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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다산의 사천학(事天學)과 천주교 교리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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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9 ㅣ No.830

다산의 사천학(事天學)과 천주교 교리의 활용

 

 

1. 다산 사상에서 천주교의 문제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조선후기 사회를 살아가면서 변혁의 논리를 탐색하였으며 서학(西學)의 세계관을 끌어들이면서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정통이념이었던 도학-주자학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다산은 도학의 세계관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그 대응의 논리적 근거를 유교경전에서 확보하고자 하였다. 경전은 주자학의 이념이 기반하는 근거이기도 하므로, 경전해석에서 주자학의 논리와 자신의 논리를 대결시키면서 그 정당성과 진실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경전해석의 쟁점을 표출시키면서 다산은 경전을 해석하는 시선이 어떤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도학이 기반하고 있는 세계관으로서 이기(理氣)철학과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의 자연관을 경전의 본래의미와 선명하게 단절시킴으로써, 경전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다산의 경전해석은 바로 이 점에서 경학(經學)의 역사에서도 유교사상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정립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다산의 사상에서 천주교 교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엿보기 위해서는 다산의 경전해석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다산이 천주교 교리에 근거하여 유교경전을 해석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천주교 교리에서 끌어들인 빛으로 경전 속에 내재된 논리를 조명하여 발굴해 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산이 해석해 낸 경전의 세계관과 당시에 소개된 천주교 교리의 세계관 사이에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다산의 경전해석에 천주교 교리의 영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고, 동시에 다산이 천주교 교리의 세계관을 유교경전 해석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산의 사상이 천주교 교리와 어떤 범위에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먼저 다산과 천주교가 직접 연관된 활동의 범위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이해의 배경 아래서 다산의 경전해석을 중심으로 그가 새롭게 경전을 해석하는 세계관의 성격이 무엇인지 살펴본다면, 다산과 천주교의 거리와 연결고리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유교경전과 천주교 교리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궁극존재로서 ‘상제(上帝)-천주(天主)’의 개념에 대한 인식과 인간존재의 문제로서 ‘심성(心性)-영혼(靈魂)’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삼비아소(Sambiaso, 畢方濟)는 《영언여작》(靈言?勺, 1624)의 서문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을 인용하여, “철학은 전체가 두 가지 근본에 귀결하니, 그 하나는 영혼을 논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를 논하는 것이다. 영혼을 논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인식하게 하고, 천주를 논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근원을 인식하게 한다”1)라고 하여, ‘영혼’과 ‘천주’의 문제를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두 축임을 확인하였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대표적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도 천주와 영혼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산이 새롭게 구축하는 세계관 속에서 천주교 교리의 수용을 통한 유교경전의 재해석으로서 ‘천-상제’개념의 인격신적 인식에 눈을 뜨고, 여기서 나아가 인간이 ‘천-상제’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신앙적 태도의 문제로 확산해 가는 양상과, ‘심성-영혼’ 개념의 인식으로부터 인간관계의 규범과 인간의 사회적 신분질서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 확산되는 과정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다산과 천주교의 만남이 갖는 성격

 

1)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다산과 천주교 신앙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다산이 직접 신앙활동과 교리연구에 참여하였던 자취를 추적하는 문제와 다산의 저술에서 경전해석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점검하는 문제로 나누어 해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의 경전해석을 통해 서학의 수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과제라 생각된다. 다산의 경전해석을 비롯하여 어떤 저술에서도 서학의 문헌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경우는 거의 없다.

 

천주교 신앙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던 처지이니 사실상 천주교 교리서를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그의 경전해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어디까지 서학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유교경전에 내재된 논리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가 경전해석에서 천주교 교리서의 이론을 수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유교경전의 해석에 적용될 수 있는 천주교 교리서의 이론을 선택적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애초에 천주교 교리서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해석은 매우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수용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다산의 경전해석이 유교의 경학 전통에서 보면 특이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유교경전의 해석으로서 정합성을 지닌 창의적 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산의 경전해석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가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다산이 경전을 해석한 저술의 출발점은 태학생 시절인 23세 때(1784) 여름 정조임금의 70조목에 걸친 질문에 대한 답안으로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처음 작성할 때 그의 큰 형수의 동생이요 친우인 이벽(李檗)과 토론을 거쳤으니, 이벽의 견해도 상당히 수용되었다. 더구나 이 해는 다산 자신이 바로 그해 봄에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 천주교 교리서를 읽으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던 시기였다. 그만큼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고, 실제로 《중용강의》에서는 다산의 해석이 《천주실의》에서 제시된 천주교 교리서와 일치하는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다산의 천주교 신앙 활동과 성격

 

다산의 천주교 신앙 행적을 확인하는 것은 그 자신의 기록에서는 감추기 위해 축소시킨 측면이 있고, 다산을 비판하는 쪽의 기록에서는 공격을 위해 확대시킨 측면이 있으며, 천주교 교회사 쪽의 기록에서는 미화하기 위해 과장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만큼 기록된 사료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불확실함의 여지를 인정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다산의 행적은 ① 천주교 신앙에 처음 입교하여 신앙활동을 하던 시기, ② 천주교 신앙에서 이탈하는 과정, ③ 만년의 신앙생활 문제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다산이 처음 천주교 신앙에 입교하고 신앙생활에 깊이 빠져들었던 시기는 23세 때(1784)부터 30세 때(1791) 사이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다산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가 태학생이었던 23세 때 4월 고향 마현(馬峴)에서 큰형수(곧 李檗의 누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누님의 제사에 참석했던 이벽과 같은 배를 탔는데, 강을 따라 내려올 때 배 안에서 이벽이 천주교교리를 웅변으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다산과 그의 둘째 형은 천주교 신앙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산이 이벽으로부터 들었던 천주교 교리의 내용은 천주의 천지창조와 영혼 개념 및 사후세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적 호기심으로 넘치고 감수성이 예민한 20대 청년이었던 다산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끝없이 펼쳐진 우주 공간에 뛰어들 듯 새로운 우주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다산은 이때 《천주실의》 등 몇 권의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읽고는 천주교 신앙에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이무렵 다산은 천주교에 입교하여 바로 그해 봄에 북경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李承薰)에게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23세의 재기발랄한 청년 유학자인 다산이 일찍부터 축적해온 서양 과학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과 이때 새로 받아들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설명이 없이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한 전제로 우선 다산이 읽었던 천주교 교리서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유론(補儒論)’적 교리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예수회의 보유론적 교리서는 유교 지식인들이 지닌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을 크게 완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사유기반 위에서 천주교 교리를 매우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던 것이다. 다산은 유교와 충돌하는 후기의 천주교 교리가 아니라 유교와 조화를 이룬 예수회의 적응주의 교리서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천주교 신앙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1784년 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때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어 이벽을 스승으로 삼아 신앙집회가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1785) 봄에 명례방(明禮坊 : 현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열린 신앙집회가 형조(刑曹)에 적발되었을 때까지 다산도 이 신앙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의 신앙집회가 형조에 적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 신앙집회에 참가한 신서파(信西派)의 청년 지식인들은 먼저 가정에서 부형들로부터 엄중한 문책을 받으면서 이승훈도 척사문(斥邪文)을 지어 배교하였음을 밝혀야 했고, 이벽도 결국 신앙활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다산은 가정에서 문책을 받거나 배교를 선언하였던 일은 없었다.

