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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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바실리오와 수도승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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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6 ㅣ No.406

바실리오와 수도승 전통1)


수도승생활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그 뿌리를 내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종교적 본능에 접목되어 있다. 사가(史家)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수도승 현상의 온전한 형태는 비록 엘리트와 같은 소수 집단에서 드러나는 것이긴 해도,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의 가슴에 깃들여 있는 절대자를 향한 갈망과 내면성의 필요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수도승생활의 기원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수도승생활의 제도가 꽃핀 때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철저한 실천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는 적어도 유비적으로는 수도승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수행(修行)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수도승생활이 다른 모든 종교의 수도승생활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통으로 이의가 없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수행이 공통으로 지니는 ‘포기’가 아니라, 통상 ‘그리스도를 따름’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온전한 애착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사실 때 벌써 엄밀한 의미의 ‘제자’들을 두셨다면, 사가들은 이 수덕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대체로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던 단계와, 그 후 점차 제도화된 단계 사이를 구분한다. 그래서 전자를 수행운동(ascetismus)이라 부르고 후자를 수도승생활(monachesimus)이라 부른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두 번째 형태인 제도화된 형태는 3세기 중엽에 나타났으며, 4세기 전반에는 이미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통상적으로 안토니오가 그리스도교의 수도승생활을 시작하였고, 빠코미오는 이를 확산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여긴다. 그리고 4세기의 바실리오와 동시대인들은 기존의 전통에 적응하고, ‘사부들’의 관습과 관행을 마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인 체험으로 여겨 이를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위의 전제는 무대의 배경과도 같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외인들은 체사리아의 바실리오를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와, 익명의 ‘스승’ 그리고 누르시아의 베네딕도의 선구자로 여기고, 수도승 전통의 개척자나 창시자로 생각하는 우를 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개혁자 혹은 쇄신자라고 해야 한다. “바실리오와 수도승 전통”이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전개할 내용에서는 수행자 바실리오를 그 이전의 수도승 전통과 관련시켜 다루려고 한다. 다시 말해, 바실리오 이후 동 서방에서 그의 영향 아래 생겨난 수도승 전통에 그가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은 논외로 할 것이다. 그리고 바실리오 이전의 수도승 전통을 다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 이전의 수도승 전통들을 염두에 두기는 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시대만으로 그 범위를 한정시킬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재 자체의 문헌 증거도 불충분하고 아직은 너무 많은 논란들을 품고 있는 소재를 다룸에 있어, 연구의 범위는 협소해 지겠지만, 오류의 폭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제로, 구체적이고도 생동감을 결하지 않는 방법으로 - 삶과 관계되는 주제를 다룰 경우 유효한 방법은 이것뿐이거니와 - 주제의 핵심에 다가가 보기로 한다. 수도승생활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로서, 수도승생활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서 드러난 제도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규칙이라는 사실로서, 이상(理想), 혹은 영성적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소고는 바실리오와 수도승 제도, 그리고 바실리오와 수도승적 가르침 두 부분으로 나눈다. 우리는 바실리오가 공통의 유산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유산을 얼마나 독창적으로 풍요롭게 했는지를 각 부분에서 순서대로 다루고자 한다.


