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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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들의 두 사부: 성 베네딕토와 달마대사에 관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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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6 ㅣ No.407

수도승들의 두 사부 - 성 베네딕도와 달마대사에 관한 비교


선불교의 시조인 달마(Bodhidarma)는 480년에 태어나 543년에 입적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470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534년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 정확한 연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이태리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와 동시대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두 분은 같은 시대에 살았을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승려생활 전승 속에서 아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달마대사는 인도 출신으로서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마무리 했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불교의 여러 종파가 중국에 소개 되었지만 선(禪)종이 이야말로 극동에 걸맞은 불교의 형태가 되었다. 동사에 유라시아(Eurasien) 대륙의 저쪽 끝에는 베네딕도가 마르띠노 성인과 가시아노와 많은 다른 분들의 노력을 마치면서 근동 지방에서 유래한 그리스도교 승려생활의 서구적 전형을 조성했다. 이때부터 양쪽 영성이 번성하여 타지방에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두 전승의 연속성도 지대한 것이다. 역사의 파란곡절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그 시조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다.

1500년 동안 베네딕도의 수도승 전승과 선종의 전승이 서로 모르고 지냈었다. 그래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서로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매우 흥미 있는 상봉의 전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봉이 양쪽 수도승 전승의 결정적인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으니 둘 다 처해 있는 이 상황도 공통된 요소이다. 이 상황이란 기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모든 수도승들이 자기 생활양식의 뜻을 새로 찾아야 하는 설정이다.

이 작업을 해내기 위하여 수도승들은 우선 시조들의 카리스마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다른 기준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중에는 여러 종교의 신봉자들이 절대를 추구할 때에 따르던 이상들이 특별이 중요하다. 현대 세계의 가장 깊은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이 우리 전승과 아주 다르면서도 여러모로 유사하기도 한 다른 수도승 전승의 동료들과 접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필자는 여기서 선(禪)과의 구체적인 만남을 기술하고자 한다. 선승과 베네딕도회의 현재 생활을 비교할 작정인데 양쪽 수도승들은 자기 시조의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1. 유사점

1) 생활조건


내가 처음 선종의 사찰에 갔을 때 즉시 그 환경에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내가 20여 년간 베네딕도 회원으로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먼 지방의 다른 수도승들이 다른 재료로 만들어 낸 환경이었지만 나는 여기에 쉽게 어울릴 수 있었고 같은 정신 즉 경외심과 절제와 조화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수도원을 세우려고 할 때 환경과 생활양식의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선 그 외적 생활조건을 기술하고 서로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의 모든 물건을 신중히 다루는 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수도원의 모든 그릇과 전 재산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럼 생각하라”(규칙서 31,10)고 했다. 피조물에 대한 이 존경심의 태도는 규칙 전체와 수도원의 생활양식의 바탕에 속한 것이다. 같은 태도를 우리는 선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찰의 건물과 물건을 모두 평범한 재료로 되어 있지만 그 품질은 매우 좋은 것이며 승려들은 그것을 큰 정성으로 가꾼다. 그래서 모든 물건이 창연한 고색을 띠게 된다. 승려들은 모든 것을 - 나무, 돌, 옹기, 정원, 음식 등 - 신중하게 다룬다.

하루는 내가 걸레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을 본 한 승려는 그 걸레를 빼앗아 내가 보는 앞에서 지극히 정성스럽게 그것을 접어두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내 마음 전부를 그 안에 두라고 손짓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기억했다: 한 수련생이 스승에게 “우주와 조화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어 볼 때 스승은 “내 걸레와 조화하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불교의 다른 종파의 승려들은 흔히 신자들의 희사금으로만 살지만 선승들은 베네딕도회원들처럼 “매일 하는 노동”(규칙서 48 참조)으로 적어도 생계의 일부를 유지한다. 중국의 대사(大師)들이 인도에서 들어 온 승려생활에다 인생의 이 기본요구를 도입했다. 그들은 육체노동이 자기 자신을 알게 해 주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때때로 수지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선종의 사찰에서 승려들은 열렬히 일을 한다. 노동으로 그들은 정신적 작업의 심도를 가늠한다. 선가에는 작업시간에 깨달음에 이르는 승려에 대한 얘기들이 많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처럼 선가의 생활에서도 의식이 많다: 걸어가는 방식, 경을 외우는 법, 인사하는 것, 식사하는 것, 공동으로 목욕하는 것, 잠자리에 드는 것, 생활의 모든 순간에 규정된 동작이 동반된다. 특히 결제(참선을 집중적으로 하는 시기)기간에 이 엄숙하고 힘찬 생활양식은 영적 생활의 심화에 큰 도움이 되는 분위기를 마련해 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술이 번성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선가에서는 훈련기간 동안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영적 기술은 자연히 예술 활동을 꽃피게 한다. 유럽에서처럼 일본에서도 수도원의 미술은 따로 도입하는 사치가 아니라 생활한 가운데서 저절로 비치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순종으로써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면 모든 외적인 요소도 그런 정신을 반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 수도생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외적 조건을 훑어봄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미 수도승들의 특징을 이룬 지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그들은 혼란과 허무와 묵은 세상을 초월하여 ‘피안’에서 새로운 것을 건설함으로써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문화와 인도주의가 지배하는 새 세상의 윤곽을 그려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2) 광야를 통과함

