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수도 ㅣ 봉헌생활

성규에 나타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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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409

성규에 나타난 기도1)


1. 성규에 나타난 기도

베네딕도께서 성무일도를 다루실 때 취하신 비약적인 수법은 언제나 독자들과 주석가들을 당황하게 한다. 성인은 많은 규정들에 대하여 어떤 취지를 설명하지 않고 시간 기도 시간표를 결정지어 꾸밈없이 서술한다. 성인은 규칙서 16장에 가서야 비로소 시간 기도에 관한 전체적인 계획을 말하고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성무일도에 관해서 그 최초의 의도(개요)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성서적 근거

베네딕도께서는 다음의 두 시편으로써 시간경의 싸이클을 정당화하신다. “하루에 일곱 번 내가 당신을 찬미 하오리이다”(시 118,164)2). “내가 당신을 찬양하기 위하여 한 밤 중에도 일어났나이다”(시 118,62)3). 하루에 일곱 번 드리는 시간경은 성서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성인의 견지에서는 그 자체로써 거룩한 특성을 지닌다. 이 구절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성서적 근거로 성무일도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와 같은 간결한 표현을 참작하여 하느님의 일(Opus Dei)은 성령의 감도로 된 하느님의 말씀에서 직접 유래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래도 위 구절은 스승의 규칙서(The rule of Master)에 나오는 구절과 서로 연결시켜 보는 것이 타당하다.4)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시편 작가의 말을 읽게 된다.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신탁(信託: oracle)과도 같은 또 하나의 장(章)을 덧붙이기보다는 일을 합리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이 말들을 끝에다 인용하고 있다. “스승”에 있어서는 성무일도가 또 다른 근거를 갖는다. “교부들이 지킨 법칙과 옛 전통”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무일도를 하는 일차적인 근거를 성서에서 찾지 아니하고 전통에서부터 찾고 있다.

“스승”의 이러한 서술은 모든 사학자들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으로서 수도 교부들에 의해 정리되어, 성무일도의 체계를 형성하였다. 시간 기도의 수와 그 순서는 성서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며 단지 성서는 이 점에 관하여 여러 각도로 간결하게 암시하였을 뿐이다. 기도에 대하여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시간 기도를 성서에 나오는 인물에다 즐겨 적용시킨다. 예컨대 다니엘, 시편 작가, 사도들 그리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러나 각 시간 기도가 어떤 일정한 자료나 성서의 사건이나 혹 여러 가지 문헌들과 연결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결은 명확하지도 않고 기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도 적다. 이와 같이 시간 기도들을 모아서 기도로써 사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체계화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3. 끊임없이 기도하라

전통적인 시간 기도는 이미 성서에서 예증되고 제시된 것으로서 다만 인간이 창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심혈을 기울인 많은 성서학자들의 심오한 성서학적 연구를 옳게 판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3세기에 있어서 기도할 시간을 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5) 그리스도의 초대에 가능한 한 잘 응답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바울로 사도와 루가 복음사가에 의하여 기록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이 부르심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모든 그리스도교 생활과 수도생활에 있어 가장 강한 동기가 되었다. 교부들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권고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간 기도의 체계는 단순한 인간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시간 기도를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단지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기도할 시간이 정하여져 있다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본성에 유용할 뿐 아니라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일정한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간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이끌어 준다. 시간기도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의무를 대신하여 주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기억을 새롭게 도와주고 기도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이런 규제(規制)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시간 기도의 체계는 자유롭고 정확하면서도 또한 주님의 뜻을 이행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규율도 주지 않았다. 주님 자신이 의심 없이 지키셨던 “하루에 세 번”이라는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6) 복음적 규율은 모든 규례적인 규정을 초월한다. 그리스도교인은 그의 전 존재로써 마땅히 사랑하여야하는 것과 마땅히 “끊임없이”7) 기도하여야 한다. 아무도 이러한 초대에 온전히 응답할 수는 없다; 어떠한 인간의 법칙도 이러한 자유를 보존할 수 없고, 이러한 능력을 소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습관이나 일반적인 전통을 따라서가 아니라 각자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성의를 표시하고 응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전적으로 혼자서 책임이 있다.

교부들과 초대 수도자들의 이러한 견해로 미루어 보아 완덕을 추구하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는 시간 기도만을 열심히 바친다는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다. 클레멘스 성인은 일찍이 시간 기도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멸시하였다. “그노시스교도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 한다.” 이러한 열정적인 이상은 곧 수도자들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피 흘리는 죽음이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협하지 않게 되자 수도자들은 순교자와 같은 정신으로 그의 전 생애를 바치고자 시도하였다.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이제 사회적 권위와 당면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로부터 도망하여 사람들과 떨어져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고자 함이었다. 최고의 희생을 갈망하는 원의는 지상적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는 열망과 결부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이런 새로운 가치관이 대두되어 오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는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하게 부각 되었다. 이러한 강한 욕망은 삶의 많은 욕망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이것은 모든 현세적인 몰입으로부터 애착을 없애주는 삶의 존재 이유(raison detre)였다. 은수생활을 할 때, 수도자는 이러한 요구를 문자 그대로 지킬 수 있다. 낮 동안과 밤 4시간의 반(半)은 육체노동을 하면서 방해받지 않는 기도 생활에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기도 생활은 전통적인 시간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밤의 시작 기도와 끝기도를 지켰을 뿐이며 낮 동안은 성무일도 없이 지냈다. 이러한 실행은 이집트에 있는 수도자들이 시초부터 지켰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관습이었으나 메사디아 집단에서만 지키지 않았다[역자 주: 마니케아 주의의 영향을 받아 350년경 시리아에서 발생하여 소아시아에 번져나간 정적(靜寂)인 기도 지상주의자들을 가리킨다].


4. 성무일도

어떠하던지 간에 이러한 “이집트식 완덕주의”는 많은 수의 수도자들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이집트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던 수도자들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수덕주의에 따른 시간 기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간 기도를 여기 저기 삽입하였다.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과 같이 수도원의 성무일도 싸이클은 이와 같이 연속성이 분명히 있었으며, 이러한 연속성은(특히 회수도자들에 있어서)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 그 자체를 애매하게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홀로 있는 그리스도교인을 위하여 제시되었던 기도 시간표는 이제 공동체의 모든 인원들을 얽어 주는 사회성을 가진 규율이 되었다.8) 시간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제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예식이 되었다. 이제 각자의방에서 하던 것을 공동으로 모여서 하게 되었다. 자유롭던 것이 의무화되었고, 정해진 내용이 없는 개인 기도였던 것이 모든 공동 의식에서 필요한 절차(ordo)있는 기도가 되었다.

우리는 3세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시간 기도에 무엇을 포함시켰는지 거의 알 수 없다. 주의 기도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는 기도에 관한 모든 논문들이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12사도의 가르침(Didache)에서도 서술한다. 여기에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이 첨가한 바에 의하면 알렐루야가 따르는 몇 편의 발췌된 시편이 있었을 것이다.9) 이 모두에 있어서 형식은 거의 없고 간결하였으며 자유롭고 자발적인 기도가 있어 시간을 연장시켰다. 성직자의 성무일도는 그렇지 않았다. 이 기도는 항상 몇 편의 시편을 외워야 했으며, 때로는 더 많고 각 시편마다 주어진 기도가 있었다. 아침 시간과 때로는 저녁 시간을 제외하고, 이들 시편은 시편 책에서 순서대로 사용하였다. 주요한 시간에는 거의 의무적으로 성경소구가 있었고 시편이 뒤따랐다.

