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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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렉시오 디비나와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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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412

렉시오 디비나와 전례1)


들어가는 말

이번 제3차 동아시아와 필리핀의 베네딕도 수도회 장상 모임에 여러분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베네딕도 수도생활의 이상(理想)을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인 성독(聖讀)입니다. 저는 개인기도라 여겨지는 성독과 교회의 회중기도인 전례, 이 두 가지로 수도생활의 이상을 살아보려고 40여 년간 애써왔습니다.

이번 모임의 시작 강의로 저에게 주어진 제목은 ‘성독과 전례기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이 두 가지 주제에 관한 수많은 학문적 연구들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대부분 저의 수도생활의 공동기도 또는 개인기도의 체험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소견들이 이번 모임의 목적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베네딕도 성인과 수도승적 기도 방법

교회 안에 많은 영성 학파가 있는 것처럼 기도하는 방법들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어떤 영성 이론의 개요보다는 기도의 수행에 대해 말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기도의 다각적 국면을 고찰하지 않고, 몇 가지 세부 지침들(규칙 8-20장: 성무일도의 배정; 43장: 성당에 늦게 온 이, 45장: 성당에서 잘못하는 이에 대하여, 47-48장: 시간경, 52장: 수도원의 성당)을 만들어 제자들이 실제로 기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따라서 성인의 영성과 기도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성인이 제자들에게 기대했던 기도, 온전한 기도에 대한 지침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느님 말씀을 사랑함

규칙서에서 기도에 대해 말할 때 맨 처음 주목되는 점은 성서를 대단히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에 대한 장(章)들에서 성인께서는 로마식 성무일도에 따라 기도하도록 아주 세세한 지시를 하며, 특히 ‘시편의 배정’(8-20장), ‘수련자는 시편을 암기하라’(8,3, 48,13), ‘시간경에서 시편을 노래할 때 마음은 목소리와 함께 하나가 되어 기도’(19,7)하라고 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열망과 합해지면, 수도자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깊이 귀 기울이기(Ausculta, O fili) 시작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깊은 관계를 통해 하느님과 또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하여(머리말 35-36) 마음이 목소리와 하나 되어 응답하게 됩니다(19,7).

2) 전 존재로 참여하기

베네딕도 성인이 가르치신 ‘기도하는 방법’의 또 다른 점은 기도에 전 존재로 참여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기도하는 목소리에 마음과 정신이 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 외에도 기도하는 방법에 관해 매우 현실적인 사례들을 언급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의 일’에 모든 사람이 참석하게 하기 위하여 침실을 배정할 때 잠이 적은 이들과 좀 더 수련된 이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자게 하여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일’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22,7-8). 성인은 누가 늦더라도 코루스에 출석할 것을 매우 엄격히 요구하였습니다. 코루스에 육체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에 다른 악에 의해 수도자가 유혹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43,7-9). 또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와 같은 중요한 시간 전례에서 장상이 『주님의 기도』를 크게 외울 때 모든 이들은 생활개선을 위해 열심히 경청하고 마음으로 함께 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상이 『주님의 기도』를 혼자서 큰소리로 바치는 동안, 형제들은 서로 용서하겠다고 한 언약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모든 이들이 공동 기도에 참석해야 하며, 일단 참석하면 각 사람이 모두 거기에 온전히 몰두하기를 원했습니다. 실상 수도자가 기도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은, 수도자가 일과(日課)의 모든 일에 열중하기를 바랐던 그분의 열망의 반영일 뿐입니다.

3) 친교를 위한 기도

이것은 성규에서 공적 기도에 대해 세부사항들을 일일이 규정하고, 성독(개인기도: 48장 참조)을 위해 많은 시간을 균형 있게 배정하여 수도생활을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음’으로 보는 성인의 전반적인 견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규칙서 머리말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러한 이상(理想)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수도자가 하는 모든 일, 무엇보다 기도는 ‘하느님을 찾음’이란 맥락에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단순히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하느님과의 관상적 일치는 수도자가 지향하는 목표가 됩니다. 비록 구함과 찾음이 실제로는 인간 심층의 깊은 갈망에 대한 응답이므로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과 추구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기도는 궁극적으로 무아경이나 열반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동기가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도승적 삶의 길을 따르려는 이들을 가르치고, 수도생활을 한 걸음씩 배워가게 하며, 매일 되풀이되는 일들을 꾸준히 하게 하는 데 있어 성인께서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은 하느님과의 관상적 일치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말을 끝맺으면서 수도생활을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49절: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2. 성독(Lectio divina)

