,17-18). 이러한 항구성에 대해서, 까시아노 역시 {담화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신은 지속적인 묵상이 당신의 정신에 채워져서 그것이 마치 당신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형성할 때까지 온갖 방법을 다해서 모든 걱정과 세속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언제나 거룩한 독서에 전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4,10).

성 예로니모도 수도승들이 성서의 여러 결실들을 붙들어야 함을 그리고 성서가 결코 그들의 손과 눈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Letter CXXV, 7.11 to the monk Rusticus, P.L. 22 참조). 성 틸리히 역시 성독에 있어 항구성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승들이 성서독서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케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충실성과 항구함이 요구됨을 강조하였다.29)아무튼 수도승들에게 성서독서는 일종의 수행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수행에 전념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고 또한 그분을 체험할 수 있었다.


6. Lectio Divina와 일

옛 수도승들에게 있어, 성독은 단순히 어떤 일정한 시간에만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수도승들은 일하는 시간에도 Lectio Divina 시간에 마음으로 배운 성서본문을 그들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계속 반복하였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식사 전인 제8시-제9시까지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여 성서 구절들을 기억에 채워, 일하는 중에도 계속 시편이나 성서본문을 되뇔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하였다.30)

사막의 은수자들이나 이집트 수도승들에게는 규칙으로 규정된 “Lectio Divina” 시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그러한 수행을 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일하면서 동시에 성서본문들을 계속 음송하였다. 한 예로 성 빠코미오의 규칙서에서는 수도원의 어느 소임지에서나 성서본문에 대한 되뇌임이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계명집 제116항을 보면, 빵 만드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침묵 중에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시편이나 성서의 어떤 구절을 되뇌일 것을 권고하였다. 이렇게 옛수도승들은 일하면서 동시에 성서본문을 자연스럽게 암송했다. 그러나 베네딕도 성인은 “한가함이 영혼의 원수”임을 직시하고(RB 48,1; RM 50,1-2; 집회 33,29) 수도승들이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Lectio Divina” 하기를 권고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일과 성독과의 관계가 구별되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Lectio Divina 수행이 수도승 삶에서 매우 중요함을 직시하여, 수도승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아무런 일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히 “Lectio Divina”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일하는 중에 성서본문을 되뇌던 옛 수도승들의 수행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로 인해 옛 수도승 전통 안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훌륭한 유산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31)

일과 독서와의 구별로 인해서, 오늘날의 수도승들은 성서독서의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일에 더 심취하고자 하는 유혹을 더 크게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띠노는 수도승들이 활동에만 너무 열심히 몰두함으로써 하느님을 관상하려는 열의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신국론』에서 지적하였다(19,19). 드 보궤 신부 역시 인간 심리학적 측면에서 수도승들이 단순히 일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도록 깨우칠 필요는 있어도 그들이 일에 몰두하도록 촉구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였다.32) 아무튼 옛 수도승들에게 있어 “Lectio Divina” 수행은 일정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중에도 성독시간에 익힌 성서본문들이 입과 마음으로 암송의 형식으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수도승들의 마음 안에 하루 온종일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7. Lectio Divina의 구체적인 수행

고대 세계에서 Lectio Divina 수행은 언제나 인간 전존재로서 행해졌다. 즉 옛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고 들으면서 기억에 채워 넣고 그것들을 하루 온종일 반복하고 암송함으로써 그 말씀의 의미를 맛보았다. 이것은 머리나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배우는 수행이었다. 장 레끌레르 신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대에서의 수행이 입술로 소리를 내어 읽고 반복하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마음에 의한 배움(Learning by Heart)보다는 입술에 의한 배움(Learning by Mouth)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무튼 고대에서의 Lectio Divina 수행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전체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눈으로 성서본문을 보고 입으로는 읽으면서 기억은 그것들을 저장하고 지성은 그것의 의미를 헤아리며, 의지는 하느님 말씀이 실천에로 옮겨지도록 돕게 된다.33)

성 베네딕도 시대에도 Lectio Divina 수행이 작은 소리로 행해졌음을 RB 48,5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즉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제6시 기도가 끝나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각자 침대에서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독서를 하고자 하는 수도승들에 대해서는, 다른 형제들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자 독서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중세 때 역시 고대의 이러한 수행이 수도승들 안에서 계속 행해졌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Lectio Divina 시간에 작은 소리로 끊임없이 성서본문을 소리 내어 읽고 들을 수 있었다. 즉 어떤 본문을 마음으로 배우기 위해서, 그들은 눈으로 본 문장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고 주의를 집중하여 귀로 들었던 것이다.34) 그러나 오늘날 베네딕도회 수도원들 안에서 Lectio Divina 시간에 이러한 수행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우리는 옛 선배 수도승들이 전해준 훌륭한 유산을 다시 재조명해 보고 새롭게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영성생활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제3장 “Lectio Divina”와 그리스도인의 삶

... 나머지 전문은 첨부 파일을 참조하세요.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파일첨부

2,77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