I. 바실리오와 수도승 제도

1. 전통의 인물 바실리오


바실리오는 가계의 기원으로만 보더라도 전통의 인물이었다. 본도와 까빠도키아의 상류 귀족 가문의 후예요 웅변가였던 노(老) 바실리오의 아들이었으며 대 지주들의 손자로서, 바실리오는 늘 조국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살게 된다. 그리고 친할머니 마끄리나(Makrina)로부터 유년에 받은 상당 부분의 교육은 종교적으로 강한 인상과 이 자연적인 인연을 굳게 하였다.2) 그의 가정은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이었다. 친가 쪽으로는 조모 마끄리나와 앞서 죽은 조부가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3) 그들은 막시미노 다이아(Maximinus Daia)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하느라 모든 재산을 잃고 후에 네오체사레아(Neocaesarea) 근처에 있는 본도의 숲 속으로 피신했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아마 306년부터 313년까지 칠 년간 거기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4) 한편 외가 쪽으로 바실리오는 순교자의 손자가 된다. 그의 친동생인 니싸의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어머니 에멜리아(Emelia)의 부친이 아마 리치니오 황제 치하였던 320~324년경에 신앙 때문에 순교했다고 한다. 바실리오의 증언에 의하면, 조모 마끄리나는 기적자 그레고리오(Greogorius Taumaturgus)로부터 강론을 들었던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을 전해 받았다고 하며, 이런 신앙의 기본 요소들이 바실리오에게도 전해진 것이다.5) 여성에 대한 애정 표현 문제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매우 절제했던 바실리오였지만, 할머니에게는 늘 감사와 존경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글의 관점에서 볼 때, 숲 속으로 숨어버린 바실리오의 조부모의 유형 생활, 즉 이전까지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본도의 외딴 곳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사실 등에 대해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묘사하는 바를 들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묘사는, 어렸을 때부터 거룩한 할머니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바실리오 자신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다. 할머니 마끄리나가 그를 키워 주었던6) 안네시에서는 가족이 모두 금욕적으로 살았던 분위기에 대한 매혹, 실제적인 포기를 실천하기까지 이르렀던 그리스도적 증거의 생활은 그와 손위 누이의 상상력에 깊이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손위 누이 마끄리나는 후에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온 가족에게 수행 생활의 스승이 되었다. 이렇듯 벌써 어린 시절부터 바실리오와 그 누이의 마음속에는 고독한 수행자의 매력적인 모습과 후에 순교자에 비견되는 신앙의 증거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바실리오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첫 유년기에 배워 물려받았던 생각이 나이가 들고 경험이 생기면서 점차 제 꼴을 갖추고 발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도 그가 가정교육에서 얻은 바가 얼마나 큰지를 후에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말하였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도 말하듯, 바실리오는 유년기부터 관대함의 모범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7) 이 관대함은 비신자인 부자나 유력자들이라도 지닐 수 있는 ‘은인 의식’이 아니라, 복음의 모범과 계명에 따라 온갖 형태의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행하는 애덕 실천의 활동이었다. 이렇듯 우리 눈앞에는 바실리오가 자기 인생을 구상하기도 전에, 그가 후에 스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널리 확산시키게 될 그리스도교 수행 생활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342~344년경에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 에멜리아는 본도의 네오체사레아를 떠나 자식들과 함께 고향인 까빠도키아로 이주하게 된다. 13세였던 바실리오는 중요한 대도시요 문화의 중심지인 체사레아에 있는 수사학 학교에서 지적 교육을 받았다. 까빠도키아의 주교였던 그레고리오라고 하는 그의 외숙이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8) 까빠도키아의 체사레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특히 아테네에서 받았던 고등 교육은 그의 가슴 깊이 각인 된 유년기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헬레니즘의 수도 아테네에서 그는 사회적이고 동시에 종교적인 성격의 형제회 중 하나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와 바실리오처럼, 영혼의 깊이와 정신적 소양에 있어 비슷한 수준의 젊은 학생들을 엮어 주던 전통적인 모임이었다. 예비 신자들간의 진정한 우정에 대한 체험은 훨씬 후에 시작하게 될 공동생활을 위해 하느님께서 섭리해주신 준비였다. 게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의 저술을 읽으면서, “인간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동물이며”9), 개인주의적인 고립은 인간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점진적으로 바실리오는 조만 간에 영위하게 될 삶의 형태를 발견하였다. 실망 역시 그러한 체험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바깥사람들의”10) “헛된 철학”이라 부르게 될 외교인들의 철학은 상당히 일찍부터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5년간의 수사학 공부를 끝마치고 아테네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는데,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적어도 8년간 공부하였다. 그래서 바실리오는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기던 절친한 친구 그레고리오와도 당분간 떨어져 있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355-356년경에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를 거쳐 급히 까빠도키아로 돌아왔다. 누이 마끄리나의 모범과 조언을 따라 그리스도교적 수행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였으며, 그에게는 이미 이것이야말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 즉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마끄리나의 편지로부터 혹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원천들로부터 에우스타시오(Eustatius)라는 인물의 영성적 명성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15년 전부터 본도와 그 인접 지역에서 수도공동체를 여러 개 창설했던 사람이었다. 에우스타시오의 강한 품성과, 엄격하고 비외골수적인 수도생활이 지닌 매력은 마끄리나의 남성적 정신에 부합하였다. 마끄리나는 이미 안네시 지역의 모든 여성 소공동체들의 스승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지역의 많은 주교들은 에우스타시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듯하였지만 그에 대해 의심하고 심지어 적의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바실리오는 그를 직접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자기 식구들이 그에게 갖고 있는 신뢰에 공감하고 있었다. 에우스타시오와 만나지 못한 바실리오는11) 소아시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승 세계를 돌아보는 일종의 ‘견학여행’을 시작한다. 치우침이 없고 신중했던 그는 경험을 넓히고, 이미 동방의 여기 저기에 꽃피고 있던 그리스도교 수행자 단체와 접촉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로12), 그리고 이집트로13) 간다. 다시 한 번 여기서 그는 전통의 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는 이미 수도승 전통의 한 가운데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수도승 전통들’이라고 복수로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수를 사용하여 ‘수도승 전통’이라고 쓰기로 하자. 왜냐하면 수도승생활의 개별화한 정신을 드러내는 지역적 관습과 관례를 넘어서서, 수도승 전통의 공통분모를 드러내는 같은 성격의 확신과 열망과 활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생활의 역사에 관해 뛰어난 전문가인 드 보궤 신부는 핵심에 곧바로 들어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하면서 우리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짧게 말해서, 고대 수도승생활의 규칙서들의 신학적 근거는 이중으로 드러난다. 그 하나는, 규칙서들이 복음과 사 사도 도적 적 전 전통 통에 의거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저런 공동체들에 법규를 제정해 주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가시아노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대대로 전수되어온 구전 전승이다. 결국 이 살아있는 전통은 전체 회수도원들(coenobia)에 보존되어 왔으며, 적어도 수도승생활의 이상적 토양인 에집트에서는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 전통은 사도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다. 수도승 전통에 대한 이런 개념은 명백히 교회 전통의 개념을 모델로 형성된 것이다”라고 한다. 드 보궤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규칙서들의 첫 번째 근거는‘전통’ 이다. 규칙서는 수덕과 공동생활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본 교회 전통인 것,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성서와 한몸을 이루는 것이다.”14)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실리오는 당대의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의 비밀들을 찾아 얻으려했던 선배들을 본받기 위해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함과 모방이 사실일진대, 그가 추구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적 철학이었다는 것도 사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즉 그와 마찬가지로 동생(니싸의 그레고리오)과 친구(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눈에도 ‘철학자’들이었던 수도승들의 전유물이요, 그들로부터 전수받은 지혜였던 그리스도교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를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본문들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시사하는 바가 큰 몇 가지만을 인용해 보겠다. 역설적이지만, 이점에 관해 가장 명백한 증언을 제공해 주는 것은 바실리오의 수도규칙들이 아니라 그의 편지들이다.