일본 선불교 사찰의 환경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석정’(石庭)이다. 반듯하게 빗질한 하얀 모래 바다에서 새로 솟아나오는 바위로 만들어진 이 정원들은 선 자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승려가 통과해야 할 광야인 것 같다. 사실 불교의 승가는 숲속에서 생긴 것으로 광야를 체험한 역사가 없다. 그렇지만 원형(archetype)의 수준에서 볼 때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광야의 수도교부들이 에집트의 지리적 광야에서 걷던 신앙의 길과 불교의 수도생활은 공통된 점이 많다. 둔세, 금식, 독신, 외마디 기도 방법, 물질의 결핍, 명상시에 요구되는 영육의 부동성 같은 것은 외부인의 눈에 이상하고 모순된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단지 극기나 악한 것으로 판단되는 본성과 싸우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물론 서양의 어떤 영성학파에서와 요가의 어떤 학파에서는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위의 수행방법의 참 뜻은 시토회의 다음과 같은 격언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 서 있어라, 그만 두지 말라, 씨뿌린 뒤에 수확이 온다.” 선가에도 비슷한 격언이 있다: “그저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봄이 올 것이며 풀이 자랄 것이다.”

이 일의 목적은 관능과 정신과 의지를 비우는 것이다. 승려들은 완전히 비운 상태로 외부의 도움 없이 그저 있기만 하면 우리 마음이 믿음에 더 쉽게 응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눈먼 사람이 자기 불구를 보상하기위하여 청력과 나머지 관능을 발전시켜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기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직접 촉진할 수는 없지만 좋은 스승의 지도 아래 내적 성장에 대한 용의를 유지하는 것이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특히 한계 체험이 여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체험은 마음을 “만질 수 있는 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사랑이 자라는 마당이다. 여기서 사랑은 지나가버리는 시간에 대한 아픈 체험을 고요히 참으면서 인내로 변신하여 성숙해 질수 있다.

그런데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옛날부터 어떤 사람들이 더 초조해서 그런지 절대를 특별히 강하게 갈망해서 그와 같은 기회를 일부러 마련하는 뜻으로 한계의 체험과 밤의 체험을 고의로 초래하거나 강화하려고 했다. 수행의 이와 같은 기능으로 볼 때에는 독신이나 명상이나 순종과 같은 서로 상당히 다른 요소들은 비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실천하는 정신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베네딕도회에서 “좋은 열정”(RB 72)을 요구하며 선가에서는 그것을 “불과 같은 열성”이라고 한다. 믿음에 뛰어 들어가기에는 반드시 큰 비약이 필요하다.

수도생활의 양쪽 시조는 광야의 아픔을 체험했다. 베네딕도는 삼 년간 “하느님 눈 아래 혼자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았다”(전기 3장). 이 말은 수비아꼬 동굴 입구에서 읽은 일본 선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참선의 정신적 체험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다. 달마대사도 여러 해동안 숭산(崇山)에서 벽을 향해서 참선에 골몰했다. 그는 이와 같은 불교의 중심, 곧 서양 사람들에게 말하는 스즈키(Suzuki) 박사에 의하면 고요함과 공(空)내지 “신다운 가난”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중심에 접근하려고 했던 것이다. 베네딕도는 고독 속에 보낸 기간 다음에 순종과 겸손과 형제적 공동생활의 길을 택했다. 그는 개인의 이기적인 판단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를 더 큰 뜻 즉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 위하여 그 보다 더 좋은 길이 없다는 것을 제자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오랜 명상을 권했던 광야의 어떤 교부들과는 달리 “내적 기도는 짧고 결백해야 한다”(RB 20,4)고 가르쳤다.