이와 같이 수도원의 성무일도는 본래 초대 그리스도교 기도에서 발생되었으면서도 그리스도교 기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여기에서 형식주의의 형태로 되돌아감을 인정해야 하는지? 영성적인 자유는 이로써 제재를 받은 것 같고, 그리스도의 끝없는 초대는 전례적인 규칙으로 된 것 같으며 은총의 가동성 및 다양성은 고정되고 형식화하는 기능이 된 것 같다.

이와 같은 경향의 안타까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해 버리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다. 공동체가 드리는 성무일도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개념과 연관을 갖고 옳게 이해할 때만이 성무일도의 의의를 찾는다. 시간 기도만으로 개인의 기도를 국한시키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즉 시간경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과 하늘로부터 내려 온 법이나 현상이 아니며, 다만 겸손한 인간의 시도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1세기에 그리스도교인은 물론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법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성무일도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성직자의 성무일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리를 지탱하기 위하여 세워진 방파제로써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두 강 둑을 연결하고 그 강을 건너가게 하는 철도의 선로를 연결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무일도의 시간 기도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려는 사람의 노력을 북돋아 준다. 만일 시간 기도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항상 주님을 찾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인의 영적 설렘을 가라앉힌다면, 이는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까시아노(Cassiano)는 이를 이해하여 성무일도에 관한 그의 글에서 주로 이집트 전통의 개인적이고, 자발적이며 끊임없이 기도와 수도원의 의무로서 일정한 시간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동방의 기도를 서로 대립시켰다. 까시아노에게는 이집트에서 이행하는 끊임없는 기도를 불연속적인 성무일도보다 더 중요하게 보았다. 전자의 자발적인 열성은 공동생활로 인하여 주어진 준수보다 더 가치가 있다.

시간 기도는 끊임없는 기도를 지향해야 하고 성무일도는 개인 기도를 잘하게 해야 하며 공동으로 드리는 예식은 개인의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 기도보다 전례적 예배 행위가 더 우월하다고 철두철미하게 믿고 있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위와 같은 사실은 얼른 보아서 굉장히 놀라운 서술이다. 그러나 시간 기도와 미사 전례를 구별하여 이 양자의 본질과 기원의 심오한 차이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놀라움은 없어진다. 후자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행위이다.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주님이 세우신 그 기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 기도는 그와는 달리 복음적 근거에서 나온 것이며 그래서 다른 역사를 갖는다. 이것은 본래 공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법칙으로서 그 기원이나 목적은 직접 개개인의 양심에 달렸으며, 각자의 개인 생활에서 순간순간 이행하여 진다. “너희가 기도하기를 원할 때,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여라.”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주의 기도문에서“우리” 라는 말은 가장 개인적인 기도를 교회의 기도로 승화한다. 만일 누가 형제들과 함께 기도한다면 이는 보이는 공동체의 중요함을 인정하고 그의 기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그러나 이러한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수도자들에게는 있다. 공동 기도는 공동 규칙을 따르면서 서로의 도움 없이는 쉽게 이행할 수 없는 개인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수단이다. 이러한 수도 제도의 견지에서 볼 때, 회수도자들의 성무일도는 지나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a nec plus ultra)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는 번거롭지 않은 보조 수단이며, 끊임없는 기도를 대신하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한편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요구는 공동체의 개념으로서 그 근본적 의의를 파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대조는 우리가 지금까지 대충 다루어 온 역사에서 증명된다. 또한 이러한 비교는 미사성제의 전례 행위가 어찌하여 계속 교회의 교계 제도로써 다스려지고 형성되었나를 설명하여 준다. 의심 없이 수도생활은 미사성제를 처음부터 받아들였으나 오랜 기간 동안 그 탁월함을 내세우지는 않았다.12) 또한 의심없이 성직자들은 수도자들같이 점점 더 시간 기도를 드리는 경향이 생겼다. 몇몇의 열심한 신자들과 함께 기도드렸으며 마침내는 텅 빈 교회에서 홀로 기도드리게 되는 날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미사성제와 성무일도는 기도의 두 가지 다른 형태로써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미사성제는 직무상의 것이며, 공적인 것으로 주교가 집전하고 규제한다. 성무일도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것으로 개인의 신심이며 카리스마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그 근원이 다른 것을 우리가 형식이 다른 것처럼 혼동한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미사가 개별적인 의식의 형식으로 보이고 시간 기도가 공동체적이며 준(準)공적인 형태로 보인다 할지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5. 수도자의 성무일도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직자의 성무일도와 수도자의 성무일도를 조심성 있게 구별하여야만 한다. 전자는 이를 이행하는 교계 제도의 기능적 이유 때문에 직무상의 특징을 갖는다. 한편 후자는 개인적이고, 카리스마적 기원에 더욱 가깝다. 교회에서 정한 성무일도와 수도자의 기도가 다 같이 교회의 권위 있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같은 이유나 같은 차원에서가 아니다. 전자에 있어서는 종래 내려 온 전통과 같이 성직 계급이 예배의 형식을 장악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수도자의 성무일도의 참된 목적은 교회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 의식이 아니며 도리어 공동체적인 훈련을 통하여 모든 회원들이 개인적이며 외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려는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13)

확실히 이러한 구별은 공적 예배 의식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던 북부 유럽 국가에서 발전한 수도원의 경우에는 약간 모호하다. 5,6세기 로마의 수도원 대성전에서는 이미 수도생활의 이상과 전례적인 의식을 서로 절충한 것이 엿보인다. “스승”과 베네딕도에 의하여 서술된 성무일도에 관한 내용 가운데 몇몇 특징은 이러한 뒤섞인 환경에서 성직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 두 규칙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소규모의 본래의 공동체들은 순수하게 수도적인 것을 보존한다. 여기에서는 성무일도가 교계적인 책임성과는 연관됨이 없이 종래 내려오던 기도의 내적인 관점을 고수한다. 지성소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이행하여야 하는 책임이라기보다는 성무일도는 수도자 개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각자가 치루어야 할 빚처럼 각자가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기도소 밖에서도 할 수 있으며 소그룹으로 혹은 혼자, 주방에서나, 침실에서나, 정원에서나, 길에서나, 여행 도중이나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육체적인 노동도 수도자의 의무로 또한 주어졌는데 이것은 수덕적인 훈련인 동시에 경제적인 필요성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 일(Opus Dei)을 체계있게 하기 위해서는 손의 일(Opus Manuum)을 필요로 했음을 참작해야 한다.

성무일도를 체계화하면서 “스승”이나 베네딕도께서는 일과 기도를 조절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미묘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분은 이러한 문제를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한다. 즉 “스승”은 가대로부터 이따금씩 허락하는 방법을 쓰고 베네딕도는 일반적인 준칙을 가볍게 하여 예외를 아주 적게 두는 방식을 취한다. 이 두 분은 분명히 수도자의 유일한 의무는 오직 정해진 시간에 가대 성무일도에 오는 것 만이라고는 결코 서술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아무 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Nihil operi Dei praeponatur)14)는 것은 특정한 환경에서만 타당한 금언이다. 베네딕도는 기도 시간표에서 허용한 적응 방법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수도원 봉쇄 생활을 결코 성무일도의 시간경을 드리는 수도원 의식에만 종속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도자의 생활과 수도원 생활에서 규칙서가 허용하는 성무일도에 대한 비중은 어떠한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과 연관을 맺지 않고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스승”과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일의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원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결함 때문에 주석가들은 우리에게 단지 오해하기 쉬운 답만을 제시하여 왔다.