1) 개관

여러 세기를 통해 수많은 영성가들에 의해 토의되고 윤곽이 드러난 성독의 과정이, 제게는 베네딕도적인 기도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생생한 방법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 성독은 보통 성서 (또는 성서에서 유래한 전례적 후렴 같은 것)의 본문으로 시작되며 본문을 듣는 동안 조용히 잠심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법칙처럼 언제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베네딕도적 기도 방법과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둘째, 지성과 마음의 심연에서 들으려 노력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Ausculta)하기 위해 필요한 전인적 몰두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서 본문을 단순히 지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이 아니라, 듣기 위해 모든 감각 기능을 곤두세워 듣는 것과 같은 아주 능동적인 들음입니다. 온 존재로 참여해야 한다는 베네딕도의 관심이 여기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셋째, 이러한 경청은 진정으로 자신을 영적 유순함에 개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안에서 하실 수 있는 자유를 하느님께 허락해 드리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뜻합니다. 즉, 골자를 파악하거나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해 성서를 헤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입술과 마음에 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학문적 연구처럼 파악하고 검증하거나, 말씀을 곡괭이로 파헤쳐야 하는 바윗돌로 보기보다는 사랑받아야 할 연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이런 종류의 기도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넷째, 우리는 내면의 이런 귀 기울임에 속하는 자기포기로 목자이시며 사랑하올 주님, 산상에서 설교하셨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는 기적을 행하셨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 말씀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참된 하느님의 현존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Immanuel)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성삼의 제2위격이신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강생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에서, 즉각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예수께서 언제나 우리 각 사람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적 기도 방법의 이상인 일치가 여기서도 실현됩니다.

2) 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역행하기

성독의 과정은 성서가 형성된 과정을 역행하는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2) 예컨대 우리가 읽을 자료로 복음서를 택한다면, 그 복음서 저자는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보나 사도들의 이야기 혹은 다른 이들이 예수께 대해 말하는 것들을 통해 예수께 대한 체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저자는 다른 이들도 자기처럼 예수님과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구전들을 기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저자는 그것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말하는 식으로, 아마 당대의 질문들에 답변하면서 예수께 대한 저자 자신의 신학 즉, 자신의 영적 이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저술했습니다.

복음서의 형성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말 말씀 씀을 선포하고, 놀라운 일들을 하시고, 이 땅에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행위를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2)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주로 이야기 형식이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되풀이하면서 예수께 대한 구전을 전한 분들입니다.

(3) 복음서 저자는 교회로부터 받은 말씀과 이야기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또는 지역 교회가 그들의 상황과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바램에 부응하기 위해 예수께 대한 일관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4) 이렇게 쓰인 복음서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성독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1)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서의 본문으로 시작합니다.

(2) 믿음과 사랑을 다하여 마음의 귀로 내용을 깊이 듣습니다.

(3) 우리는 초기교회와 저자가 처해 있던 상황과 신학에까지 다가갑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독을 하는 참 목표를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술적 지식 역시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에 다다르게 되며, 아니 더 낫게 표현하자면, 그 이야기의 의미를 꿰뚫어 알게 됩니다.

(4) 그 다음 말 말씀 씀 앞에 조용히 사랑스럽게 쉬고 있으면 갑자기 마치 주께서 설교하셨던 산 중턱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거기에 제 2위격이신 성자, 사람이 되신 예수 안에서 말 말씀 씀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한번 단순히 예수의 현존 안에서 사랑의 관상과 개인적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3. 전례기도

전례기도는 공동체와 거기 속한 모든 이들이 말 말씀 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 예절 형식을 갖추어 바치도록 만들어진 기도입니다. 전례 기도를 이해하고 그 진가를 아는 관건은 이 두 요소인 공동체와 예절 형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 공동체