그와 비교하여 선가에서는 명상을 더 크게 강조했다. 禪이라는 말은 인도의 Dyana를 중국어로 표기한 것이다. 중국어 발음은 ‘찬’인데 그 뜻은 명상 즉 전실재(全實在)를 의식함으로써 인간이 내적으로 하나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찰에서는 경을 외우는 시간은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지만 매일 참선 시간은 세 시간 이상 걸리고 매 달 마지막 주간에 가지는 섭심(攝心)기간에는 적어도 10시간이 걸린다. 좌선의 절대적이고 잠잠한 부동성(눈은 뜨고 있지만)은 모든 형편 속에 초연한 태도를 얻어주는 방편이 될 뿐만 아니라 공포 없이 인생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된다. 이때에 구도자는 안전을 찾고, 남을 지배하려는 우리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소로 줄인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의 가장 깊은데서 세상 안의 우리의 실존, 보잘것없으면서 오묘한 우리 인생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위와 같은 자세는 좌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양 사람들은 흔히 선(禪)을 과선과 동일시 하지만 선은 생활 전체를 포함한다. 선종의 육조(六朝) 혜능(713년 사망)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선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부엌을 위한 장작을 패다가 “모든 것을 놓고 마음의 복판으로부터 살라”(다른 번역에 의하면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 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의 구절을 들을 때 갑자기 성불했다고 한다.

3) 여정의 목표

또 하나의 주제를 들고 동서의 수도승 전승을 비교하자. 여러 나라와 종교에서 발생한 이 생활양식의 외적 여건과 수행방법을 훑어보고서 이제는 수도승들이 시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다시 말하면 수도생활의 시조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을 형성시키려고 했는지 물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베네딕도의 규칙서에는 그런 목표에 대한 말이 많지 않으나 그 의도는 명백하다. 규칙서 목적은 우선 “선행의 도구”와 이 도구를 사용하는 ‘공장’(4장)만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여 진 당신 일꾼 안에서 주께서 성신을 통하여 보이실”(7,70) 은혜도 이리저리 엿보인다. 겸손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수도승은 곧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제 이전에 두려움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 어려움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게 될 것이다. 즉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지키게 될 것이다”(7,67-69). 수도승은 “깨어 있는” 사람,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열린 귀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 마음에 평화를 지닌, 내적으로 치유된 진실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의 길을 달린다”(머리말 참조).

위와 같이 베네딕도는 그 당시 이미 250년의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교 수도승의 이상을 그려준다. 가시아노의 말에 의하면 수도승의 모든 노고는 깨끗한 마음, 유일한 사랑밖에 모르는 일치된 마음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 시대에 “모나코스”(‘수도승’의 희랍어)라는 어의를 “일치”(희랍어의 모노스는 하나라는 뜻임)와 관련시켜 설명하는 이도 있었다. 광야 수도교부들의 많은 일화 가운데 우리는 참으로 고요하고 순박한 그 사람들, 남의 눈에 띄지 않던 그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성덕이 그들에게 제 이의 천성이 되어서 그들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은 왼 손이 모른다”(마태 6,3)는 말처럼 자기 자신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성 안또니오가 제자에게 말한 것처럼 “네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네 기도는 아직 완전한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도승은 시편의 작가와 함께 “나는 기도니라”(시편 109,4-마소라 원문)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수도승들은 내적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모든 타인과 하나가 되며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다”(디도 1,15)는 말처럼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사귀고 맹수와도 평화롭게 지낸다. 이런 상태는 그들이 “순종과 겸손의 노고로 불순종의 나태로 멀어졌던 분에게로 되돌아” 가기 때문에(머리말 참조)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도승들의 기본적인 “유토피아”(이상적인 목적지)는 낙원에로의 되돌아감, 또는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의 발견이다.

토마스 머튼과 스즈키 다이세즈(S. Daisets)가 그리스도교 수도승과 선승의 첫 번의 의도적인 만남에 임했을 때 그들은 “낙원의 무죄함으로 되돌아감”을 대화의 주제로 택했었다. 토마스 머튼의 말에 따라 “선가에서 진여(眞如=tathata)라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깨끗한 마음이나 완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공(空 = 비움)과 무죄함을 근거로 해서 행동할 때에 수도승들은 … 문제제기와 해결책을 초월하여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럴 때에 그들은 많은 선종의 이야기들이 옛 이집트의 수도승들의 이야기(‘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참조)와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은 그것은 이런 종류의 가난과 고독과 공(空)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이다.”