Delatte는 말하기를 “베네딕도회의 가장 적당하고 특유한 일은 그의 몫이며 선교인 전례이다. 베네딕도 회원은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을 하도록 서원을 발하며 - 이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하느님이 흠숭 받아야하는가를 알며 또 영원한 생명의 언어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에 의하여 만들어진 형식을 따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 형식화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수도생활의 본질이라면 이것은 공식적으로 형식화된 직무와 수도자의 소명 자체를 혼동하는 것이다.

Butler는 “일차적인 공동체의 일은 성무일도의 공적 의식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교회에 대한 연관은 뚜렷하지 않았다(아마도 “공적”이라는 말에 포함된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성무일도는 수도자의 개인적인 생활과 관계를 짓지 않고 집단적인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Butler가 Gasquet의 법정(法廷)의식의 이미지를 인용하는 것은 성무일도를 형식적이고 외적인 준칙처럼 돋보이게 한다. 그는 성무일도와 다른 의무와의 관계도 설명하지 않고, 성무일도의 탁월성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일차적 의무”라고 하여 다른 여러 가지 의무 중에 하나로 간주하여 제시할 뿐이다.

Herwegen은 또한 “성무일도는 교회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시편은 성화의 가치를 지닌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의 신비스러운 매력이란 하느님과 만나는 공동체의 성무일도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예찬을 거듭 강조하였다. Basilius Steidle의 주석은 시간 기도의 역사와 기도에 관한 위대한 수도자들의 가르침에 대하여서는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면서도 성무일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드리는 교회의 기도”라고 보며, 개인 기도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6. 일상생활에 나타난 성무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견해를 가지고 이 주제를 다룰 때야 비로소 성무일도에 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성무일도가 끊임없이 기도의 위치와 다른 작업과의 관계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대립시킬 수는 없다. 수도자의 전 생애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며 기도하려는 노력이다. 이와 같은 끊임없는 갈망과 노력을 더 잘 충족시키고 이행하기 위하여 성무일도의 시간경이 있는 것이며 시간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생활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고 필요한 때에 끊임없이 기도하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무일도는 많은 활동 중의 한가지의 활동이 아니며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활동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단지 수도자의 전 생애를 채워주는 특유한 영적 활동의 특별한 양식이다. 이 양식은 연속성이 없으며, 집합적이며, 규율로써 정해져 있으면서도 지속적이며,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기도 생활을 유지하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수도생활 안에서 성무일도와 다른 활동과의 조직적인 관계는 이 둘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우리는 다음 단원에서 성무일도의 가장 오래된 형식은 시편들과 기도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개 수도원의 하루 생활은 “묵상”하면서 하는 육체적인 노동과 기도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도 항상 입으로는 성서의 구절을 소리 내어 반복하였으며 이를 “Meditatio”라 하여 회수도자나 은수자나 모두 지켰던 법칙이다. 시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가장 애용되었던 자료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육체노동이나 성무일도는 성서 구절 특히 시편을 끊임없이 외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듣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것은 기도였다. 이와 같은 기도는 성무일도에서 시편이 끝날 때마다 있게 된다. 시편 후에 하는 이 기도의 시간은 장상의 신호로써 정한다. 일할 때는 그가 하는 일의 성격과 기도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좀더 자발적으로 이러한 기도를 시작하고 끝맺었다. 여기에 대하여 “스승”과 베네딕도께서 만든 단 하나의 법칙은 “자주 기도에 열중하라”는 것이다.15) 그러나 성무일도 기도와 노동을 하면서 하는 기도 사이에는 이와 같이 적은 차이점이 있으면서도 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즉 성서 암송을 강조하는 간단한 기도들이다. 이와 같이 성무일도는 끊임없이 기도하기 위하여 체계를 세웠고, 같은 요소로서 만들어졌고, 같은 방법으로 시행된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성무일도의 본질은 모두에게 분명해져야 한다. 성무일도는 공동체의 형식 안에서 일하는 동안 수도자가 누리는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끊임없는 대화를 매 순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성무일도는 또한 성독(Lectio Divina), 식사와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Lectio”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성서를 읽고, 듣고, 암송하여 외우고 혹은 성서를 통달할 마음의 준비인가?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영감 받은 자료를 기억해 두었다가 성무일도 중이거나, 작업 중에 성서 구절을 끊임없이 외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독서는 식사 때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식당이나, 기도소, 작업장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작업 중에 성서 구절을16) 암송하는 것과 같이 식사 때에도 독서가 항상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하느님의 일(Opus Dei)에서도 계속된다. 아침부터 밤까지 많은 일에 종사할 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귓전에 메아리 쳐져서 자주(이에 대한) 응답을 드리게 한다. 성무일도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모든 일이 끝났을 때에 누리는 특전 받은 순간이다. 이때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고 더욱 열성적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응답 기도를 할 수 있다.


7. 기도와 일

그러나 이와 같이 수도자의 전 생애를 차지하는 영적 활동과 성무일도의 기본적인 동질성을 강조하는 한편 베네딕도와 “스승”은 하느님의 일(Opus Dei)을 다른 활동들과 분명히 구별하려고 의도한 몇몇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이 두 규칙서는 놀랍게도 일하는 동안 해야 하는 기도에 대해서 명확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기도에 자주 열중하라”는 것을 착한 일의 도구들(제4장)에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말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를 하는 동안 드려야할 기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많은 규정을 세우면서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하는 동안에 기도하라는 말은 없다. 이 점은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있어서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묵상에 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은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하다.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한 규칙서이면서도 기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다. 분명히 일과 연관을 갖는 단 한 가지의 기도는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는 작업 전 기도와 하느님께 감사하는 작업 후의 기도뿐이다.17) 육체노동을 끝마치는 이러한 기도가 일하는 동안 드린 묵상을 대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상념은 사순절 동안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스승”은 성무일도와 시간경 사이에 보통 행하여지는 것으로 시편이 따르지 않는 “순수한 기도”를 서술한다.18) 그래서 공동체는 이러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던 것이 틀림없으며 이는 수도자 개개인이 이러한 습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네딕도께서는 이러한 공동 기도를 특수 기도로서 대치하였으나 학업 중에 이런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은 전혀 없다.19)