현대의 서구 세계에 의해 깊이 영향 받았거나 형성된 이들에게 공동체는 어려운 현실입니다. 공동체 안에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그런 개인주의는 전례를 해치는 걸림돌입니다. 표면상 공동체를 수용하는 사람들조차 공동체에 관해 종종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공동체란 그 단체에 가입하기를 선택한 개인 모두의 집합”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정의는 실상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주의를 방어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안에 모인 개인들의 총합이 아니라 그 개인들보다 더 큰 실재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공동체를 선택하심으로써 이루어진 신적 요청입니다. 공동체를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몸이 있기에 손가락이 소중한 것이지 손가락 때문에 몸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신비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각 지체들이 거룩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전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 드리며, 이 몸을 통해서 각 사람이 바치는 개인기도 역시 특별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과정은 구원 역사와 우리에게 대해 하느님 친히 지니신 주도권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2) 예절양식

둘째 요소인 예절양식은 현대 서구사상과 행동주의에 깊이 영향받은 이들 사이에서 아주 어려운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상징들과 의식(儀式)의 형태들은 사회의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여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정생활의 관습들인 식사, 오락, 노동을 포함해서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고도의 기동력, 전화와 팩스와 인터넷을 통한 즉각적인 의사소통 등 모든 것은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로 하여금 전통적 상징들과 예식 구조들을 불신하게 하고, 다른 경험들을 추구하게 합니다. 우리는 왜 다른 모든 이처럼 코카콜라는 마실 수 없는 거야? 어째서 전통의상을 꼭 입어야만 하지? 나는 블루진을 원한다고요!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전통적 예식 형태에 반감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식 형태는 있어야 하며, 상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은 여전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종교단체, 가정 혹은 사회의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버리면 결국 다른 양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그레고리안 성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질적이고 교회적이라고 하고(한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고서도), 또 고대 찬가에서 따온 전통 찬미가들은 지루하기 때문에 가톨릭 전례음악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이런 전통 음악을 포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진정한 예배는 인간실존의 심원한 내면에 와 닿는 하느님 체험에 근거하며, 그런 체험은 음악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깊이 기도하기 위해 노래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기도를 표현하는 힘 있는 음악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인의 귀에도 듣기 좋은 새로운 교회음악을 즉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안해 낸 이 음악 역시 상징입니다만, 전통음악을 대신하여 까페나 캬바레에서 듣는 음악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세속적인 음악을 교회 안에서 부르는 일이 흔히 벌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자신들의 삶을 시작한 때부터 깊은 체험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은혜를 받았고, 이 은혜와 이에 대한 그들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세례와 다른 성사 전례 안에 예식화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공동체이었기에 공동 전례 안에 그들의 체험을 예식화해야 했던 것입니다.


4. 공동 예식으로서 전례 행위

공동 예식은 전례 기도가 행해지는 예식화 된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면 공동 예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실상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서 하느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주도권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언어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을 전하는 성사인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사성제의 희생 잔치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성만찬에서 일차적으로 우리가 나누는 것은 육체의 영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둘째로, 성사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는 공동체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우리 능력에 속합니다. 그러나 말들의 의미를 꿰뚫어보고 관념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말씀께 다가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과 어떤 친교를 맺게 될 것이며, 이것이 성사의 정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더 깊은 친교를 위한 최상의 준비가 됩니다.

셋째로, 말씀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에 이르기 위해 그 말씀의 의미를 통찰하는 것에서 공동체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 모두를 위해 단 한 번 이룩하신 구원의 실재를 새롭게 체험합니다. 이것이 개정한 독서집 머리말에 나오는 “구원사의 새로운 사건”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공동전례에서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는 신비를 통해 예수님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한 그 근원적 사건과 예수님의 구원 행위의 사건을 깊이 나누는 기회를 가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넓은 범위의 일치를 체험합니다. 공동체로서 우리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분”(루가 4,32), “‘전에 이와 같이 말한 분은 아무도 없었다’고 불려진 분”(요한 7,46)을,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경외로 가득 차서” “우리는 오늘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루가 5,26)라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신 말씀에 의해 감동을 느낍니다. 또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의 계시로써 눈과 귀가 열리는 믿음의 기적을 통해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현존을 새롭게 체험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로서 우리는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11) 라고 기도하셨던 그분과 일치됨을 알게 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성삼위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5. 성독과 전례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성독과 전례간의 독특한 상호작용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을 단순히 실습해야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내적 영성과 목적에 바탕을 둔 것이기를 바랍니다. 성독은 개인에게 말하고 그가 이 말 말씀 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 때 그의 깊은 내적 존재를 하느님과의 일치로 초대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전례도 계약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일치로 공동체를 모으는 말씀으로 항상 시작하며 공동체가 신앙으로 그 말씀을 수용할 때 그 뒤에 이루어지는 성사적 행위는 더 부요하고 깊은 성사적 방법으로 완성됩니다.