참선이 낼 수 있는 열매를 간단히 예증하기 위하여 현대에 기록된 한 가지 체험담만을 인용할테니 그것은 이와사끼 야에꼬라는 일본 처녀의 글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사끼 양은 하라다 소가꾸 큰스님(일어는: roshi=老師)의 지도 아래 참선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을 앓았기 때문에 주로 누워서 참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한 열정으로 전진해서 25세의 나이로 깊이 깨달았고 만물의 한없는 단순성을 알게 되었다.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자기 체험을 기록한 마지막 편지들을 스승이 발견했다. 이 처녀는 입산하여 정식 승려의 길을 걷지 못했지만 그는 선승이 추구하는 목표에 이르렀다. 그는 죽음을 며칠 앞둔 1935년 12월 25일자로 다음과 같이 썼다: “…마음속 깊이 대사님께 감사드리면서 합장합니다 … 저는 태어나기 이전의 제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빈손으로 저의 참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 저의 세상은 완전히 전도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참선의 결과, 끝없는 투신의 결과입니다. 저는 이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끝없는 일에 착수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빛, 순수한 빛입니다. 이제 저는 제 일상생활과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저는 대사님처럼 그리고 만사처럼 영원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대로(大路)한 가운데 나섰습니다. 모든 것이 긴장 없이 자연스럽고 압력도 정지도 없는 대로에 … 감기 조심하십시오 …”

한 개인의 체험을 담은 이런 보고가 우리에게 감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갈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라다 선사는 이와사끼의 편지들을 설명하고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야에꼬의 씩씩한 생애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틀림없이 불교의 전파와 온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 사실 이와사끼의 체험은 전형적인 불교 체험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 상이점을 감추어서 신조를 초월하는 종교체험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추상적인 생각은 불교에도 그리스도교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양쪽 종교가 각자의 전통에 충실해야 번성하고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간의 상이점이 많더라도 크게 유사한 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바로 그 유사점을 정확히 규명하는 노력이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핵심 문제는 영적 체험의 인간학적인 자리를 찾아내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 비치는 거울로 이해하는 것이다. 1979년 9월 26일 비그리스도교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선사인 야마다 무몬 큰 스님은 신도와 불교와 그리스도교 등 여러 종교에서 거울의 상징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인 이 거울을 더욱 깨끗하게 닦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그 안에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2. 상이점

각 전승에서는 수도생활의 이상 가운데 어떤 요소를 강조하고 어떤 요소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그 요소들이 상호간에 가지게 되는 조화의 형태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동서 전승 간에 생기는 상이점의 연구는 매우 유익하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전승에 잠복하는 가능성들이 다른 전승에서 발전하여 그 수도승 생활양식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국면이 다른 국면보다 우세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으로 창설자의 기본 의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아래와 같이 선원에서 지냈을 때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간단히 지적해 보겠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솔직하고 선입견 없이 서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진저한 대화의 토대가 될 것이다.

1) 형제냐 동지냐?

첫 눈에 일본 선종 사찰의 외모는 그리스도교 수도승에게 퍽 매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 들어가게 될 때는 그 인상이 많이 달라진다. 우선 거기에는 우리 베네딕도회에서 생각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셈이다.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의 목표가 모든 중생을 위한 봉사와 구원이다. 그러나 일본 선원의 생활양식은 우리를 당황케 할 만하다. 승려들은 아주 좁은 공간에서 함께 산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서 좌선하고 잠자며 어떤 때는 식사도 하면서 각자는 자기 다다미 만큼의 자리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깊은 연대성이 없는 것 같다. 식사 후 한 시간의 휴식을 빼놓고는 그들은 계속 함께 지내면서 각각 혼자 사는 것 같다. 예외는 있어도 결제 기간에 함께 고통을 받는 대부분 승려들의 냉정하고 딱딱한 표정은 좀 무서운 것이다. 일본 선승들의 유명한 열성은 참선과 경행과 작업에 관한 열성이지 타인을 위한 친절에 관한 열성은 아니다. 수도자들이 서로 다투어서 존경함으로써(RB 72장) 나타내는 “좋은 열정”을 경험해 온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저런 냉정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하루는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걸레를 취급하는 법을 설명한 승려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는 규칙에 대한 나의 실수를 자주 불친절하게 꾸짖었다): “여보시오, 당신 걸레를 그렇게 다정하게 취급하면서 당신 마음을 한 번 동료 안에 두어 볼 수는 없을까?”