 

천주교 신앙집회가 형조에 적발된 이후 다산은 유교 지식인들의 신앙활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1787년 겨울 이승훈 등과 반촌(泮村)의 민가에 모여 비밀리에 교리연구를 하다가 동료 태학생들에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일이 있다.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교리연구를 위한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 당시 다산의 천주교 신앙이 열정으로 충만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둘째, 다산이 천주교 신앙으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은 1791년 진산(珍山)의 천주교도 윤지충(尹持忠) 등이 부모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廢祭焚主) 사건(辛亥珍山事件)으로 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이 내려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도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것은 조선사회의 유교적 예교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의 천주교도는 이미 예수회의 보유론적 적응주의 원리를 폐기하고 유교체제에 맞서서 천주교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독단적 선교정책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진산사건의 중심인물인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으로 다산 형제의 영향 속에 천주교에 입교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윤지충은 예수회의 보유론적 교리서를 읽었겠지만 한번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는 당시 천주교 교회의 독단적 선교정책에 따른 교리서를 받아들였던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때 다산은 과연 천주교 교회의 입장이 바뀐 이후에도 조상제사를 인정하는 보유론적 교리를 고집하고 있었을지, 아니면 새로 제시된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독단적 교리를 받아들였을 것인지 의문이지만 분명한 자료나 증거가 없는 형편이다.

 

1794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전교하자,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이듬해(1795) 다산은 금정역(金井驛)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다산이 34세 때(1795)에 7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남짓 금정역 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이 지역의 토호(土豪)들을 불러다 국가의 천주교 금교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지내도록 타일렀고, 천주교 신앙에 빠져있던 이곳의 역리(驛吏)들을 깨우쳐 천주교도를 회유(誨諭)시킨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 무렵에도 이곳에서 가깝게 지내던 처사 이도명(李道溟)으로부터 그의 태도가 불분명한 점이 있다고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다산이 천주교를 배척하는 시기를 1795년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2)

 

또한 다산은 금정찰방 시절 당시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던 천주교도의 중요인물인 이존창(李存昌)을 체포하였던 일이 있다. 다산은 그해 12월 금정에서 서울로 돌아온 다음 충청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천주교도의 색출과 체포에 나서서 공적을 세워 출세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선비로서 지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한때 신봉했던 천주교에 대한 신의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라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 신앙에 빠졌던 일과 당시 천주교도의 중심인물들이 그와 인척관계나 친분관계로 깊이 얽혀있다는 사실에서 비방과 공격이 계속되자, 36세 때(1797) 스스로 자신의 배교입장을 해명하는 상소문으로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그 자신이 20대 초에 서학 서적을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빠져들었던 사실을 시인하고 벼슬길에 나온 뒤로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이 실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지만, 실제로 20대의 청년기에 심취하였던 천주교 신앙의 새로운 세계관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하루아침에 쉽게 지워지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셋째, 신유교옥(辛酉敎獄, 1801) 이후 유배시기와 해배(解配, 1818) 이후 만년에 다산의 천주교 신앙 여부는 전혀 상반된 자료가 충돌하고 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그 다음해(純祖 원년, 1801) 신유교옥이 일어나자, 이가환 · 권철신 · 이승훈 ·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등 신서파의 유학자들은 모두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는 증거를 확고하게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집단의 중심인물이 모두 그와 겹겹이 얽혀 있었으므로 풀려날 수가 없어, 그해 2월 죽음을 감면받고 경상도 장기(長?)로 유배되었고, 그해 9월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가 발각되고 황사영이 체포되자, 다산은 다시 의금부(義禁府)에 끌려와 국문을 받았지만, 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그해 12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40세부터 57세까지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다산에게 큰형(丁若鉉)의 사위인 황사영은 〈백서〉에 “이가환 · 정약용 · 이승훈 · 홍낙민 등 몇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 천주를 믿었으나 생명이 아까워서 배교한 사람들이라, 바깥으로는 비록 천주교를 혹독히 박해할지라도 마음에는 아직도 죽은 믿음이 남아 있었고, 같은 무리가 적어 세력은 외롭고 위태로웠다”라고 언급하였다. 황사영이 말하는 배교 이후에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죽은 신앙’이 다산을 비롯한 이른바 배교자들의 의식을 가장 근접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유교경전의 방대한 주석과 예학 및 경세론의 저술에 몰두하였으며, 천주교 신앙 활동을 하였던 자취를 찾기는 어렵다. 또한 57세 때(1818)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75세(1836)로 죽을 때까지도 고향에서 경세론과 경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의 저술이나 연관된 다른 기록들에서 그가 천주교 신앙을 회복하였다는 흔적을 발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나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박해 중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했었으나, 진실히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온 힘을 기울여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자기 죄를 속죄하기에 힘썼다”라고 하여,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음을 주장하고,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丁學淵)도 죽기 몇 해 전에 성세를 받았다고 하며, 다산이 유배에서 풀린 다음 여러 종교 저서를 남겼고 특히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데 대한 수기를 남겼다고 한다.3) 바로 이 수기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참고한 기본 문헌의 하나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라는 비망록이라 한다.4)

 