6세기에 작업을 방해하는 기도는 결코 회수도자에게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실이다.20)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무일도는 수도자의 유일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 새로운(신선한) 이유를 가지고 대두되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무일도만이, 소위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도들과 성서 암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하느님의 일이 어떠한 의미로서 발전되어 왔는지 비교하게 한다. 본래 이러한 표현은 수도원 전체의 수덕을 표현한다. 베네딕도와 “스승”, 그 시대에 있었던 체사리우스에게는 이것은 단지 성무일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수도자들의 기도 시간은 남은 시간을 채우는 속된 작업에 비교하여 거룩한 활동 유형(type)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시간경과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흐려졌으며 이는 의심없이 작업하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라고 본 관점이 점차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편이나 독서하는 동안 일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서 이와 같은 성무일도의 배타적 견해는 강조되었다. 이집트의 전통이며 후에는 고대 프랑스의 전통으로 수도자들은 밤 기도에서 성서를 봉독할 때, 손으로는 바쁘게 일을 하였었다. 확실히 이러한 전통은 새벽기도를 길게 할 때 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수도자들의 작업과 삶을 성무일도가 직접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어떻든 간에, “스승”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어떠한 종류의 육체노동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서 어떤 종류의 일도 분명히 용납지 않는다. 우리의 규칙들이 관련을 갖고 있는 Afro-Roman 전통은 고대 이집트와 프랑스의 성무일도보다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교계적인 강조점은 더 가진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의심 없이 사제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일하는 동안 개인의 방에서 묵상을 하였던 빠코미오 수도자는 기도소에서 성서를 들으면서 일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꼈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주교는 수도자들의 위와 같은 행위는 제단을 속되게 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는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뜻으로 베푸는 잔치도 그의 교회 밖에서 하도록 권유할 정도였다. 만일 위와 같은 수도원 실천이 평신도들 사이에서 번져간다면 어떠한 종류의 무질서가 일어나게 될 것인가?

이와 똑같은 모순이 로마의 수도원 분위기 안에서 존재하였을 수도 있었으며 그래서 수도자들도 점차 성직자들처럼 육체노동과는 인연을 끊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집트의 전통과 성직자들에 의하여 영향 받은 수도 생활 사이에 대립되는 점을 본다. 평신자와 그들의 사목자들에게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수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전 존재로써 하느님께 봉사하겠다는 고요하고 직접적인 목적을 가졌으므로 이러한 구별은 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활동이 거룩하게 봉헌될 수 있으므로 기도와 모순되지 않는다. “수도원 전체는 교회의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만나는 곳은 어디든지 기도하기에 적당하고, 서로 의견이 상통하고 기쁘게 기도할 수 있어야겠다.”21)

위의 서술은 “스승”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심중에도 성무일도가 이미 거룩한 특징을 가져 세속에서의 활동과 분리하여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베네딕도에 있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그의 규칙서에서는 생활양식과 전례적인 규정들을 함께 언급하지 않았으며 아주 따로 떼어서 규정들을 열거한 첫 머리에 전례적인 규정을 서술하였다. 성무일도와 작업과의 갈등은 이미 “스승”에서도 있다.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는 규칙서의 의미심장한 표현으로서 일단 해결된다. 이제부터 이 두 가지 “작업”은 서로 연관을 가지면서 존재할 것이다. 수도자는 다른 하나를 서둘러 하기 위하여 하나를 버려야만 한다.

제도서(Institutes)에서 “스승”과 베네딕도의 설명보다 더 잘 표현된 것은 없다. 까시아노의 생각으로는 성무일도를 알리는 신호에 즉시 응답한다는 것은 가장 탁월한 순명의 행위였다. 그래서 수도자는 만일 그 신호가 그를 자기 방에서 끌어내어 공동 작업을22) 하게 하는 신호일지라도 똑같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보고 순명할 수 있었다. 위의 두 규칙서는 이와 같이 신호에 대한 지체 없는 순명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그래서 성무일도에 정확한 시간을 지키게 되었다.23)

이러한 행위의 의미는 바뀌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공동체적인 활동에든 출석하기 위하여 모든 개인적인 작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갈등이라는 것은 이제 자기 의지와 순명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된 일과 하느님의 일의 문제에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편견으로부터 생긴다. 즉 활동주의로부터 성무일도를 보호하자는 데 잇다. 까시아노는 이집트의 회수도자들 사이에 이러한 유혹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일과 기도가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수도 생활의 특징이며 표현이다.

위의 두 규칙서를 쓴 시기는 하느님의 일이 수도 생활의 다른 활동과 점점 분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스승”의 규칙서에서 하느님의 일은 시간경의 기도이며, 이것은 적당한 시간에 이행되었고 시간을 성화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에서는 이와 같은 의도는 없고, 일상 작업에 대한 언급도 없다. 성무일도는 시간경과는 관계없이 고정관념(a pensum)으로 변화되려는 경향이 있으며, 수도자가 할 수 있을 때 이행하였다. 하느님의 일을 다른 활동과 분리하는 것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종류의 일로 넘어간다는 표시가 되었다. 스승의 규칙서에서 표현하는 것과 같이 지체 없이 모이게 하는 대신에 베네딕도는 작업의 끝마침과 성무일도 사이에 신호를 두 번 주었다.24)

베네딕도의 규칙서에서 성무일도와 생활과의 분리 과정을 깊이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다룬 규칙서에 있는 공통적인 모든 증거와 후자의 독특한 것을 모두 참작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당시에만은 적어도 그 고유한 의미를 거의 보존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무일도는 개인 기도에서 나왔고, 이를 잘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성무일도는 다소의 시편이 따르는 개인 기도로써 만들어졌다. 공적인 성무일도와 개인기도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없었고 서로 상반되는 것은 더욱 없었다. 하느님의 일은 처음에 공동체의 행위가 아니었으며, 사회성을 지닌 경신 행위도 아니었으며 단지 개인의 의무를 완수하려는 행위였다. 더욱이 성무일도의 공동체적인 관점이 있었지만 혼자 하는 기도보다 우월함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수도생활의 견지에서 볼 때 공동 기도는 하느님과의 고독한 만남을 익숙하게 하려는 훈련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 강조하는 바는 어떠한 외적이며 심미적인 요소에 있지 않고, 시편에 마음을 쏟는 것이며 침묵의 기도로써 순화하는 데 있었다. 성무일도는 시종과 왕과의 사무적인 회담으로 생각되어선 안 되고, 더군다나 수도자는 교계제도로부터 위임을 받아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에 의하여 특별히 봉헌된 교회의 일원이 아니다. 수도자는 단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혼자서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시간경 기도는 수도자로 하여금 쉽게 이러한 이상에 접할 수 있게 도와주며 이러한 이상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시간경은 특별한 업행이 아니며 다른 행위와 전혀 공통점을 갖지 않을 유일한 종류의 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순간 순간 현실화하는 것이다. 성무일도는 생활과 일치되는 것이다.

“스승”이 베네딕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성무일도의 체계에 있다. 오늘날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읽는 독자는 고대의 성무일도 형식이 시편들과 침묵 기도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들은 오늘날 성무일도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초대 성무일도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각 시편마다 일정한 시간의 침묵이 있었고, 이 시간 동안은 성무일도를 바치는 사람들이 일어났다가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렸다. 극히 간략하게 된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는 이러한 실천을 암시하지 않았지만, “스승”의 규칙서에선 의심 없이 이러한 실천에 대한 암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25)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종래 가지고 있었던 성무일도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의심하게 된다.