틀림없이 선은 아주 개인주의 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젊은 승려들 중에 “자력”(自力)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 타인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사람이 있다. 절에서도 그런 태도를 지나친 것으로 보지만 그 태도를 꾸짖는 일을 보지 못했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나에게 어떤 노승이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일에 제 시간이 있다. 먼저 승려들의 개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서 죽는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자아도 먼저 혼자 죽어야만 우리가 모든 이를 위하여 새로 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친절하게 대한다며 그것은 필요 없는 정을 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친절을 베풀면 그 상대가 고독의 고통을 덜 느끼게 될 수 있는데 우리는 고독의 결정적인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니 조만간에 겪어야 할 고독의 경험을 미루면 좋지 않다. 오히려 좋은 여건 아래 고독을 겪는 것이 낫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투쟁하러 서로 뭉치되 ‘사무라이’ 식으로 싸운다. 본래의 단순함을 되찾은 다음에야 타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는데 그것은 이기주의와 주의주의(主意主義)를 벗어난 진정한 관심이다.”

과연 그런 것을 좌우간 이것이 불교와 그리스도교 승려생활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 공동생활 모두가 처음부터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를 모방하고 있다. “그들은 한 마음이었다 …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가졌다”(사도 4,32). 이것은 그저 하나의 원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깊은 확신, 그리스도가 형제 각자 안에 현존한다는 확신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수도원에는 이웃 사랑이 언제나 핵심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수련기부터 그런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가치이니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제쳐 놓을 수는 없다. 가장 정적한 수도원에서도 옆의 사람에게 잠깐 눈을 돌리면 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정일지 모르지만 …

손님 환대에도 이와 같은 차이를 볼 수 있다. 베네딕도는 손님들을 먼저 경당에 안내하여 같이 기도하고 하느님의 법을 읽어 줌으로써 손님들에게 감화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 뒤에 그들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고 시사한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서 실제 영접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때문이다(RB 53,7). 3주간 베네딕도 수도원들에서 지낸 일본 승려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여러분의 수도원에서 받은 은혜를 우리 절에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상한 손님 접대를 모릅니다.”

2) 아버지냐 스승이냐?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양쪽 수도승 전승안의 장상의 기능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장상을 제정하는 법부터가 차이가 난다. 베네딕도회의 아빠스는 공동체에서 선출된다. 이것을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베네딕도의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공동체안에 머물뿐 아니라 “하느님이 연소한 사람에게 상책을 밝히는 일이 자주” 있다(RB 3,3). 아빠스는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스승, 영적 지도자, 규율과 형제간의 화목에 대한 책임자, 수도원 재산의 관리자이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질을 생각해서 그를 뽑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의 능력들은 서로 중화시키게 되지만, 최선의 경우에는 그는 서로 다른 역할에 요구되는 능력에 의하여 베네딕도가 생각하는 분별을 지님으로써 참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된다.

다른 한편에서 베네딕도는 아빠스의 중재역할을 강조한다. 수도자들은 아빠스 안에 그리스도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아빠스의 권위는 우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의 사명은 그를 뽑은 공동체에 기인한 것이며 그의 권한은 그가 대리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권위는 카리스마적이라기보다 제도적이며 성직(聖職)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의 지도자인 큰스님들(老師)의 권위는 오직 그 자신에게 기인한다. 따라서 ‘노사’와 제자의 관계는 베네딕도회 그것과 전혀 다르다.

큰스님은 자기 절의 규율과 화목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선방과 좀 떨어진 곳에서 흡사 손님처럼 산다. 공동행사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참여한다. 그 밖에 그는 서예와 꽃꽂이로 시간을 보내고 손님을 많이 접대한다. 그래서 절의 일상생활은 그분이 없어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분이 없다면 그 생활은 뜻이 없다. 그것은 여왕벌이 없는 벌집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큰스님이 없는 사찰은 모순투성이의 막사로 변해 버린다. 수행의 고생을 해탈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분 혼자뿐이다.