이와 더불어 달레는 다산이 해배후의 만년에도 신앙생활에 충실하였음을 지적하였다.이러한 기록들은 소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사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배시기 이후 다산이 신앙생활을 회복하였는지 여부는 천주교교회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로 확인하기에는 아직 증거가 될 사료가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불충분한 사료에 근거하여 단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산의 경학사상 속에서 천주교교리의 영향이 어떻게 살아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해명하는 작업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3. 다산의 사천학(事天學)과 ‘상제’(上帝)의 인식

 

1) ‘천주’개념의 수용과 ‘상제’의 인격신적 재발견

 

《천주실의》에서 제시된 ‘천주’개념과 다산의 ‘상제’에 대한 견해 사이의 연결점을 유의한다면 대체로, ① ‘천-상제’의 명칭에 대한 인식과, ② ‘천-상제’의 기본성격을 영명(靈明)함과 지각능력을 지닌 인격신적 주재자(主宰者)로 제시하며, 이에 따라 성리학에서 궁극존재로 제시하는 ‘태극’이나 ‘이 · 기’(理氣) 개념과 분명하게 차별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중심주제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첫째, ‘천-상제’의 명칭 문제이다. 우선 리치는 ‘천주’와 ‘상제’의 명칭을 일치시키면서, “우리의 ‘천주’는 바로 옛 경전에서 일컫는 ‘상제’이다. …옛 경서를 두루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이름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5)라 하여, 천주교의 ‘천주’와 유교경전에서 말하는 ‘상제’가 완전히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다른 명칭일 뿐이라 하여 일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아가 리치는 유교전통에서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로 혼용하여 쓰고 있는 ‘천’과 ‘상제’의 명칭이 지닌 의미상의 차이점을 점검하였다. 정이천(程伊川)이 《역전》(易傳), 〈건괘 편〉(乾卦篇)에서 언급하고 있는 경우처럼, 유교전통에서도 형체를 가리킨 것이 ‘천’이요 주재를 가리킨 것이 ‘상제’라 구별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구별이 없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그 구별을 엄격히 확인하여, “누가 이 푸르고 푸른 하늘을 가리켜 흠숭하겠는가? 군자가 혹시 ‘천지’라 일컫더라도 이것은 말투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지부(知府)나 지현(知縣)인 자는 소속한 부(府)나 현(縣)의 명칭으로 자기 명칭을 삼는 것과 같다. 남창 태수(太守)는 ‘남창부’(南昌府)라 일컫고, 남창현 대윤(大尹)은 ‘남창현’이라 일컫는다”6)라고 하였다. ‘상제’를 ‘천’이나 ‘천지’라 일컫는 경우에도 실체는 ‘상제’요, ‘천’이나 ‘천지’라는 명칭은 ‘상제’를 가리키는 호칭일 뿐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산도 ‘천’과 ‘상제’의 명칭에 대해, “‘천’의 주재가 ‘상제’이다. (상제를) ‘천’이라 말하는 것은 마치 임금(國君)을 ‘나라’(國)라 일컫는 것과 같으니, 감히 직접 가리켜 말하지 못하는 뜻이다”7)라고 하였다. ‘상제’를 임금에 비유하고 ‘천’을 그 나라(國)에 비유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주재자와 주재의 대상으로 생명이 없는 사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형체가 있는 ‘천’과 주재자로서 ‘상제’의 의미를 확실히 구별해 놓으려는 의도는 주재자로서 실재 존재가 ‘상제’이지 ‘천’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이요, 이 점에서 마테오 리치의 의도를 다산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천-상제’의 기본성격으로 영명함(靈)과 지각능력(覺)을 핵심으로 삼고 인격신적 주재자(主宰者)로 인식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리치는 “이 세상의 만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차례와 법도가 있으니, 애초에 ‘지극히 영명한 주재자’(至靈之主)가 그 성질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우주 안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각각 그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8)라 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천주-상제)가 지극히 영명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다산은 《중용》(26장)에서 말하는 “높고 밝음은 하늘에 짝한다”(高明配天)는 구절의 ‘하늘’(天)은 ‘푸르고 푸르러 형체가 있는 하늘’이라 하고, 《시경》(詩經), 〈주송 편 여천지명〉(周頌篇 維天之命)에서 “아! 하늘의 명이여, 오! 깊고 그윽하기 끝이 없도다’(維天之命, 於穆不已)라는 구절의 ‘하늘’은 ‘신령스럽고 밝으며 주재하는 하늘’이라 하였다.9) 하여, ‘천’을 사물로서 ‘창창유형지천’(蒼蒼有形之天)과 주재자로서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으로 명확히 대비시킴으로써, ‘상제’는 형체가 없으며 영명함과 지각능력을 기본속성으로 지닌 주재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다산은 ‘천-상제’의 ‘영명함’에 따른 인격신적 성격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성리학 전통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유일성과 절대성 및 주재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리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전능성이나 창조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 보여주고 있다. 곧 그는 “‘상천’(上天)의 일이란 광대하고 신묘(神妙)하여 할 수 없는 것이 없다”10)라고 하여, ‘상제’의 신비성과 전능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상제’의 존재를 정의하여, “하늘과 땅과 신(神)과 인간의 바깥에서 하늘과 땅과 신과 인간과 만물의 온갖 종류를 창조(造化)하며, 이들을 주재(宰制)하고 양육(安養)하는 자이다”11)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제’는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궁극적 초월자요, 모든 존재들의 창조주요, 주재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산이 《춘추고징》(春秋考徵)에서 ‘상제’를 “하늘과 땅과 신과 인간과 만물의 온갖 종류를 창조하며, 이들을 주재하고 양육하는 자”(造化天地神人萬物之類, 而宰制安養之者)라고 규정하고 있는 언급은 바로 리치가 《천주실의》의 첫 편(首篇)에 붙인 제목으로 “천주가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始制]하고 그것을 주재하며 양육함을 논함”(論天主始制天地萬物而主宰安養之)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온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12)

 