만일 한 가지 기도방법을 잘 습득하면 다른 것도 잘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옳게 수행하는 성독은 보다 더 깊은 일치를 열망케 하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충만한 성사만이 이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전례를 잘 거행하면 우리가 동경하는 사랑의 행위(사회정의와 관계)만이 아니라 매일, 매 주간(시간 전례와의 관계에서), 거룩한 노래를 읊게 하며 좀더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치를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더욱 더 성독을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이 둘의 상호관계를 도표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성 독 전 례
1. 성서 말씀을 개인이 읽는다. 1. 성서 말씀을 회중에게 선포한다.
2. 성서말씀을 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다 깊은 차원에서 전인적 수용과 개방성으로 받아들인다. 말씀의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 성서가 기록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따른다. 2. 성서를 좋은 생각을 위한 참고서가 아니라 구원 사건으로 공동체의 신앙 행위 안에 받아들인다. 신비와 상징을 넘어 그것이 나타내는 실재에 도달하는 과정이 따른다.
3. 본문을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수락하는 도구로 받아들인다. 3. 성서 본문을 신앙 공동체 안에 진정으로 현존하는 분으로 받아들인다.
4. 항상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현재 내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 이것이 관상적 일치이다. 4. 성사적 행위로 이끄는 현존하는 말씀께 공동체가 온전히 승복한다. 이것이 성삼과의 친교이다.


맺는 말

이제까지 간략하게 말씀드린 신학적 고찰이 성독과 전례가 같은 일이라는 인상을 여러분에게 남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독에서는 개인이, 전례에서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말 말씀 씀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에는 확실히 상호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전례에 대해 설명한 방법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 가지 이유로 전례 개혁에 관한 많은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수도승들은 개혁 후의 개혁(!)을 해야 할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개혁 이후 30 년간은 이런 저런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옛 것에서 벗어나고, 무수한 자료들과 전례서들에까지 손질을 하고 새로운 전례문(典禮文)과 현대 음악, 새로운 악기들, 현대식 교회 건축 양식들을 도입하는 것 등입니다. 이제는 기존의 것들을 바꾸기를 그만두고, 마음을 움직이도록 해야 할 시기입니다.

성독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선택된 특별한 이들의 수행에 하나 더 보태는 영성 수업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영성 수업인 전례 그 자체와 관련하여 명백히 교회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제 나름대로 의역하면서 끝맺고자 합니다.

“우리 안에 (성독과 전례를 통하여 심원한 기도를 배우고 표현하는) 좋은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해)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완성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독과 전례를 통하여) 우리의 사랑이 더욱 더 넘치고 깊은 영적 체험의 부와 이해로 맑은 양심과 흠 없는 행동을 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그 날까지 여러분이 참으로 중요한 일들을 가치롭게 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빕니다”(필립 1,6.9-10).

감사합니다.

(코이노니아 제24집 69쪽, Marcel Rooney, O.S.B, 곽수영 베아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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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스 프리마스(Marcel Rooney, OSB)가 1997년 12월 2일, 동 아시아와 필리핀 베네딕도 장상 모임에서 한 강의, “Lectio Divina and Liturgy”를 옮긴 것이다.

2) 제가 이런 생각을 다소 다르게 발전시켜 왔다 하더라도 여러 해 전, 아마 1961년에 American Benedictine Review에서 읽은, 성서학자 데이벳 스탠리(David Stanley) 신부님의 기사에서 제 사상이 싹텄음을 이 자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명합니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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