규칙서에 대한 현대적 해설에서는 모두 일치하여 성무일도와 소리 내어하는 송경(頌經)을 동일시한다. 현대 규칙서 주석가들은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이 성 베네딕도의 성무일도도 연속적으로 나열된 시편들로써 구성되었다고 본다. 시편 전이나 후에 하는 이차적 요소들, 예컨대 계, 응송, 찬미가, 독서, 짧고 긴 응송, 찬송의 노래, 토문 등은 단지 성무일도란 소리 내어 기도드리는 자료의 연속이라는 인상을 짙게 해 줄 뿐이다. 침묵 기도가 있다면 밤 기도 끝과 낮 기도의 끝에 하는 “하늘에 계신…”인 것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도 침묵으로 드리는 송경(頌經)이지 자유 기도는 아니다. 성무일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하는 경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만일 현대 주석가들이 “하느님의 일”의 의미에 대한 베네딕도의 이상을 알기 위하여 “시편을 외우는 태도에 대하여(제19장)”에서 의도한 것 이외의 것을 찾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무일도는 낭송의 자료들로만 완전히 구성되어 있고, 시편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며, 시편에 관하여 쓴 제19장은 공동 기도에 대한 영성적 논문역할을 한다. 제20장 “기도 때의 공경심에 대하여”는 성무일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기보다는 도리어 개인 기도에 대하여 말한 것 같다. 마지막 구절에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는데 대하여 말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 그레고리오 대화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공동”이라는 말은 단순한 결론이며 부록으로서 성무일도의 끝에 언급한 것이다. 성무일도가 연속되는 낭송이라는 견해는 다루지 않았다.

이 두 장에 대한 일반적 해설에 의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주제, 공동체적 기도와 개인 기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대 영성과 비슷한 구별이다. 하나는, 전례적인 성무일도로써 관습에 의하여 형성된 하나의 기도문이며 소리 내여 외웠다. 다른 하나는 각 수도자들이 내적으로 침묵 중에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혼자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고대의 “하느님의 일”이 시편과 다른 낭송하는 경문들은 물론, 침묵 기도로 구성되었다면 이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제19장과 제20장은 성무일도를 다루고 있다. 즉 하느님의 일의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인 시편과 침묵 기도의 실질적인 순서를 다루고 있다. 베네딕도께서는 그의 규칙서에서 성무일도뿐만 아니라 침묵의 기도에 관하여 언급하였으며 이는 성무일도의 일차적인 목적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침묵 기도는 전례적인 기도와 연관이 없는 형식으로써 부록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며 전례와 일차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성무일도에서 하는 침묵 기도는 “여분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무일도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RB 20장의 뜻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 전체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문제시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고대 교부들에게 있어서 성무일도는 결코 단순한 자료의 암송이 아니었다. 침묵기도가 굉장히 큰 위치를 차지하였었다. 각 시편 끝에 침묵을 하는 동안 파문당한 형제들이 해야 한다고 제시한 “스승”의 기도의 양(量)으로 판단하더라도26) 이 침묵의 간격은 약 1분 30초는 걸리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실행은 시편을 외울 만큼의 시간을 침묵 기도에도 할애(割愛)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스승”에서 성무일도를 필요에 따라서 짧게 하여야 할 경우, 그가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세 번 하는 침묵 기도 중에서 두 번은 안하게 하는 것이었다.27)

이와 같이 성무일도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서 분명히 시편과 시편 사이의 침묵은 아주 짧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우리가 까시아노, “스승”, 베네딕도를 읽을 때, 기도는 마땅히 “아주 짧아야” 한다는28)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양에 있어서도 침묵 기도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인 견해는 침묵 기도에 대한 영성적 상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시편은 단지 존경스러운 태도와 주의력 있는 마음을 요구하지만, 침묵 기도는 좀더 간절한 간원의 표현이기를 요구하며 몸과 마음의 온 힘을 다하여 바칠 것을 요구한다. 눈물이 흐르고29), 한숨은 열성으로 꽉 찬 마음에서부터 절로 나오고30), 손은 마치도 그리스도의 발은 움켜쥐려는 듯 뻗치게 된다31). 침묵 기도는 시편 뒤에 잠깐 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노력을 배로 드린 표현이다. 이와 같이 침묵 기도의 시간은 영성적 중요성을 최대한 나타낸다32). 몸가짐의 대조적인 차이로 보아서도 침묵의 기도는 성무일도의 최상의 행위라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시편이 앉아서 듣는 것이라면 침묵 기도는 서서 하는 것이다. 시편은 서서 노래하는 한편, 침묵의 기도는 몸을 쭉 펴고 엎드려서 드린 것이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의미에 있어서도 침묵 기도는 시편의 절정이다. 침묵 기도가 이집트 전통을 따라 “영광송”의 순서에서 행하여지던, 혹은 “스승”에서와 같이 제일 먼저 시작되는 침묵 기도는 위대한 성삼께 대한 환호송(Doxologia)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침묵 기도와 영광송은 모두 흠숭과 경배의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 시편 끝에 위치한다는 것도 서로 같다.


8. 시편 찬송과 기도


침묵 기도가 성무일도의 영성적인 절정이며, 극치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직도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침묵 기도 그 자체가 참된 기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기도가 아니다. 진실로, 많은 시편들은 기도들이다. 그러나 다른 유형에 속하는 시편도 많이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찬미하는 시편, 외로운 사람과 죄인의 운명을 묵상하는 시편, 출애굽과 이스라엘이 정복한 이야기들을 읊은 서사시인 시편, 왕에게 주는 훈시나, 혼례의 노래, 메시아의 예언 등 - 이러한 것들을 기도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찬미의 시편일지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대화라기보다는 인간에게 해당되는 부름일 수가 있다. 수도원의 성무일도가 이와 같이 시편의 여러 가지 특징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아침기도와 끝기도만은 제외하고, 시간경은 시편의 번호 순서대로 짜여졌다. 기도의 시편을 성무일도에 사용하고자 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더 나아가서 로마 시대에 사용된 수도원 성무일도의 후렴들은 그 중의 많은 것들이 우리 규칙서가 쓰여 졌던 그 시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후렴들은 특수한 시편으로써 하느님께 드리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이 전혀 없다. 후렴 중에 어떤 것은 인간에게 적용된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개인에게는 관계가 없는 서술로써33),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시편이 무엇보다도 기도로써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러 곳에서 시편이 하느님께 드리는 노래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까시아노는 “우리는 주님께 시편을 노래한다.”고 말하였고, “스승”은 “가장 조심성 있게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시편이 “oratio” 혹은 어떤 상징적인 기도라고 본 사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oratio” 혹은 상징적인 기도는 시편이 아니라 침묵 기도이다.

시편은 성무일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나? 시편은 침묵 기도를 위한 준비이며 기도를 하게 하는 초대이다. 일반적으로 시편은 취사선택하여 외우지 않고 순서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위에서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시편의 순서에 따라 시편들은 성무일도에 사용된 것으로 - 여기에서 시편은 일주일 주기로 배정되어졌다. - 매일 많은 시간을 성경 독서(Lectio Divina: 하루 일정 양을 읽되 성경을 주로 읽었음)와 새벽기도에서도 항상 읽는 독서 부분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시편도 성서의 다른 책과 같이 영감을 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무일도에서 시편은 침묵의 기도 전에 온다. 기도의 언어로써 하느님께 아뢰기 전에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도 체사리우스가 그의 설교 중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명확하게 침묵 기도와 시편의 관계를 설명한 사람은 없다.34) “시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기도하는 것은(orare) 땅 속에 이 씨를 묻는 것과 같으며, 다음에 쟁기로 갈아서(arando) 다시 덮어 주는 것과 같다. - orare와 arando 같은 … 이러한 말장난은 번역되어질 수가 없다. 이러한 비교는 시편 다음에 침묵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성서 낭독 같이 한 영혼 안에 천상의 말씀을 심는다. - 그래서 이와 같이 심은 씨는 가슴 깊이 들어와 묻히게 된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헛되고 세속적인 생각들이, 새들이 들에서 쪼아 먹듯이, 이러한 씨를 잡아 챌 수가 없다. 이것이 침묵의 기도 역할이다. 이것은 밭을 가는 것과 같다.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인간은 그가 들은 말을 깊이 새기게 한다.