356년 혹은 357년에 쓰여진 바실리오의 제1서간은 에우스타시오를 그리스도교의 수덕가요 소아시아에서 수도승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집트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바실리오는 틀림없이 안티오키아를 방문했을 것이고, 아마도 실피오산과 북부 시리아의 유명한 여러 곳들의 수행자들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삼각주 근처에만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대 안토니오의 발자취를 따라 피스피르(Pispir)와 콜줌(Kolzum)산을 향해, 더 나아가 빠코미오가 창설한 공동체들이 있는 타벤네시(Tabennesi)와 프보우(Pbow)까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375년 가을에 쓴 서간 223은 몇 가지 정확한 소식을 제공해주는데15), 바실리오는 여기서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다른 지역”과 팔레스티나와 첼레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수행자들에 대해 경탄한다. 그는 “그들이 음식을 절제하고, 노동을 거부하고, 기도에 항구하며, 예수의 죽음과 천국의 시민임을 드러내기 위해 육신을 멸시한다”16)고 전한 다음 “나 역시 할 수 있는 한 이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고 싶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에우스타시오에게서 이들의 덕행을 본받는 이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17) 그래서 그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이들의 비난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승 전통을 따르는 인물로서 바실리오의 면모를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서간 207이다. 그는 여기서 까빠도키아의 그의 교구와 인근 지역, 특히 본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남녀 수도공동체들이 지키고 있는 제도와 조직에 있어서 혁신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네오체사레아의 주교인 그의 사촌 아타르비오는 바실리오의 믿음을 의심한 나머지 그를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바실리오가 새로운 법적 시간경들을 도입하고, 양편의 성가대가 여러 음률의 양식으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들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전례를 바꾸어 놓으려한다는 것이었다.18) 이에 대한 바실리오의 대답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하던 관습과 관례를 묘사하는, 두 장에 걸친 변론으로 남아있다. 그는 여러 남녀 단체가 “복음적 삶을 선택”하고 “통회를 실천”하며 “하느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19) “그들은 우리 하느님께 끊임없이 찬가를 노래하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 위해 자기 손으로 일한다.”20) 바실리오는 전에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았을 때 했던 변론보다 더 나은 변론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대부분의 교회들과 맺는 친교이다.21) 신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수행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이단적이거나 혁신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수행 공동체에서 형제자매들이 거행하는 전례는 “하느님의 모든 교회들”에서 거행하는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22) “만일 그런 이유로 우리를 피하겠다면, 여러분들은 이집트인들, 두개의 리비아 지역에 사는 이들, 테베인들, 팔레스타인 사람들, 아랍인들, 페니키아인들, 시리아인들, 유프라테스인들 및 성인 기념일에 공통의 밤샘(기도)과 기도와 시편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든 이들도 다 피해야 할 것이다.”23)