‘태극’과 ‘이’(理)를 만물의 생성근원인 궁극존재로 볼 수 없다는 마테오 리치의 견해가 다산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정조 임금의 질문에 답하면서, “〈태극도〉는 감(坎)괘와 리(離)괘를 합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반드시 모든 이치의 근본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후세의 유학자들로 ‘이’를 말하는 자들이 공허한 자리에서 하늘과 ‘태극’과 ‘이’를 말하려고 드니, 신의 천박한 식견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13)라 하여, 성리학에서 말하는 ‘태극’과 ‘이’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개념이라 주장하여, 마테오 리치의 견해와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테오 리치는 ‘태극’이나 ‘이’(理)와 ‘상제’의 차이를 ‘영’(靈 : 靈明)과 ‘각’(覺 : 知覺)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해명하여, “‘이’는 영명함과 지각이 있는가? 의리를 밝게 아는 것인가? 만약 영명함과 지각이 있으며 의리를 밝게 안다면 귀신의 부류에 속하는 것인데, 어찌 ‘태극’이라 하고 ‘이’라 하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제와 귀신과 인간의 영명함과 지각은 누구로부터 얻은 것인가? 저 ‘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사물에 베풀어 있게 할 수는 없다. ‘이’가 영명함도 없고 지각도 없다면 영명함을 만들어내고 지각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14)라고 하였다. 리치는 ‘이’가 영명함과 지각능력이 없다면 상제나 귀신이나 인간과 같은 영명함과 지각능력이 있는 존재를 생성하는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산도 리치와 일치된 입장에서 ‘이’를 ‘천-상제’와 일치시키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사람이 성인을 이루고자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단초가 있는데, 첫째가 ‘천’을 ‘이’로 인식하는 것이다”15)라고 하여, 성리학에서 ‘천’과 ‘이’를 일치시켜 ‘천즉리’(天卽理)를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근원적으로 그릇된 것임을 역설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성리학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기본틀로서 ‘태극’과 ‘이 · 기’개념을 만물의 궁극적 존재근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물의 속성인 의뢰자(依賴者)요, 관념적 형식이라 규정하여 ‘상제’와 단절시킨 것은 천주교 교리를 성리학과 차별화하고 유교경전과 접근하는 ‘분할과 공격’의 전술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이에 비해 다산은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유교경전을 재해석할 수 있는 논리를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으로 ‘탈출과 신설’의 전술을 추구하는 것이라 대비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16)

 

2) ‘상제’개념의 재인식과 ‘사천’(事天)의 신앙적 의식

 

다산이 천주교 교리의 ‘천주-상제’개념을 수용하면서 주자학의 관념적 사유에서 벗어나 유교의 ‘천-상제’를 인격신적 존재로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던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다산 경학은 성리설의 형이상학적 그물에서 유교경전을 풀어내어 유교경전 속에 간직된 신앙적 의식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유교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자신의 경학적 근본전제를 ‘천-상제’를 섬기는 신앙적 의식으로 정립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길 것’(實心事天)을 역설하며 ‘사천학’(事天學)을 정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사천학’이 지닌 특징은 ‘실심사천’(實心事天)의 신앙적 성격으로 ‘상제’를 만나는 것으로 드러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유교전통에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경전 속에는 하늘을 섬기는 ‘사천’(事天)과 부모를 섬기는 ‘사친’(事親)이 긴밀한 연결 속에 제시되기도 하였다. 다산은 바로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 “어진 사람이 부모를 섬김은 하늘을 섬김과 같고, 하늘을 섬김은 부모를 섬김과 같다”(仁人之事親也如事天, 事天如事親)는 《예기》(哀公問)의 구절을 중시하였다. 그것은 하늘을 섬김(事天)의 신앙이 부모를 섬김(事親)의 인륜과 서로 근거가 되고 연결됨을 역설하고 있다.17)

 

‘천-상제’를 영명한 주재로서 인격신적 존재로 인식하면, 이에 따라 ‘천-상제’는 내려와서 인간을 굽어살피며 감독하는(降監) 존재로서 자신의 삶에 절실하고 깊이 들어와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존재로서 신앙적 각성이 일어난다. 다산은 신앙대상으로서 ‘천-상제’를 섬기는 ‘사천’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심경밀험》(心經密驗)에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섬긴다’(一心事天)하거나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한다’(實心敬天)하였고,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에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긴다’(實心事天) 하거나 ‘진실한 마음으로 신을 섬긴다’(實心事神)라 하여, 하늘을 섬기는 경건한 신앙적 삶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천학’은 인격적 내면의 신앙자세로 말하면 ‘실심사천’(實心事天)이요,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실현양상은 ‘사친사천’(事親事天) 내지 ‘사인사천’(事人事天)으로 집약해 볼 수 있다.

 

다산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상제’를 만나는 모습을 서술하여, “보이지 않는다(不睹)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실체이다. 들리지 않는다(不聞)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소리이다”18)라 하여, 형상이 없는 속에서 ‘상제’의 실체를 보고, 소리가 없는 속에서 ‘상제’의 목소리를 들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천-상제’는 주재자로서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요 그 명령의 소리가 곧 ‘천명’(天命)이다. 다산은 ‘천-상제’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천명’을 ‘태어나는 처음에 부여되는 명령’으로서 ‘천성’(天性)과 ‘살아 있는 동안에 시시각각으로 계속하여 부여하는 명령’으로서 ‘경고’(儆告)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고 있다.19) ‘천성’ 곧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性)은 ‘상제’의 보편적 명령으로서 ‘천명’이라면, ‘경고’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도심’(道心)에 부여되는 ‘상제’의 구체적 명령으로서 ‘천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산이 말하는 ‘천성’으로서 천명은 천주교 교리의 ‘상존성총’(常存聖寵, 생명의 은총)에 상응하고, ‘경고’는 ‘조력성총’(助力聖寵, 도움의 은총)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20)

 

다산은 ‘천명’으로 ‘천-상제’의 목소리를 듣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늘은 (귀에다 대고) 친절하게 타일러서 인간에게 명령할 수는 없지만, (타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목소리(喉舌)가 인간의 ‘도심’에 맡겨져 있어서, ‘도심’이 경고하는 것은 황천(皇天)이 명령하여 경계하는 것이다. 남은 듣지 못하지만 자기만 홀로 분명히 들으니 더없이 자세하고 더없이 엄중하다. 가르치듯 깨우쳐 주듯 하니 어찌 친절하게 타이를 뿐이겠는가”21)라고 하였다. 곧 형체가 없는 ‘신’(神)인 ‘상제’가 같은 ‘신’의 종류인 인간의 ‘도심’(道心)이 서로 감응할 수 있으므로 ‘상제’는 인간의 귀를 통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심’을 통해 순간순간 말씀으로 인간을 타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도심’ 속에서 ‘상제’가 경고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바로 인간은 두려움에 떨며(恐懼) ‘상제’와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요, ‘상제’가 타이르고 경고하는 목소리를 ‘도심’에서 들으면 경계하고 삼가지(戒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다산은 유교경전에서 ‘사천’의 성격을 경건한 신앙적 삶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인간의 ‘도심’을 통해 ‘상제’가 ‘경고’하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인식은 유교경전 속에서 ‘계시(啓示)종교’의 성격을 새롭게 해석해 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4. 다산의 사천학과 인간의 인식