9. 대화의 법칙

침묵 기도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구절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묵상하면 기도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노래를 마친 후에 하느님께 탄원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충실하게 시편을 읊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노래를 마친 사람은 지극한 겸손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간원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그의 입으로 말한 것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실천할 자격이 있게 하시오”35) 이것은 침묵 기도의 이차적인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진정한 침묵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을 통하여, 침묵 기도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로 간주되는 시편을 떠나 기도하게 된다. 성경을 들었으면 마땅히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나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의 법칙은, 언제나 시작은 주님이 하시며, 가장 오래된 교회의 기도문에서도 꼭 같다. 신자들의 기도와 성찬 전례 전에 하는 대응 기도에서도 그러하다. 시편과 기도를 합친 형식은 또한 수도원 성무일도에서 재현한다. 이 형식은 2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예배 형식을 본받은 것이며 유대인들의 기도 형식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드리는 하느님의 일과 유사성이 많은 것은 부활전야의 예식이다. 부활전야 예식과 성무일도가 같은 점은 성경에서 독서를 읽은 후에 시편 묵상 영창이 있고 다음에 기도가 따르는 점이다. 이와 같이 형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같은 의도, 즉 영신적 충동에서 흘러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적이며,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인간의 기도는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기도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모든 시편은 인간에게 보내는 영감 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또한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기도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인이 기도를 하기 위하여 성서의 어떤 책보다도 시편을 선택한 것은 분명히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도 전에 하는 시편은 우리를 기도할 수 있게 이끌어 주며, 그 보다도 시편은 우리가 한 기도를 밑받침하여 준다.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응답할 것을 가르치신다. 인간의 음성이 시편을 통하여 찬미하고 간구하면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한다. 시편은 기도를 하게 하는 성서적 전주곡이며 또한 입문이다. 시편은 새벽 기도의 초대송과 같은 역할을 한다. 초대송은 시편 노래의 입문이며 동시에 시작이기 때문이다. 침묵 기도가 없어진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도 이와 같은 시편의 이중적인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침묵 기도의 중요성을 다 열거하여 본 지금에 와서도, 성무일도에서 침묵 기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의심 없이 전례사가들이 어디서나 언급하는 공허함의 두려움(horror vacui) 때문에 없어졌다고 단편적으로 설명된다. 침묵은 일반적으로 사라지기 쉬운 것이며, 시간에 쫓기고 인간이 부주의할 때 어떤 형식보다도 고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침묵 기도가 점차적으로 소멸된 것은 무엇보다도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의 성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편을 읊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시편의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침묵기도는 절대 필요한 것이 못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원래 기도를 하게 하는 자극제로서 사용하였던 시편이 그 자체가 충분히 기도가 될 수 있고 타당한 기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기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기도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만일 이러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수도자의 기도에서 종래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행위로서 인정받았던 것이 상실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10. 영광의 찬가(Doxologia)

시편 끝에 드리는 영광송의 사용이 많아짐에 따라 의심 없이 영광의 찬가가 더욱 조장 되었다. 동방에서는 주로 수도원에서 시편을 시작할 때 후렴이 있는 시편을 읊은 후 영광송을 외웠다. 이러한 전통은 특히 이집트에 있어서는 후에 우리가 사용하는 두 규칙서와 로마에서 시행한 것과 같이 대부분의 시편에 있어서 그렇게 하였다고는 말하기 곤란하다. 원래 시편은 일반적으로 영광송이 따르지 않고, 침묵이 따랐다.36) “스승”과 베네딕도의 시대에 있어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영광송은 가대를 바꾸어 번갈아 하는 시편 후에37) 외웠을 뿐 아니라 응송 끝38)과 혼자 읊는 시편39) 후에도 외웠다. 이러한 성삼위께 대한 영광의 찬가는 모든 종류의 시편을 끝맺음하였다. 이제 이러한 찬미의 형식은 침묵 기도와 동등하게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흠숭의 표시도 되었다.40) 내용상으로 보아서 영광송은 최상의 흠숭 행위이며 동시에 각 시편 끝에 영광송을 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이 마땅히 지향하는 성삼위께 대한 영광을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광송은 여러 가지 이유로서 침묵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기도문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스승”에서는 영광송을 침묵에 대한 서론으로 이용한 것 같다. 수도자의 “Opus Dei”와 “Canon”의 기도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찾아보자. 사제는 미사 때에 축문을 하기 전에 침묵 기도를 하기 위하여 잠깐 멈춘다. 이러한 습관은 가장 최근까지 보존된 유일한 침묵 기도의 형식이다. 최초의 형태로 되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으며 영광송만이 시편 후에 있었던 침묵 기도의 유일한 잔존이다.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것은 고대 침묵 기도가 있었다는 유일한 표적이다.

한편 응답적인 시편과 후렴으로 하는 시편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므로 말미암아 성무일도의 침묵 기도가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본래 대부분의 시편은 한 사람에 의하여 쭉 외워 나갔다. 한 사람이 시편 전체를 읊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앉아서 듣기만 하였으므로 그들 자신도 해야하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응송으로 하는 시편과 후렴으로 하는 시편은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행동으로서 시편에 응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응송과 후렴으로 하는 시편은 점점 보편화되었으며 수도자들은 이렇게 시편을 읊음으로써 성무일도에서 보다 능동적인 참여를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 점차 충족되어 갔다. 그들의 목소리는 울려 퍼지고 그들의 몸은(적어도 후렴 노래하는 동안) 오래 서서 있었으므로41), 무리하게 피로하였다. 이와 같은 시편의 참여가 더욱 보편화됨에 따라 침묵 기도의 매력과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침묵 기도가 왜 일반적으로 없어지게 되었는지를 여러 면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위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능가하는 이유는 없다.

여기에서 서술적 역사로서 소급하여 올라가 알아 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스승”에서 성무일도를 짧게 하려고 의도할 때, 우선적으로 침묵 기도를 없앴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시편이나 영광송 보다 침묵 기도가 덜 중요하였다. 말은 이미 침묵보다 우세하였고, 낭송하는 경문은 개인적으로 즉흥적인 기도보다 우세하였으며, 이미 짜여진 형식은 자발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우세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도 음식이나, 음료에서와 같이 예외는 있으며 침묵 기도는 일반적이고 결정적인 승복의 표시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네딕도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어찌되었던 간에 이미 6세기에는 침묵 기도는 근본적이며 대치할 수 없을 만큼 귀한 행위로 성무일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시편과 영광송은 필요에 따라서 침묵 기도를 대치할 수 있다. 침묵 기도는 시편이며, 또한 기도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가장 탁월한 기도가 아니며 유일한 기도는 더욱 아니다.