바실리오는 그의 걸작 <성령론>으로 인해 교의사가와 신학사가들에게는 더욱 전통의 인물로 남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글과 말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 길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한 선구자로 드러난다. 이 위대한 신학 작품에 빈번히 쓰인 전통적인 용어 체계는 이에 대한 웅변적 증언인데, 명사 ‘paradosis’는 20회 쓰이고 있으며, 그 동사형은, 동의어는 포함시키지 않고도, 적어도 8회나 등장한다.


2. 적응의 귀재 바실리오

아타르비오에 맞선 바실리오의 변론이 다음과 같은 점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된다. 즉 바실리오가 대다수의 동방 교회나 수도원들의 전통적인 관례를 승인 혹은 정착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 적응에 있어서 자유의 여백도 남겨 두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드 보궤가 상기시켜 주었듯이, 수도승 전통 역시 살아있는 전통이다. 시대와 장소의 다양성, 사회 문화적 상이성, 개인적이거나 공동체적인 경험의 성숙 등, 모든 것이 지혜로운 적응을 요구한다. 특히 바실리오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러나 그의 적응력이 드러나는 몇 가지 단서를 살펴봄에 있어 우리는 백여 년에 걸쳐 나타난 장점과 경향들을 맞서게 하기 쉬운 가치 판단들을 삼갈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영역에서의 정당하고도 칭송받을 만한 다원성을 통해 영감의 통일성은 늘 근본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 적응력을 이런 저런 형태의 ‘혁신’과 혼동해서 나무란다면 잘못된 일일 것이다. 적응은 혁명이란 의미의 ‘혁신’이 아니라, 수도승의 카리스마를 식별하게 해 주시는 성령의 빛으로 가변적 조건에 맞게 조정한다는 뜻이다. 재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포기, 은수 생활, 그리스도 추종, 고독, 흠숭과 경청을 위한 침묵, 성독, 기도, 일, 완전한 금욕, 절대적인 하느님 사랑, 영적 부성(父性), 재림(Parusia)의 대망(待望) 등, 그리스도교 수도승생활의 여러 요소들은 수행(修行) 주제에 대해 쓴 바실리오의 초기 저작, 예컨대 편지 2와 <윤리 규정>, 그리고 <소 아쉐티콘> 등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이 요소들은 여러 <머리말>들과 함께 수행 저술집 ‘corpus ascetico’24)의 마지막 편찬에 이르도록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이는 <긴 규칙>, <짧은 규칙>의 발전 과정에서도, 그리고 두 권의 <세례론>에서도 드러난다.

이 문헌들을 서로 구별 짓는 것, 특히 다른 저자들이나 다른 지역의 수도승 문헌들로부터 이들을 구별 짓는 것은, 상황에 따라 그 요소를 강조하거나 혹은 다른 어떤 요소를 보충하는 것이다.

수도승생활에서 바실리오의 선구자가 되는 이들 중에 어떤 이름은 역사상 상징적인 가치를 지닌다. 관습 때문에, 그리고 오류로 말미암아 이들의 중요성이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은 수도승적 이상이 표현되었던 다양한 방법을 드러내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집트의 안토니오와 빠코미오, 팔레스티나의 힐라리오, 시리아의 율리아노 사바, 그리고 소아시아의 에우스타치오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제 바실리오가 이 인물들의 체험에서 어떻게 유익한 점을 뽑아내어 상황에 적응시킬 줄 알았는지를 짤막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안토니오와 이집트의 은세 수도승생활