 

1) ‘영혼’개념의 수용과 ‘심성’개념의 재인식

 

다산은 “사람이 사람되는 까닭은 마음일 뿐이다. 마음을 인식하면 사람이 되고, …마음을 다스리면 사람이 된다”22)고 하여,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제는 바로 마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다산의 ‘心’개념 인식에서 서학의 ‘영혼’개념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지가 문제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① ‘심’(心)과 ‘성’(性)개념의 인식과, ② ‘덕’(德)과 ‘인’(仁)개념의 인식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심’(心)과 ‘성’(性)개념에는 여러 문제들이 따르고 있다. ‘심’ 개념에서는 주자학의 ‘심’을 ‘기’(氣)로 인식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 욕(欲)의 문제, ‘의지의 자율성’(自主之權) 문제 등이 제기될 수 있고, ‘성’개념에서도 삼품(三品)으로 분류하는 문제, 선악(善惡)과 기호(嗜好) 문제, 인성과 물성의 분별문제 등을 들어볼 수 있다.

 

‘심’개념의 인식 마테오 리치는 “사람은 형체와 정신의 두 가지가 서로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그러나 정신은 순수하여 신체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정신을 참된 자기로 삼고, 신체는 자기를 담은 그릇으로 삼는다”23)라고 하여, 사람을 ‘형체와 정신’(形神)의 결합으로 제시하고, 신체를 초월한 정신을 인간의 참된 실체로 확인하고 있다. 같은 어법으로 다산은 인간존재를 “정신(神)과 형체(形)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이 이루어진다”(神形妙合, 乃成爲人. 《心經密驗》)라 하여, 인간에서 형체가 없는(육신이 아닌) 요소를 ‘심’(心)이라 일컫기보다 먼저 ‘신’(神)이라 언급하고 있다.

 

욕망의 긍정 리치는 “한 생명이 태어남에 오직 한 가지 마음을 얻는데, 인간은 두 가지 마음을 겸하여 가지고 있으니 ‘수심’(獸心)과 ‘인심’(人心)이다. …나의 한 마음에는 욕망담당(司欲)과 깨달음담당(司悟)이라는 두 가지 직분이 있다. 욕망(欲)이 귀속하는 것은 선(善)일 뿐이요, 깨달음(悟)이 귀속하는 바는 진실(眞)일 뿐이다”24)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에 선을 지향하는 ‘욕망담당’과 진실을 지향하는 ‘깨달음담당’의 두 직분의 기관을 구별하였다. 여기서 리치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구별한 사실을 주목하여, “오직 그 ‘도심’이 발현함은 형체도 기질도 없지만 영명하고 통달한 지혜가 기질에 깃들어 주재가 된다”25)고 하여, ‘인심’이 신체적 기질에서 발현하는 것과 달리, ‘도심’은 하늘의 명령(天命)이 깃들어 있는 도덕적 의식인 ‘도의’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리치가 말하는 ‘수심’(獸心)은 다산에서 ‘인심’에 해당하고, 리치가 말하는 ‘인심’(人心)은 다산에서 ‘도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리치와 일치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또한 다산은 “우리 마음 안에 본래 욕망(願欲)란 것이 있으니, 만약 이 욕망의 마음(欲心)이 없다면 천하의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니, 그 마음이 담박하여 욕망이 없어서, 선을 할 수도 없고 악을 할 수도 없으며, 문학을 할 수도 없고 산업을 할 수도 없으니, 바로 이 세상에 버려진 물건이다. 사람이 어찌 욕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26)라 하여, 욕망이 있음으로써 선을 지향할 수도 있고 악을 지향할 수도 있으니, 욕망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욕망의 적절한 통제를 요구하지만, 인간의 욕망, 곧 ‘인욕’(人欲)을 ‘천리’(天理)에 대립시켜서 욕망 자체를 부정하여 ‘천리를 간직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 去人欲)는 성리학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의지의 자율성(自主之權) 리치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상제의 명령은 (금수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서 (행동이) 나오더라 그런줄도 모르게 하는 것이니, 자주(自主)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류는 스스로 주장을 세울 수 있으며, 일을 하는 즈음에 모두 그 본래 가지고 있는 ‘영명함의 의지’(靈志)를 사용한다”27)라고 하였다. 금수는 본능에 의해 결정된 행동을 하지만 인간은 ‘영명함의 의지’(靈志)로 자신의 주장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인간의 마음은 동물과 달리 본능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의지의 자유를 갖고 있음을 밝혀, “악을 저지를 경우마다 한편에서는 욕심이 일어나고 한편에서는 저지하려하니, 분명히 저지하는 것은 바로 본성이 받은 천명이다. …하늘은 사람에게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自主之權)를 부여하여, 선을 하고자 하면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을 하고자 하면 악을 하게 한다. 바뀌어 결정됨이 없으나 그 권리가 자기에게 있어서 금수가 결정된 마음(定心)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28)라고 하였다. 곧 하늘은 인간에게 사욕(私欲)과 천리(天理)의 두 방향으로 지향하는 의지를 부여하였는데, 인간의 마음은 그 두 갈래의 의지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니, 이것이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결정되지 않은 마음’(不定心)이요, 금수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이 본능대로만 행하기 때문에 ‘결정된 마음’(定心)이라 구별한다.