11.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시편

침묵 기도의 의의가 점점 모호해지는 한편, 시편은 더욱 더 기도로 간주되어졌다. 확실히 4세기부터 시편은 “주님께 드리는 노래”였다. 그러나 까시아노는 때로 “하느님께 드리는 노래”라고 말한 것은 시편의 다른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한 말이라고 본다. 그가 특별히 관심 있게 본 것은 시편은 잘 이해되어야 하며 듣는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적은 숫자의 시편을 선택하고, 긴 시편은 둘이나 셋으로 구분하고 선창자는 시편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읊어야 한다든가, 시편을 하는 동안 선창자들이 휴식을 취하여야 한다는 등, 시편의 맛을 감지케 하려는 많은 배려를 하였다. 이러한 모든 배려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지성에 호소하고, 서두르거나 피로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며, 성무일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영신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영감을 받은 기도문은 맛이 있어야 하며 그로 말미암아 영혼들을 침묵 기도를 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붙이게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변화는 6세기에 왔다. 시편에서 나타난 훈계적인 성격은 결코 간과되지 않았다. “스승”에서는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에게 “그가 발음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 안에 새겨 두어야한다”고 요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충고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지켜야 하는 허물없는 행동에 관하여 서술해 놓은 장(章)의 끝 부분에서나 언급한다. 이제 시편을 듣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이다. 시편은 누구에게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시편은 바로 “하느님의 엄위 앞에 드리는 의식이다.”

더 나아가서 말마디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 자체로서 하느님을 흠숭하고자 하는 근초적인 관심의 표이다. 외적인 행위에 관해서 언급한 후 “스승”에서는 내적 태도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흠숭이라는 생각만은 초지일관한다. 잡념을 없애야 할 이유는 잡념이든다는 것은 마귀를 집(마음)에 들어오게 하고 하느님은 문간(입)에 세워두는 격으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혀는 하느님께 매일 봉사함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어야 한다. 정신 집중의 필요성에 대한 동기를 말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승”은 위에 열거한 훈시의 동기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편을 노래함에 있어서는 개인의 영성적인 이익은 제이차적인 문제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요지에 대하여 거의 다루지 않고, “스승”은 원리적인 관점을 다시 다룬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목소리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느님께 부르짖어야한다”

이와 같이 까시아노와 “스승” 사이에는 시편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일대혁명이 있었다. 원래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개념 대신에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은 시편의 두 가지 방법과 몸의 두 가지 동작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까시아노 시대에는 거의 모든 시편은 혼자서 쭉 읊었다. 선창자는 홀로 섰고, 한편 수도자들은 성서를 읽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와 같이 시편을 앉아서 들었다. “스승” 시대에는 거의 모든 시편은 응답식이었다. 그래서 공동체의 모든 이가 서야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 어전에 있는 선창자들이 되었다.

까시아노가 살았던 이집트와 “스승”이 살았던 이태리의 전통 사이에 서로 다른 상이점도 결국 같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시편이긴 것은 둘 혹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각 시편은 한 몫에 읊었고 한편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시편을 나누어서 읊음으로써 좀 더 감화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로마와 “스승”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취향보다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데에 더 의의가 있었다. 시편은 하나의 거룩한 것으로 시편이 쓰여진 그대로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시편에 대한 베네딕도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하여서는 이제 위의 생각을 고려해야 한다. 저녁 기도와 새벽 기도에서 주로 길이가 긴 시편을 구분하고, 낮 기도에서 시편 118의 각 절을 나누어 영광송을 삽입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베네딕도는 “이집트”의 까시아노의 전통을 따른 것 같이 보인다. 베네딕도의 관찰력으로 명료하게 서술된 이 원리가 로마시대의 수도생활에서 잃어 버렸던 - 어쩌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 그 중요성을 되찾게 되었나? 이러한 해석은 선창자들과 독서자들을 어떻게 선택하였어야 하는가를 알게 되면서 자연히 알아듣게 한다. 베네딕도는 시편과 독서를 들을 때, 듣는 이는 감명을 받아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을 한 후 즉시 선창자가 지켜야 할 태도는 “정중함”과 “경외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스승”이 하느님 어전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이들에게 요구하였던 그 것이다.42) 또 한편 제19장 “시편을 외울 때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에서는 독서를 높이 평가하거나 시편의 교훈적인 면을 다루지 않는다. 그 반대로 베네딕도는 이 주제에 있어서 “스승”의 서술과는 달리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이 전혀 없다.43) 그러나 베네딕도도 호칭경으로서 성무일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고 특히 성무일도 동안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한다.44)

만일 그가 “목소리와 마음의 조화를 이룰지어다.”라는 권유로써 결론을 맺는다면, 이것은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의 현존 안에 있다는 원리의 자연적인 귀결이 된다. “스승”의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기에 상응하는 정신집중은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의 표시로써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스승”보다는 베네딕도에 있어서 시편은 무엇보다도 기도라고 보는 것이 분명하다. 베네딕도는 시편을 나누는데 있어서 까시아노의 기준을 많이 참작하였지만, 베네딕도에게서는 시편을 독서(Lectio)로 보는 초기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선창자들을 선택하는 그의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외적으로 위엄을 갖춘 사람으로 이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을 주로 선택하였으리라 믿어진다. “듣는 사람이 감명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 행위인 시편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시편 노래가 흠숭이라는 개념은 6세기에 이르면서 점점 더 강하여졌고 분명해 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혼자 읊는 시편 고유의 방법이 실행되자, 종래 시편은 시편을 읊는 사람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침묵 중에 듣고만 있었고 시편을 들은 후에 영감을 받았다는 감정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시편을 양편으로 나누어서 외우는 것은 위의 사실과는 전혀 양립 될 수 없는 사실이다.

거의 절대 침묵 중에서 듣기만 하였던 것을, 성무일도에 참여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이제 한편 가대에서 맞은편 가대에게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시편을 두 가대가 나누어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성서가 인간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의의는 모두 없어지고 단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라는 사상만이 나타난다. 침묵 기도의 소멸은 이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성무일도는 본질적인 요소의 하나를 잃었다. 듣고 응답하는 리듬 대신 하느님의 소리와 인간의 소리가 서로 얽힌 단지 쉴 사이 없이 계속되는 낭송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기도하기 위한 서곡이 되지 않으며 명백한 메시지로서 메아리치지 않는다. 인간의 소리는 이제 영감을 받은 기도문(시편)을 통해서만이 들렸을 뿐이며 다른 수단은 없다. 기도의 자발성이 아닌 자율성이 이제 성무일도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자율성은 오직 현대에는 “30분 묵상 기도”에서만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은 확실히 성무일도에서 침묵 기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적절한 보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짧게 자주 하는” 기도들을 대신 할 수는 없다. 기도의 방법, 시편의 의의, “하느님의 일”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변화하였다.