바실리오가 안토니오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서슴치 않고 확언할 수 있다. 바실리오의 시대에 안토니오는 이미 죽은 후이거나 죽기 직전이었고, 공간적으로도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79년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가 아타나시오에게 바친 찬사에서 <안토니오전>에 대한 직접적 지식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실리오 역시 아타나시오의 이 작품을 읽었을 뿐 아니라 안토니오의 모범과 그 특별한 삶을 모를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5) 은세(隱世, anacoresi) 혹은 ‘세상과의 절연’이란 주제는, 358년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에게 보낸 편지 14와 226)의 시기부터 <긴 규칙> 6(약 376년)의 최종 편집 단계에 이르기까지, 바실리오의 수도승적 가르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바실리오 역시 편지 2에서 사막(eremia)란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에게 이 은세는 결코 극단적인 은둔 수도승생활(eremitismo)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오 역시 수행의 초기에는, 죽은 동생 나우크라찌오처럼, 일종의 반은둔 생활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그가 쓴 편지들 가운데 익명의 몇몇 장 외에는 다른 동료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후에 그가, 독수도자가 형제적 애덕을 황폐하게 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공동체 생활이 독수도자 생활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역사에 유래가 없을 만치 극구 내세웠을 때에도, 실제로는 자기 원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게 될 것이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가 한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심지어 바실리오는 회수도원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은수 암자들까지 세웠다고까지 해야 한다.27)

2) 빠코미오와 이집트의 회 수도승생활

바실리오가 빠코미오를 만나 대화할 수 없었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빠코미오는 346년 54세쯤 되었을 때,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귀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코미오의 직제자들과 직접 접촉을 가질 가능성은 대단히 많다. 그들의 수로 보나, 알렉산드리아 및 삼각주 지역의 공동체들과 맺고 있던 관계로 보건대 그런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빠코미오 수도원의 위계질서 조직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바실리오는 수천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수도승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사도 4,32) 사용하던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우 겸손하고 인간적이며 진정한 영적 아버지였던 빠코미오는, 자신의 수도회가 확산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체제와 조직상의 피치 못할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자기의 회수도원 제도가 본의 아니게 일종의 군대 제도를 닮아갈 위험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나무랄 일만은 아니었다. 실상, 은둔 수도승생활보다 공동체 수도승생활에 대한 선호를 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빠코미오는 일이나 식사 시간 외에는 모든 수도승들이 자기 독방을 쓸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체질적으로나 후천적 교육으로나 같은 성향을 지녔던 바실리오는, 회 수도승생활의 이상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틀림없이 만족스레 주목했을 것이다. 실로 회 수도승생활은 공동생활이 표현하는 형제적 사랑을 확산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이 공동생활은 각자가 모두에게 봉사하기 위해 저마다 지닌 재능과 한계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3) 힐라리오와 팔레스타인의 수도승생활

팔레스타인 수도승생활에 대한 고대 그리스도교 세계의 증언들의 대부분은 4세기 말 이전으로는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 에피파니오, 성 예로니모, 그리고 역사가 소조메노의 증언 덕분에, 4세기 중엽 가자 근처의 마유마 등지의 은수처에서 독수도승생활을 했던 힐라리오의 명성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28) 예루살렘에는 4세기 중반부터 수행자들과 동정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예로니모와 아퀼레이아의 루피노, 그리고 4세기 말의 여러 교부들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의 수는 금방 늘어났다. 바실리오는 과연 유다 광야의 ‘라우라’들이나 시나이 반도의 수도승들을 방문했을까? 그 대답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상세한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4) 율리아노 사바와 시리아의 수도승생활

니시비의(혹은 에뎃사의) 에프렘은, 개인적으로 실천했던 수행 생활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도승생활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젊은 바실리오가 여행 중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그 주변에 도착했을 때, 시리아 수행생활과 수도승생활의 대표 격인 몇몇을 직접 만난 일이 있다. 예컨대 율리아노 사바, 좀 더 후에 친분을 맺은 베레아의 아카이오를 위시한 몇몇, 그리고 시로의 테오도레토가 그 용덕과 성덕을 칭송한 바 있는 다른 여러 수도승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단연 으뜸이 율리아노 사바였다. <시리아 수도승들의 역사>의 저자는 율리아노를 니시비의 야고보 다음 자리에 두었다. 그가 시리아 수도승생활의 창시자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 중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파 추종자들과 용감히 맞서기도 하였다.29) 물론 바실리오는 시리아 수행자들의 물리적 엄격성보다는 관상적 정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사실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으며 헬레니즘의 중용 정신으로 교육된 바실리오에게 그들의 엄격성은 본받을 대상이라기보다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5) 에우스타시오와 아나톨리아의 수행 운동