 

‘성’(性)개념 인식 리치는 ‘성’을 성리학에서 형이상학적 본체로서 ‘이’(理)로 보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각 사물종류의 본체일 뿐이다. …종류가 같으면 ‘성’이 같고 종류가 다르면 ‘성’이 다르다. …다만 사물에 ‘자립자’(自立者)가 있으니 ‘성’도 ‘자립’이 되고, ‘의뢰자’(依賴者)가 있으니 ‘성’은 아울러 ‘의뢰’가 된다. … ‘이’(理)란 ‘의뢰’의 종류이니 인간의 ‘성’이 될 수 없다”29)라 하였다. 곧 ‘성’은 사물마다 그 종류가 지닌 고유성을 결정하는 본체라고 하지만, ‘성’을 사물로부터 독립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속성으로 인식하는 견해라 볼 수 있다. 다산의 ‘성’개념도 바로 이 점에서 보편적 본체로서의 주자학의 ‘성’개념과 달리 개체와 종류의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다산은 “주자가 ‘성’을 ‘이’라 하므로 드디어 ‘천명’을 ‘이’라 한다. 비록 심 · 성에 부여되지만 선을 향하고 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천명’이다”30)라 하여, 주자학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거부함으로써 ‘천명’이 ‘이’가 아니라 ‘선을 향하고 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 하여 마음이 지닌 선을 향한 지향성이라 지적하니, 사실상 실체로서 ‘성’개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삼품설(性三品說) 리치는 ‘혼’(魂 : anima)을 성장능력이 있는 식물의 ‘생혼’(生魂)과 감각능력이 있는 동물의 ‘각혼’(覺魂)과 이성적 사유능력이 있는 인간의 ‘영혼’(靈魂)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는 ‘혼삼품설’(魂三品說)을 제시하고 있다.31) 그것은 ‘생혼’ · ‘각혼’ · ‘영혼’을 3층으로 나누어 상층의 ‘혼’은 하층의 ‘혼’을 내포하고 있지만 하층의 ‘혼’은 상층의 ‘혼’을 내포할 수 없는 계층구조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리치의 ‘혼삼품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성호는 ‘생장지심’(生長之心) · ‘지각지심’(知覺之心) · ‘리의지심’(理義之心)의 세 가지로 ‘심’을 구분하였고, 다산도 역시 ‘초목지성’(草木之性) · ‘금수지성’(禽獸之性) · ‘오인지성’(吾人之性으로 ‘성’을 구분하고 있다.32)

 

성기호설(性嗜好說) 다산은 인간의 ‘성’을 마음이 선(善)을 기호(嗜好)하는 것이라는 독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33) 그러나 다사의 ‘성기호설’은 마테오 리치가 “사랑할 만하고 욕망할 만한 것을 ‘선’이라 하고, 미워할 만하고 싫어할 만한 것을 ‘악’이라 한다. 이 뜻에 통하면 사람의 ‘성’이 선한지 아닌지를 논할 수 있다”34)라 하여 인간의 ‘성’이 선함을 사랑하고 욕망하는 정감적 지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견해와 긴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둘째, ‘덕’(德)을 실행한 이후에 이루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자는 ‘명덕’(明德)을 정의하여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비었으나 신령하여 어둡지 않으며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일에 대응하는 것이다”35)라 하여, 하늘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부여된 실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성’의 선함은 ‘양선’(良善)이고, ‘덕’의 선함은 ‘습선’(習善)이다. ‘양선’이란 천주께서 원래 창조한 성명(性命)의 덕이니, 나로서는 공로가 없다. 내가 말하는 공로는 스스로 익히고 쌓은 ‘덕’의 선에 있는데 그친다. …의로움을 보면 바로 행하는 것이 ‘덕’이 될 뿐이다”36)라 하였다. 따라서 ‘성’의 선함으로서 ‘양선’은 타고난 선함이니 나의 공적이 아니요, ‘덕’의 선함으로서 ‘습선’은 배우고 익힌 선함이니 바로 나의 공적이 되는 것이라 구별하였다. 그렇다면 ‘덕’은 인간의 노력과 실천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니, 그 공적에 따라 상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줄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다산도 ‘덕’이 인간의 성품에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주자학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자주적 판단에 따른 행위를 통해 ‘덕’이 실현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곧 ‘덕’이 선한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속에 공적으로 획득되는 후천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다산의 견해는 바로 리치가 ‘덕’의 선함을 ‘습선’으로 제시한 견해와 일치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2) ‘사인’(事人)의 사회적 구현

 

다산이 추구하는 인간의 구체적 실현과제는 ‘민’(民)의 새로운 인식을 통한 사회질서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은 ‘인’을 ‘남을 향한 사랑’이라 해석하면서, 그 사랑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되며, 특히 백성에 대한 치자(牧)의 사랑이 강조된다.

 

다산은 〈중용〉(13장)의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린다”(以人治人)는 구절을 “남에게 요구하는 바로 남을 섬긴다”37)라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다스린다(治)는 것이 권위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것(事人)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임금을 섬기는 일도 모두 ‘치인’임을 지적한다. 현실적으로는 신분적 귀천이나 치자와 백성의 차별이 있음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남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도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다산의 입장이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 백성을 섬기는 일이라 보는 근거는 다스림이 자신의 특권이 아니라 ‘상제’의 뜻을 받들어 ‘상제’를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산은 “자신이 천하 사람들의 죄를 떠맡는 것이 곧 옛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큰 법도이다”38)라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죄까지 자신의 죄로 자각하여 하늘 앞에서 백성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신앙적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일에 대해서도,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민관이 또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을 편히 살게 해 주고, 죄 있는 자를 잡아다 죽이니, 이것은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39)라 하였다. 백성의 죄를 판결하여 징벌하는 일은 결코 재판을 담당하는 관리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형벌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상제)이 심판하는 일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각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 관한 판결이 ‘상제’의 권한이라 인식한다면 소홀하게 판단하거나 함부로 처리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죄를 짓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주재자로서 하늘의 존재에 대한 신앙적 각성이 철저히 관철하고 있는 것은 유교경전에서 그 논거를 찾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유 속에 천주교교리의 영향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의 경세론에서는 수령과 백성 사이에 어느 쪽이 목적이고 어느 쪽이 수단인지를 재확인하도록 요구하면서, “수령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原牧임을 역설하고 있는 사실이나, 당시 사회의 신분적 차별과 억압의 현실에 대해, “나에게는 소망하는 바가 있으니, 온 나라가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될 것이다”40)라 하여, 신분제도의 전면적 폐지를 사회적 이상으로 꿈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분적 차별과 억압의 질서를 넘어서 모든 백성이 평등한 지위를 확보하는 이상을 꿈꾸면서, 다산은 이러한 평등의 세계는 ‘상제’에 대한 신앙의 확립에서 가능한 것임을 밝혀, “위에 존재하는 것이 하늘이요,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백성이다”41)라 하였다. 하늘(상제) 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 다산 사상에서 천주교가 갖는 위치와 의미