큰스님의 일은 미술가의 일에 비교할 수 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적어도 15년 이상) 큰 스님의 지도아래 고된 수행을 하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스승은 그의 정진을 인정하여 그를 후임으로 삼기로 했다. 이와 같은 법의 계승은 아득한 옛날부터 계속되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선사마다 달마대사까지 올라가는 족보를 지니고 있다. 사실상 이 법맥은 석가모니까지 거슬러 올라간 까닭에 전설에 의하면 달마는 이미 석가모니의 후계자 가운데 28조(祖)로 간주된다. 선불교의 문학은 주로 법을 전하는 일 즉 제자에게 얼을 남기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선의 일화들은 대체로 스승이 제자의 깨침을 온갖 방법으로 가능케 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선문학은 정신적인 산파술에 대한 것으로써 깨달음의 불꽃이 스승에게서 제자로 옮아가는 순간, 정신적인 원기를 똑똑히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을 묘사하는 문학이다.

승려들은 매일 스승과 잠시의 면담을 가진다. 이 때에는 마음 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금물이며 오직 구체적인 일들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큰스님은 제자의 거동이나 표정을 관찰하여 그가 얼마나 정진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카리스마는 바로 이 밝은 안목이다. 이런 사람 앞에 적나라하게 서서 그가 나를 즉시 꿰뚫어 보고 있음으로 그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서운 경험이다. 이와 같이 스승은 제자의 여정을 계속 동반하여 가끔 그가 다음 단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개입한다. 그리고 끝으로는 제자가 다시 스승으로부터의 독립을 얻을 수 있도록 그를 도와준다.

달마대사가 이런 방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경전 밖에 따로 전하여 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성(自性)을 보고 부처를 이룰지니라.”

선사는 이론이 없다. 그는 이성도 정서도 겨누지 않고 직접 인간의 핵심을 대하면서 실험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오늘날 더 깊은 영적 생활을 하는 서양인에게 동양의 전승들이 큰 매력을 준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런 ‘구루’(인도말로 ‘지도자’ 내지 노사(老師)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지도자들은 비행기를 타고 산을 넘거나 등산에 대한 책만 본 사람이 아니라 친히 산을 올라 험한 구간을 모두 잘 아는 사람과 같다. 서양의 전통은 권위자의 신분을 따르는 은총과 더불어 제자의 신앙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 스승이 지녀야 할 자질을 소홀히 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전통과의 상봉은 권위와 순종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재검토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3) 정주냐? 떠돌이 삶이냐?

그리스도교와 불교(일본의) 수도생활의 많은 차이점은 수도생활의 연속성과 관련된다.

베네딕도는 한 군데 집단수도생활에서 독수도생활로 넘어갈 수 있다고 암시하지만 그 외에는 종신서원을 의미하는 영구적인 구속, ‘죽을 때까지 수도원 안에 머무는 것’ (머리말)밖에 모른다. “불행하게도 수도자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 수도원에서 다시 나가려고 하는 경우 수도원의 옷을 벗기고 내보내도록 할 것이다”(RB 58,28). 다시 말하면 수도원을 다시 떠날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쫓겨날 수만 있을 뿐이다.

그와 달리 선승이 다 년간의 훈련을 받은 뒤“세속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찰을 떠날 때 모든 동료들이 대문 앞에 나란히 서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이 분야에는 각 수도전통이 실제로 다르다.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은 종신토록 서원을 바친다. 힌두교 경우에 숲속의 은둔생활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이다. 불교의 경우에 수도원 안에 사는 것은 오히려 첫째 단계인 것 같다.

일본에도 일생동안 수도원 안에 머무는 승려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수도원에 몇 년 살다가 주지로 절을 맡아서 사목을 한다. 그러나 그들도 매년 며칠씩 자기 수도원에 돌아와 섭심(=피정)에 참석하고 그리고 특히 자기 ‘노사’(은사)를 만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몇 년 밖에 안 되는 수련 동안에 그들이 상당한 절박감을 느낀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련자는 짧은 시간 안에 새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들은 온갖 방법을 쓴다. 그들이 정진에 결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은 반야심경 끝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우리가 주의 기도문을 하는 것처럼) 매일 몇 번씩 외우는 반야심경 끝에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건너가라, 건너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온전히 정진에 몰두하겠다는 승려의 결단을 보여준다. 정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뜻으로 그들은 기후의 험악함을 막을 수 있는 갖가지 편리를 포기하고 위에서 말한 대로 정서적인 모든 뒷받침을 배격할 뿐 아니라 경전을 배우는 것 밖에는 지성의 도움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들은 현재 각 순간 진하게 사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선의 뜻에 대한 질문을 받은 산꼬 대사(1361년 사망)는 “밟고 있는 곳을 보라”(照顧脚下 혹은 看脚下)고 대답했다고 한다. 선가는 타산을 모두 배척한다. 그는 내일에 대한 생각, 영구적인 구속을 모르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곳에서 결사적으로 살다간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과거와 연결시키는 모든 줄을 끊어 버리고 철저하게 투신한다.