바실리오와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의 첫 번째 접촉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에서 동시에 준비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손위누이인 마끄리나가 있었으니, 에우스타시오는 그녀의 영적 안내자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에우스타시오에게 적대적이던 주교들이나 영향력 있는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타당한 여러 이유로 그를 반대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이 삼위일체론 차원에서의 이설(異說)이었다. 다른 이유들도 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우스타시오 자신보다는 그의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혼인의 가치를 몹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라든지, 지정된 경신례 장소 외에서 사제도 없이 전례를 거행하는 경향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들과 구별되는 수도복도 걸치지 않은 남녀 수행자들에게 아무렇게나 둘러싸여 호위를 받으면서 철학자들이 입던 “두꺼운 외투”30)를 걸치고 다니던 이 인물의 기상천외함과 반순응주의(反順應主意)이었다. 340년경에 개최되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정확한 시기는 추정하기 어려운 한 지역 공의회(강그라 공의회)는 심지어, 직접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를 기준처럼 여기는 이들을 겨냥하여 결정 사항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비록 비성직자들이 섞인 고위 직권자들이 발했다고는 하지만, 근거 없이 취해진 결정 사항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복음주의 경향을 띠고 자기의 주교좌 세바스테에 구호 병원을 설립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던 에우스타시오에게 존경할 만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메니아와 뽄뚜스의 추종자들은 열성적으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바실리오의 태도는 과연 바실리오라는 인물다웠다. 신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존경을 보였으며 경탄까지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서한들은 존경에 찬 우정을 맺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바실리오가 그보다 한 세대 더 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깊은 친분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은 없다. 물론 양자의 권위적 성격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에우스타시오에게 중용(misura)이 결여되었던 점이 제자 바실리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이른 바 바실리오의 ‘수도 규칙’들도 같은 어조로 쓰여졌다. 선입견 없이 읽어 보면, 명시적으로는 아니지만 대단히 분명한 어조로 에우스타시오식의 수도승생활에 거리를 두며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수도승생활의 조직자로서의 바실리오의 정신과 활동에 다양한 영향을 끼친 점들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다. 이제 이것들이 그의 개인적 견해의 형성에 끼친 직접적 결과가 어떤 것들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6) 바실리오와 그의 회 수도승생활