 

다산은 23세 때 천주교 신앙에 입문하여 20대의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에 깊이 젖었었지만, 1791년 금교령(禁敎令)이 내려지자 천주교신앙집단으로부터 이탈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앙을 회복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배교한 뒤에도 겉으로는 유학자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지키는 이중생활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는 달레의 기록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 증거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앙을 지켰는지 아닌지의 종파적 관심에서 벗어나 그의 사상에 내포된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가 천주교 교리를 통해 이해한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이 그의 경전해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곧 유교경전의 해석에서 핵심적 개념인 ‘천-상제’와 ‘심-성’개념의 새로운 해석을 중심으로 천주교교리의 영향을 받아 유교경전을 새로운 빛으로 해석함으로써, 주자학의 의리론적 경학을 넘어서 ‘사천학’으로서 새로운 경학체계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경학사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주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유교경전 해석에 끌어들임으로써 유교와 천주교, 내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교류와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유론적 천주교 교리서가 천주교 교리의 입장을 기준으로 유교경전의 세계와 소통의 길을 열어갔던 작업이라면, 다산은 ‘사천학’으로서의 유교경전 해석을 통해 유교와 천주교의 세계관 사이에 소통의 수준을 심화하였다는 점에서 사상사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자학이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지만 불교가 아닌 것처럼, 다산의 경학도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았지만 천주교 교리는 아니다. 그의 경학은 천주교 교리를 흡수함으로써 유교사상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을 새롭게 계발해 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유교경전과 천주교 교리가 이 시대에서 가장 깊은 차원으로 교류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다산에 있어서 천주교 교리의 수용이 지닌 특성은 유교경전의 해석을 위한 새로운 빛으로 천주교 교리의 세계관을 끌어들인 것이지만, 경학의 범위에 한정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의 경학에는 여러 면에서 천주교 교리와 일치하는 관점이 드러나지만, 동시에 여러 면에서 차이점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산의 사상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취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견해도 무리한 것이지만, 천주교 교리의 모든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도 무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산은 유교와 천주교의 두 축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사상적 물결이 충돌하는 역사적 시점을 살면서 그 합류의 가능성을 찾아 더욱 큰 사상사의 물줄기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다산이 천주교 교리를 섭취하여 구축한 ‘사천학’으로서 유교경전 해석은 유교 사상사에 가장 창조적 업적의 하나라 할 수 있으며, 유교경전의 해석에 활용하였던 천주교교리의 빛은 한국 교회사에서 보더라도 개인 신앙의 순교사를 넘어 사상적 문화적 교류의 차원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愼後聃, 《西學辨》(《河濱全集》).

李瀷, 《星湖全書》.

丁若鏞, 《與猶堂全書》.

朱熹, 《大學章句》.

利瑪竇(Mateo Ricci), 《天主實義》.

畢方濟(Sambiaso), 《靈言?勺》.

금장태, 《실학과 서학-한국근대사상의 원류》, 지식과 교양, 2012.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조광, 《조선후기천주교사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달레(Ch. Dallet), 《한국천주교회사》, 安應烈 · 崔奭佑譯, 분도출판사, 1980.

최석우, 〈Dallet가 인용한 다산의 韓國福音傳來史〉, 《李海南華甲論叢》, 일조각,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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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亞吾斯丁曰費祿蘇非亞(philosophia)總歸兩大端, 其一論亞尼瑪(anima), 其一論?斯(Deus), 論亞尼瑪者令人認己, 論?斯者, 令人認其源. 《靈言?勺》(《天學初函》[2], 1965, 臺北, 1130쪽).

 

2)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89~191쪽.

3) 安應烈·崔奭佑 : 달레(Ch. Dallet), 《한국천주교회사》 中, 분도출판사, 1980. 185~186쪽.

4) 崔奭佑, 〈Dallet가 인용한 다산의 韓國福音傳來史〉, 《李海南華甲論叢》, 1970, 205~216쪽.

5) 吾天主乃古經書所稱上帝也,···歷觀古書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 《天主實義》, 第2篇(14).

 

6) 孰指玆蒼蒼之天而爲欽崇乎, 君子如或稱天地, 是語法耳, 譬若知府縣者, 以所屬府縣之名爲己稱, 南昌太守, 稱謂南昌府, 南昌縣大尹, 稱謂南昌縣. 《天主實義》, 第2篇(16).

 

7) 天之主宰爲上帝, 其謂之天者, 猶國君之稱國, 不敢斥言之意也. 《與猶堂全書》(이하 《與全》으로 줄임)[2], 권6, 38, 孟子要義.

8) 此世間物安排布置, 有次有常! 非初有至靈之主, 賦予其質, 豈能優游於宇下, 各得其所哉. 《天主實義》, 第1篇(4). 

9) 高明配天之天, 是蒼蒼有形之天, 維天於穆之天, 是靈明主宰之天. 《與全》[1], 권8, 30, 中庸策.

10) 上天之載, 廣大神妙, 無所不能. 與全》[2], 권3, 13, 中庸自箴.

11) 上帝者, 何, 是於天 · 地 · 神 · 人之外, 造化天 · 地 · 神 · 人 · 萬物之類, 而宰制安養之者也. 《與全》[2], 권36, 24, 春秋考徵, 先儒論辨之

 

12) 오늘날 우리말로 일반화된 ‘創造’라는 용어는 다산의 경우 ‘造化’라는 유교전통의 용어를 쓰고 있다. 마테오 리치는 여기서 ‘비로소 제작하였다’라는 뜻으로 ‘始制’라고 썼지만, 《天主實義》에서도 ‘創造’라는 말이 아니라 ‘始制作’ · ‘始制創’과 더불어 ‘造化’라는 유교전통의 용어를 많이 쓰고 있다.

 

13) 蓋太極圖不過合坎離兩卦者,···不必爲萬理之本, 而後儒之言理者, 於空蕩蕩地, 必說蒼蒼太極理出來, 非臣淺見所可?測. 《與全》[2], 권4, 64, 中庸講義補. 다산은 이 구절이 본래 李檗의 견해였음을 밝히고 있다.