수도승들이 죽을 때까지 머무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분위기는 그것과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분위기는 어디까지나 엄숙하고 모든 것이 좀 느릴 정도로 조용한 것이다. 그런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직접 복음에 기인한 것 같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보다 먼저 충성에 나타난다고 믿어 왔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정한 느낌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고통을 인내로이 감수하는 일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각자의 성장 과정을 고려하는 넓은 생활양식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양떼를 너무 빨리 몰지 말고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염두에 두라”(RB 64,18)고 아빠스에게 권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하나 하나에 대한 배려이다. 이 자상한 배려는 빠른 정진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길은 공동체적인 인격주의이며 이 길의 목표는 예수의 인격과의 만남이다.

수도승 양쪽 전통에서 정주 내지 영속성에 대하여 취하는 입장을 비교하면 두 전통의 바탕이 되는 판이한 세계관을 엿보게 된다.

고대에서부터 적어도 15세기의 문예부흥시대까지 서양의 사고방식은 고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고 변화하는 것들을 덜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수도승 전통에서도 방랑생활에 대한 성소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특히 베네딕도는 순회수도자(Gyrovagi: RB 1,10)들을 절대로 배척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나 성 베네딕도 라브르나 샤를르 드 푸꼬처럼 일정한 장소에 대한 구속 없이 살려고 했던 분들은 수도회 밖의 생활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의 수도승들은 이 점에 대하여 “머리를 둘 곳이 없는”(루가 9,58) 그리스도를 차라리 본받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까지 옛날의 중대성을 증명하는 고적들이 보여주듯이 정신생활과 문화의 중심지들이었던 놀라운 대수도원들을 만들었다.

그와 달리 불도들은 옛 부터 모든 사물의 무상을 강조해 왔다. 수도생활은 승려가 이 무상의 법에 어울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위대한 시인 빠쇼(1694년 사망)는 선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계속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여름이나 겨울에 온 일본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아무런 구속 없이 다니면서 “머리를 보호할 기와도, 몸 눕힐 땅덩어리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도 선승들이 얼마간의 시간을 수도원 안에 머무는 것은 오직 이탈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외계나 마음속의 모든 애착을 떼어 버리는 훈련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운수(雲水)라고 한다. 그들은 떠 있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아 그들의 생활도 구름과 물처럼 어디에도 붙어있지 않다.