바실리오는, 안토니오가 근처에 살던 한 수행자의 제자로 입문하던 때로부터 65년 후에, 그리고 애초에 엄격한 은수자였던 그가 306년경부터 몇몇 제자들의 방문을 받아들이고 지도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는 50년 후에 수행 생활을 시작하였다. 빠코미오는 316년 경 갓 세례받은 다음부터 한 수행자의 삶을 따라 살기 시작했다. 323년 경에야 지원자들의 무리가 그의 주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자유선언과 밀라노 칙령, 그리고 제 일차 니체아 공의회보다 많이 앞서는 시기의 인물이다.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디오클레찌아노 황제의 박해를 겪었으며 그의 4두 통치 아래 살았다. 한편 빠코미오는 비그리스도교 농부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군문(軍門)의 시련을 겪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의 연구들은 안토니오를 배우지 못한 인물로 보던 견해를 수정해 준다. 만일 그가 남긴 일곱 개의 편지가 정녕 그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그 진위를 의심하게 하는 근거는 없거니와, 안토니오는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잘 알 뿐더러 신학적 성찰에도 능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토니오와 빠코미오가 살던 때의 이집트는 펠라(fellah)라고 불리던, 얼마만큼의 먹거리와 입을 것만으로도 쉽게 만족하던 가난하고 거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수도승생활의 기원이라고 알려진 바들과 바실리오가 시작한 일 사이의 거리를 짐작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실 바실리오는 콘스탄티노 황제 시절, 제1차 니체아 공의회 직후에,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역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지주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부유한 대지주 및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계층과 그날그날 먹고 살며 과도한 세금의 압박으로 비참하게 지내기 일쑤인 계층과의 간격은 증가일로에 있던 사회였다. 교양은 단지 유복한 계층의 전유물이었고, 비그리스도교 문화는 오랫동안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맞서는 경쟁자로 내세우게 될 것이었다. 바실리오에게 있어 수도승생활의 적응은 여러 부문에서, 그 원래적 엄격성을 완전히 상실함이 없이,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유연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의 독창적인 반은세 수도승생활(semieremitismo)은 곧 가족적 회수도승생활(cenobitismo familiare)로 선회하게 된다. <긴 규칙> 7은 원칙의 천명으로서 매우 꼼꼼하게 편찬된 것인데, 이는 <긴 규칙> 2와 견주어 읽어야 한다. <긴 규칙> 2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쓴 것으로, <긴 규칙> 7과 마찬가지로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처음에는 수도승생활과 사제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상황의 흐름에 따라 바실리오는 사제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에 주교가 된 후에는 베드로에게 사제직을 수여했다. 베드로는 바실리오의 동생으로 그의 뒤를 이어 안네시 수도원을 이끌 인물이었다. 이 수도원은 처음에는 두개의 독립된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더 오래된 공동체는 마끄리나가 이끈 공동체로, 그의 어머니 및 그 여종들이 함께 살았고, 아마도 몇몇 다른 이들도 함께 봉쇄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또 하나의 공동체는 이리스 강을 사이에 끼고 맞은편에 바실리오 자신이 몇몇 하인들만 데리고 창설한 것이다. 여기서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바실리오는 때때로 동생 그레고리오를 맞이했고, 친구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도 359~60년, 그리고 361~62년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손님으로 머문 바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수도원 체류는 몇 달에 걸친 것으로, 이 기간 동안 아마도 이 두 수행자는 <윤리 규정>의 저술을 끝내고 <필로칼리아>를 편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두 저술 작업은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둘 다 여러 성서 단락의 비교 대조를 통해 성서 해석의 전통을 재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작업은 오리게네스가 세운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되었는데, 그들은 향후로도 항상 이 원칙에 충실히 머무르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다’는 원칙이다. 하느님 편에서 보자면 영감은 단일한 것이고 구원 계획도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보는 <소 아쉐티콘>의 어조는 에우스타시오의 경우와 비슷하게 어떤 발전이 있어서, 오리게네스의 영향이 에우스타시오의 영향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바실리오가 체사레아 지역 교회의 사제로 서품되면서 다시금 깝바도치아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기서 바실리오는 얼마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에우세비오의 보좌주교로 임명된다. 이것은 바실리오에게 수행자들의 공동체를 소생시키고 나아가 창설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리하여 성 에우프시키오 마르튀리온(martyrion) 근처에 세워진 공동체는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마르튀리온을 둘러싸고 무료 진료를 위한 중요한 도시 하나가 세워질 터였는데 이것은 ‘바실리아데’라 불렸다.31)

뽄뚜스와 깝바도치아의 바실리오 수도승 공동체들(asketeria)의 규모는 빠코미오가 세운 수도원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후자는 참으로 수도승들의 마을이라고 불릴 만 했다. 바실리오 공동체들의 가족적 특성은 내적 수렴과 친교, 그리고 질서와 형제애를 촉진시켜 주었다. 에우스타찌오의 수도승생활 조직에 비해 바실리오가 행한 수도승적 개혁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우선 강그라 공의회가 탄핵한 바 있는 수행 생활의 위험과 관련하여, 그는 수행생활을 올바르게 세워 나가면서 지역 교회의 생활 궤도 속으로 다시 끌어 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교의 차원의 위험과 관련해서는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 이를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 특히 모든 수행 생활의 초석으로 삼았다.

바실리오가 취한 개혁의 이러한 노선은 심지어는 용어의 취사선택에도 적용되었다. 사실 그는 ‘수도승’(monachos)이란 용어를 말이나 글에 사용하기를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수행의 주제를 거론하면서 그가 채택한 용어는 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란 단어들이었다.