우리는 “스승”과 베네딕도와 같이 이러한 견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서술한 이러한 변화의 의의는 이미 그 분들에게는 매혹적인 것이 되었으나 그 분들의 규칙서는 과거의 것과 충분히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일 원한다면, 6세기까지 수도원 기도 생활의 생기 넘치는 리듬을 확립하였던 침묵 기도와 시편의 근본적인 조화의 상태로 언제인가는 수도 생활이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45)

(코이노니아 제2집 16쪽, Adalbert de Vogue, 홍성임 돌로레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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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1969년도 Monastic Studies 제7호에 기재되었고 Mount Savior 수도원 수사의 영역 “Prayer in the rule of St. Benedict”에서 번역하였다. 본래 92개의 주(註)가 있으나 한국의 실정으로 미루어 보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많은 주를 삭제하였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초대 수도자의 성무일도에 관한 의의를 보다 새롭게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대에도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주님의 초대에 몸과 마음으로 호응하기 위하여 더욱 뜻있는 성무일도가 한국에서 시행되기를 바라며 이 번역이 그러한 움직임을 위한 이해와 협조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 시편 118,164 비교: RM 34,3(The Rule of the Master) 스승의 규칙서는 5세기경, 이태리 어떤 수도 교부의 규칙서.
3) 시편 118,64 비교: RM 33,1.
4) RM 34, 1-3.
5) 1데살 5,17; 로마 12,12; 골로 4,2; 에페 6,18 - 루가 18,1과 21,36 - 성서적 원리는 분명히 3세기 떼르뚤리안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6) 다니 6,11.14.
7) “끊임없이”라는 바울로의 표현은 또한 루가가 표현하는 “항상”이라는 것과 같이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아주 엄격하게는 “중지함이 없이”라는 뜻이요, 넓은 의미로는 지나친 방해가 없다는 뜻이다. 후자의 의미로 사용할 때에 성서 저자들은 이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가장 이상적이고 제한된 것과 같은 전자의 엄격한 의미도 또한 포함된다.
8) 은둔자들은 보통 한 군데에 모여서 살았으며, 그들도 기도에 대한 공통적인 전통을 따랐다.
9) “알렐루야”는 사람들이 기도하려고 모여 올 때, 보통으로 사용되던 응답적 시편 찬송이다.
10) 마태 6,6.
11) 마태 18,20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비교; 바실리우스 규칙 37,3. 수도원 전통은 공동 기도를 천거하기 위하여 이 자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다. 까시아노는 이것을 인용하지 않는다. “둘이나 셋이 모였다” 함은 정신적으로 잘 집중되었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된 때가 있다. 참조: Philoxenus, Letter. a Patricius 35, Cesarius, Serm 152, 1.
12) G.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pp 326-327. 점점 미사성제는 수도 생활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ibid, 332).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수도 생활이 시간 기도의 중심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13) 로마에 있는 대규모 수도원들은 그들의 성무일도를 정리함에 있어 많은 자유를 누리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12세기까지 유행되었던 전통의 다양성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스승”과 베네딕도의 시대에는 무정부 상태였던 것 같다. 많은 것이 전개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실천도 밀어 닥쳤고 서로 영향을 주었다.
14) RB 43,3.
15) RM 3,62; RB 4,56 참고
16) 때때로 일하면서 독서하였다. 비교; RM 50,28-33: 53,38-41.
17) RM 50,20과 50, 47-50 : 작업 후에 바치는 감사 기도는 작업 후에 즉시 바치는 성무일도의 의미와 어설프게 구별된다. 어찌 말하면, 감사 기도는 십자성호를 긋는다던가, “천주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54,5). 여행하는 사람은 나쁜 생각이 들 때에(15,53-54) 언제나 기도하였으나, 그 기도는 “Oratio”라고 부를 수 없었으며 우연적인 성질이 있었다. RB 52,3-4에서는 기도소(Oratory)에서 개인으로 기도하는데 관하여 언급하면서도 언제 그런 기도를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18) RM 51-52장.
19) RB 49,4-5. 이러한 계획은 특히 모호하다.
20) 이태리에서 결코 실천된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까시아노의 표현에 따르면(Inst.2-3) 동방이 아니라 단지 이집트에만 있었다.
21) RM 53,64-65.
22) 까시아노의 Instit.4,12: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육체적 노동에서 꼭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독서할 때에 지켜야 할 일인 것 같다.
23) RM 54,1-2. 비교: RB서 43,1-3.
24) RB 48,12(겨울철 9시경과 6시경을 공동으로 바친 것이 있나?)
25) RM 14,1.20 등.
26) RM 14,3-19.
27) RM 33,46-47. 비교: RM 55,5-8.
28) 까시아노, 제도서 2:10,2-3 (Cassian, Institute), 까시아노 Conl. 9,36. 간결해야 된다는 이와 같은 충고는 특히 엎드려서 하는 기도에서 지켜야 할 것이었다(제도서 2;7). 까시아노의 말을 빌리면 엎드리기 전과 후에 일어서서 있는 이 동안의 길이(시간)를 가리킨다.
29) RB 20,3(비교 52,4). RM 3,63 = RB 4,57 까시아노, Conl. 9,27-30 비교
30) 까시아노, 제도서 2; 10,1 무의식적인 신음 소리는 열절한 마음에서 치솟아 나오는 것으로 부주의해서 나오는 한숨이나 신음 소리와 다르다.
31) RM 48,12 - 까시아노에 따르면(제도서 2; 7,2) 서서 기도하는 동안에 양팔을 벌렸다.
32) 까시아노, 제도서 2, 10,1; praecipue cum consummatur oratio. 사제에 의한 끝맺는 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집트인의 집중력은 엎드려서 기도하는 동안 그것을 휴식 시간으로 삼는 몇몇 Gauls의 무성의함과는 서로 대조된다.(제도서; 7,3)
33) 현대의 수도자 기도서는 후렴들이 많이 있으며 이 모두는 가장 오래된 후렴들에 소급된다.
34) 체사리우스 76,1 later (77,6). 체사리우스는 다른 규정을 찾았다. “시편을 노래하거나 기도하라, 기도함으로써 너희는 죄 사함을 받을 것이며, 그리고 시편을 노래함으로서 너희는 영신적인 기쁨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기도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다. (비교: 1고린 14,15).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인” 표현은 전례와 동조할 수 없다. 슬픔(침묵 기도)은 기쁨(시편 찬송)으로 완성 된다 (비교: 야고 5,13-14). 둘째 규정은 한편 인공적인 것이, 적어도 시편 찬송의 기쁨을 가리키는 장점을 가린다(주 81 보라). 그리고 침묵 기도의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고대로부터 표현된 것을 보면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었다.(도 - 72,3-4와 gem 77,2-3), RM 3,63(RB 4,57) 48,2 등등.
35) 체사리우스는 실제로 묵상 전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아마도 나의 분석은 너무 날카롭게 이 두 행위를 구별하였다. 실상 사람은 기도하면서 묵상한다.
36) 로마 성무일도에서 성주간의 성삼일 시편은 영광송이 따르지 않는다. 이는 5세기에 있었던 로마가 사용하였던 성무일도의 자취이다.
37) RM 33,43-46. 비교; RB 17,2.
38) RM 46,9. 비교; RB 9,6-7; 11,3. 베네딕도께서는 단지 마지막 응송 끝에서만 영광송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39) RM 33,46-47. 비교; RB 9,2 (18,1). 영광송은 또한 시간경 시작하는 호칭경 후에도 외웠다.
40) RM 33,46-47 (55,4-6). 비교; RB 9,7; 11,3.
41) RM 47,6 선창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이들이 서서 외웠다.
42) RB 47,3(비교 38,12). 43) RB 47,4(비교 RM 47,1.6.14).
44) RB 19,1-2.(스승에는 이와 같은 것 없다).
45) 고대 가장 중요한 시편 찬송의 개념 중에 하나는 기도를 다른 것과 구별하지 않고 시편 책의 순서대로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고집 하는데 있다. 어떤 시편을 크리스천 기도에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서 성무일도에서 삭제한다면 이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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