그래서 일본의 현대 승려생활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이다. 현재 그들의 생활은 긴 역사의 종점이다. 그래서 이제 그 역사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자 한다. 그 역사를 보게 되면 세속에 사는 승려들의 생활 가운데 많은 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 불교는 순전히 수도원들의 종교였다. 그 때에 불교에는 평신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여자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승가가 개방되었다. 드디어 모든 종류의 신자들이 내면화된 승려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향은 대승불교에서 더 강해지고 불교가 중국에 진출할 때에 더욱 발달했다. 선불교에서는 외면상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평복의 승려가 하나의 이상이 되었다. “그는 귀가하기 전에 시장에 가서 생선 장수와 얘기하고 술집에 들르지만 그를 보는 사람마다 그 깨달음의 감화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13세기에 일본인 신란(親鸞, 1662년 사망)선사는 범위를 더욱 넓혀 죄인의 형편이 거룩한 승려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죄인은 모든 오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구제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찰들은 계속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일본의 승려들의 생활은 하나의 항의 운동으로 변했다. 사찰에서 승려들이 하는 생활은 아직도 존경을 받으며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본적으로 상대화 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여러 기회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일년 중 큰 축제에 속한 달마대사의 축일에 다음과 같은 일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날 법당에는 달마대사가 굉장히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상화들이 여러 폭 걸려 있었고 경을 외우는 시간도 보통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나 이 날 행사에 승려들은 동네 아이들을 모두 초대했다. 전설에 의하면 달마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좋아했고 오늘날 일본에는 달마의 가장 흔한 상은 오뚝이이다. 오랜 예불과 어린이들을 위한 푸짐한 저녁식사 끝에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승려들과 아이들 사이에 맹렬한 방석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승려들이 수 시간씩 앉아서 기도하고 수난을 겪는 이 유명한 “zabutong”들은 이제 유탄이 되어 달마 대사의 엄격한 눈초리 아래 온 법당에서 날라 다녔다. 그 결과로 방석 여섯 개가 결단이 나서 다음 날 아침에 사방에 뿌려진 솜을 거두느라고 승려들이 한참 애를 쓴 것이다. 내 생각에 이와 같은 사건들은 달마가 친히 말한 대로 “거룩한 것이라고는 없는” 선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전진의 방법들은 한편 중요하지만 한편은 아주 상대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선교(善巧) 즉 구원을 위한 임시변통 같은 것이며 우리의 해탈을 돕기 위하여 보살들이 궁리해 낸 거룩한 꾀들이다. “그들은 법을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수단에 너무 충실하면 그것이 “해방이 아니라 속박이 되기 쉽다.”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역사는 이와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는 승려가 아니라 방랑하는 랍비였다. 그리고 광야에 살면서 단식하는 세례자 요한과 달리 그리스도는 먹고 마시며 상놈들과 사귀었다. 그래도 3세기부터는 그리스도교 수도승 운동이 대두된다. 유대적이며 헬라적이라고 할 수 있을뿐 아니라 심지어 인도식의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는 이 수도승들은 처음부터 분명히 그리스도교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일반화되어서 틀에 박힌 형식이 되어 가던 그리스도교의 생활환경 속에 수도승들의 생활은 복음의 소금을 보존할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표지가 되었다. 그리고 초대 수도 교부들은 자기 자신들의 체제에 속지 않았다. 그들의 금언집을 보면 그들의 현실성에 대한 다음과 비슷한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집트의 가장 거룩한 사람에 대하여 주님께 물어 본 수도승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시에 구두장이 하나가 사는데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재산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재산을 소유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수도승들은 그런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실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완전하다고 주장하며 독신은 그 자체로 결혼생활보다 완전하다고 가르치는 데에 이르렀다. 이제 “세속을 떠나서” 사는 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 안에 사는 것(요한 17,14 참조)보다 더 공로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수도생활을 거룩한 생활로 인정하고 완덕의 신분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들은 “천사같은 생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것을 피안의 영원한 생활을 앞당겨 영위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양쪽 수도승 전통의 역사를 너무 간소화시켰지만 여기서 기본적인 차이가 잘 드러난다고 본다. 중세기 말까지는(일본의)불교의 수도생활과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거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극동의 사고방식을 따라 불교도들은 수도생활의 상대적이며 무상의 성질을 강조한 반면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은 점차적으로 그 생활의 변하지 않는 결정적인 가치들을 강조하는 데에 이르렀다. 베네딕도회의 전통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 이후로는 변화와 발전이 거의 없었다. 그 전통이 훌륭함을 누구나 인정하나 중세기 말 이후에는 베네딕도회가 수도생활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적다. 13세기부터는 변천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하여 교회는 다른 종류의 여러 수도회들을 배출하였다.

현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수도승 생활양식의 가치를 새로 발견한다. 이제는 사람들이 평신도의 영성을 더 이상 수도원 영성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수도승생활의 고유한 가치가 교회 안에 하나의 표지로 더 잘 부각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 위하여 물질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는 것이 이 표지가 제시하는 내용이라면 그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지만 수도승들의 사명은 더욱 구체적이며 예언적인 방식으로 그 내용을 실천함으로써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그리스도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도록 모두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비그리스도교 수도승 전통의 증거를 보고 이 표지에 너무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말고 그것을 누룩의 역할처럼 은근하게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새로 깨달아야 될 것 같다.

위의 몇 가지 점들과 마찬가지로 기도나 노동이나 손님환대의 양식도 서로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상술한바 실례로써도 양쪽 전통을 대조하는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고찰의 뜻은 학술적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끝으로 다시 말하지만 그런 대조를 해 본 결국의 목적은 수도승생활이 현대 세계 안에서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이바지 하려는 것이다. 수도승들이 어떻게 오늘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위기는 대대한 창의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베네딕도회의 오랜 전통을 생각해 볼 때 장래에 대한 불안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일의 수도생활을 형성시키기 위하여는 과거의 풍부한 전통만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전통에만 시선을 돌린다면 수도승의 너무 경직된 모상을 고수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복음에서는 우리 전통에서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자극들을 받을 수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과 불교 승려들의 상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서양의 옛 사고방식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나며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무엇이라고 훈계하는지 열린 귀로 듣는 데에”(RB 머리말)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코이노니아 제16집 112쪽, Pierr-Francois de Bethune, 진문도 토마스 옮김)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6 교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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