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꿈에도 소원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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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10 ㅣ No.596

[허영엽 신부의 ‘나눔’] 꿈에도 소원은 통일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가 며칠씩 묵고 오곤 했습니다. 외할아버지 댁은 기와지붕의 한옥 집이었는데 무더운 날에도 대청마루에 앉아있으면 선풍기처럼 시원한 바람이 어디선가 살살 불어왔습니다. 대청마루에 누워 책도 보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잠이 솔솔 오곤 했습니다. 스르륵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찐 감자며 찐 옥수수가 소쿠리에 한가득 담겨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출출함을 느낄 때쯤 먹는 간식은 꿀맛이었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조금 식었을 즈음, 마당 한쪽에 있는 잘 익은 토마토를 하나 따서 우물물에 대충 씻고 한입 베어물면 향긋한 내음이 온 몸 가득 들어와 기분이 참 좋아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는 며칠 동안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에서 깨었다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 외할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잠결에 ‘이 더운 여름에 왜 이불을 쓰고 계실까’를 생각하면서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외할아버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는데 나중엔 통곡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모른척하고 그저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전쟁 때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그날 밤 외할아버지를 울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서야 그날 밤에는 알지 못했던 외할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8월26일 작별상봉을 끝으로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만남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기약 없는 긴 이별에 들어갔습니다. 2년 10개월 만에 열린 이번 상봉행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산가족의 고령화로 부자·부녀간 상봉이 눈에 띄게 줄어든 점입니다. 만남이 가장 절실했던 실향민 1세대는 이미 사망했거나 거동이 불편한 고령이 대부분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산가족의 아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진정 우리 자신의 일

 

8월26일 오후, 북측 가족을 실은 버스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를 떠났습니다. 상봉가족들은 만날 때 기뻐서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 다시 찾아온 생이별 앞에선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북측 가족들이 올라탄 버스 창문 밖으로 할머니 한분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남측 동생 할머니가 그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습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자매의 손이 떨어졌고 남측 할머니는 “우리 언니”를 외치며 버스를 쫓아갔지만, 이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손을 흔들며 따라가던 남측 가족은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울면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언제 다시 만나나. 조국 통일돼야 만나나. 잘 있으라. 느그들 잘 있어라.”, “오빠 아프지 마, 아프지 말고 잘 있어야 해.”

안부 인사들이 메아리가 되어 허공을 맴돕니다. 그 누구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드라마가 이보다 더 슬플 수 있을까요? 잠시일거라 믿고 피난을 떠나면서 작은집에 맡긴 열 살의 딸이 이제는 칠순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젠 늙어버린 어머니 앞에서 “엄마, 왜 이제 오셨어요…” 하는 울부짖음에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떨어져 있었던 그 오랜 세월, 피맺힌 한의 절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제 와서 설명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 어떤 단어도 이별보다, 그것도 기약 없는 이별보다 더 아픈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는 가족들을 보며 뜨거운 감격과 눈물이 솟구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진정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우리의 어르신들은 배고픔과 헐벗음, 인간의 기본적인 삶조차 결핍된 시대를 다 헤치며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상상도 못할 죽음과 고통, 공포의 늪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오신 그분들의 고통을 어찌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역사가 남긴 이 고통과 한의 흔적은 우리의 피와 살 속에 어떤 형태로든 녹아 흐르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삶은 주위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

 

우리는 이 아픈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산가족 등의 사회적 문제를 두고 우리는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고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홀로 존재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또한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나라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치유해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지척에서 굶주리고 있을 이들을 기억해야하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순간에도 뼈가 녹아나는 고통에 찌든 이들이 한반도에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주위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많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0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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