 

14) 理者靈覺否, 明義者否, 如靈覺明義, 則屬鬼神之類, 曷謂之太極, 謂之理也, 如否則上帝鬼神夫人之靈覺, 由誰得之乎, 彼理者以己之所無, 不得施之于物, 以爲之有也, 理無靈無覺, 則不能生靈生覺. 《天主實義》, 第2篇.

 

15) 今人欲成聖而不能者, 厥有三端, 一認天爲理. 《與全》[2], 권2, 40, 心經密驗.

 

16) 마테오 리치는 性理學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자연철학으로서 ‘陰陽’ · ‘五行’의 개념도 정면으로 공격하였고, 茶山도 리치의 논리를 수용하여 ‘陰陽’ · ‘五行’의 사유체제를 뿌리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작업을 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 茶山의 ‘事天學’은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촉발된 것이겠지만, 동시에 천주교 교리와 관련이 없는 선배 학자 白湖 尹?의 경학체계가 事親-事天의 구조로 해석된 事天學이라는 사실과의 연관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8) 所不睹者何也, 天之體也, 所不聞者何也, 天之聲也. 《與全》[2], 권3, 4, 中庸自箴.

19) 天於賦生之初有此命, 又於生居之日, 時時刻刻續有此命. 《與全》[2], 권3, 3, 中庸自箴. 

 

20) 愼後聃이 《西學辨》에서 비판한 天主敎 敎理書인 畢方濟(Sambiaso)의 《靈言?勺》에서는 聖寵의 두 종류로 天主의 ‘公祐’와 額辣濟亞의 ‘特祐’를 언급하였는데, ‘公祐’와 ‘特祐’도 茶山의 ‘天性’과 ‘儆告’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21) 天不能諄諄然命之, 非不能也, 天之喉舌, 寄在道心, 道心所儆告, 皇天之所命戒也, 人所不聞, 而己獨諦聽, 莫詳莫嚴, 如詔如誨, 奚但諄諄已乎. 《與全》[2], 권3, 3, 中庸自箴.

 

22) 人之所以爲人者心而已, 認心則爲人,···治心則爲人. 《茶山과 文山의 人性논쟁》, 實是學舍經學硏究會 편역, 한길사, 1996, 130쪽.

23) 人以形神兩端, 相結成人, 然神之精, 超于形, 故智者以神爲眞己, 以形爲藏己之器. 《天主實義》, 제7편(4).

 

24) 一物之生, 惟得一心. 若人則兼有二心. 獸心人心是也,···吾人一心, 乃有司欲司悟二官, 欲之所屬, 善者耳, 悟之所屬, 眞者耳. 《天主實義》, 제3편(5).

 

25) 惟其道心所發無形無質靈明通慧者, 寓於氣質, 以爲主宰. 《與全》[2], 권6, 20, 孟子要義.

 

26) 吾人靈體之內, 本有願欲一端, 若無此欲心, 卽天下萬事都無可做,···余嘗見一種人, 其心泊然無欲, 不能爲善, 不能爲惡, 不能爲文詞, 不能爲産業, 直一天地間棄物, 人可以無慾哉. 《與全》[2], 권2, 39, 心經密驗.

 

27) 上帝之命, 出于不得不然, 而莫知其然, 非有自主之意, 吾人類則能自立主張, 而事爲之際, 皆用其所本有之靈志也. 《天主實義》, 제4부(5).

 

28) 每遇作惡, 一邊發慾, 一邊沮止, 明沮止者, 卽本性所受之天命也,···天之於人, 予之以自主之權, 使其欲善則爲善, 欲惡則爲惡, 游移不定, 其權在己, 不似禽獸之有定心. 《與全》[2], 권5, 34, 孟子要義.

 

29) 夫性也者, 非他, 乃各物類之本體耳,···同類同性, 異類異性,···但物有自立者, 而性亦爲自立, 有依賴者, 而性兼爲依賴,···理也乃依賴之品, 不得爲人性也. 《天主實義》, 제7편(1).

 

30) 朱子以性爲理, 故遂以天命爲理也, 雖然賦於心性, 使之向善違惡, 固天命也. 《與全》[2], 권14, 39, 論語古今註.

 

31) 彼世界之魂, 有三品, 下品名曰, 生魂, 卽草木之魂是也,···中品名曰, 覺魂, 則禽獸之魂也,···上品名曰, 靈魂, 卽人魂也. 此兼生魂覺魂, 能扶人長養, 及使人知覺物情, 而又使之能推論事物, 明辨理義. 《天主實義》, 제3편(3),

 

32) 星湖와 茶山은 《天主實義》에서 제시된 魂三品說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지만 《荀子》(王制)를 끌어들이면서 각각 ‘心’을 3층위로 제시하고(《星湖全集》, 권41, ‘心說’, 같은 책, 권54, 跋荀子), ‘性’을 3층위로 제시하였다. 《與全》[2], 권4, 中庸講義補.

 

33) 性者, 人心之嗜好也,···人性嗜善. 《與全》[2], 권2, 4, 大學講義.

34) 可愛可欲謂善, 可惡可疾謂惡也. 通此義者, 可以論人性之善否矣. 《天主實義》, 제7편(1).

35)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大學章句》 經1章.

 

36) 性之善爲良善, 德之善爲習善, 夫良善者天主原化性命之德, 而我無功焉, 我所謂功, 止在自習積德之善也,···見義而卽行之, 乃爲德耳. 《天主實義》, 제7편(3).

 

37) 以人治人者, 所求乎人以事人也. 《與全》[2], 권3, 4, 中庸自箴.

38) 身任天下人之罪, 卽古君師事天之大法也. 《與全》[2], 권16, 34, 論語古今註. 

39) 惟天生人而又死之, 人命繫乎天, ?司牧又以其間, 安其善良而生之, 執有?者而死之, 是顯見天權耳. 《與全》[5], 권30, 欽欽新書 序.

40) 若余所望則有之, 使通一國而爲兩班, 卽通一國而無兩班矣. 《與全》[1], 권14, 23-24, 跋顧亭林生員論.

41) 上者天也, 下者民也. 《與全》[2], 권22, 2, 尙書古訓.

 

[교회사 연구 제39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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