제대로 된 영성사 교과서들 안에도 바실리오의 수도승생활과 관련하여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박식한 수도승생활’(monachesimo colto)이란 말과 ‘도시 수도승생활’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표현들은 유감스럽게도 바실리오계 수도승 공동체들의 수도생활 이미지를 왜곡하였다. 뽄뚜스의 에바그리오와 같은 몇몇 뛰어난 학식의 수도자들을 제외하면32), 바실리오 공동체에 몸담고 살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헬레니즘 문화나 여타 세속 문화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의 <규칙>들을 글자대로 해석한다면, 심지어 성서조차 거의 항상 장상이나 장상의 대리자, 혹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수행자들의 말로 중개되거나 조건을 붙여서 전달되었다.33) 물론 수도원에 입회가 허락된 젊은이들에게는 성서 문학의 초보적 지식을 배우도록 장려했다.34) 누이 마끄리나의 지도로 인문학적 지식을 배웠던 바실리오의 동생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다. 이 수행자들의 종교적 교양 수준에 대해 현대의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은, 흔히 그리스도인 생활의 열쇠를 발견하기 위해 바실리오가 성서를 탐구하면서 남긴 수많은 훈계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체로 한결같이 사제들이나 영적 지도를 맡은 수행자들에게 행한 것이었다. 요컨대, 깝바도치아의 수도승 조직을 두고‘박식한 수도승생활’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것이 바실리오처럼 박학한 이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옳지만, 그 구성원들의 평균 지적 수준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복음적 수도승생활’이라는 말이 사실에 한결 부응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부정확하기로 말하자면 ‘도시 수도승생활’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선입견 없이 그의 <규칙>들을 읽어보면 바실리오의 감독 아래 살던 대부분의 수행 공동체들이 흔히 큰 마을에 자리 잡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거주 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의 사가들은 발렌테 황제가 분할하기 전의 깝바도치아에는 단지 체사레아와 티아나만이 로마 제국령의 두 도시였음을 알고 있다. 한편 바실리오가 총독 엘리아에게 보낸 372년의 편지는 ‘바실리아데’에 대해 말해 주는 주된 문헌인데 자주 잘못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바실리아데에서 병자, 행려자, 가난한 이 및 다른 여행자들을 보살피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도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바실리오의 말처럼 수백명의 수도자들이 “간호사, 의사, 마부, 경비인력” 등 어떤 직업이나 기술에 전문 인력이 되어 종사해야 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삶에 필요한 모든 직종이나 삶을 쾌적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활동”도 수도자들이 해야만 했을 것이다.35) 주교관에 ‘마르튀리온’이 있었고, 이를 수행자들의 거주지가 둘러싸고 있었다. 이로써 소수의 “하느님의 종들”이 있어서 무엇보다도 전례기도에 종사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진료 활동을 감독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36) 물론 몇몇 경우에는 직접 환자 간호를 도울 태세가 되어 있기도 했을 것이다.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에게 보내는 편지 79와 119는 ‘바실리아데’의 운영을 돕기 위해 체사레아의 주교에게 파견한 제자들로 단지 세 명의 이름만을 밝히고 있다. 사제 엘레우시니오(편지 79,4-5), 그리고 바실리오와 소프로니오 형제들(편지 119,12; 119,37)이다.

물론 바실리오의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일정 시간 손노동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37) 그러나 수도자 생활과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 일들은 몇 종류 되지 않았다.38) 세상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분리되는 일 역시 바실리오 수도승생활에 근본적인 것이었다.39) 따라서 예컨대 재봉 일이나 신발 제작 등의 일은 허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도에 맞게 분별해서 할 일이었다. <규칙>의 문맥은, 이렇게 일들을 해야 할 것과 해도 되는 것,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직접 환자들이나 여행자들을 맞아들이는 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수행 생활에 관한 어떤 비전이 있어서 거기에 토대를 두고 생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준다. 그 뿐 아니라 바실리오가 거대한 자기 교구의 마을들 안에 스스로 세웠거나 감독한 구호소들은 보좌 주교들의 직속 관할 아래 있었다. 이 보좌 주교들을 지역 성직자들이 보조했고, 이들 중 몇몇이 수행자이거나 동정자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각 구호소의 중요성에 따라 전문적 훈련을 받은 자질 있는 평신도가 필요했다. 요컨대 성직자나 수행자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요구에 직접 나서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리 되면 하느님 말씀의 강론이나 성찬의 전례, 다른 성사 집전 등, 그들 고유의 기도봉사나 영적 소임이 너무 소홀히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회복지 차원의 구체적 문제들에 관해 바실리오나 바실리오의 대화 상대자들이 비교적 말이 적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0)

편지 207이나 295가 보여 주듯이 바실리오의 공동체들은, 그들의 정당하고도 칭송받을 만한 내부적 차원이나 애덕 실천 차원에서의 적응을 제외한다면, 더 고전적이라고 여겨지는 수도승생활의 형태와 대단히 닮은 바가 많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바실리오의 수도 생활 조직을 일컬어 ‘도시 수도승생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모순을 안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이 모순을 예방하거나 교정하기 위해 다른 표현을 써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컨대, ‘손님 환대의 수도승생활’이라는 표현은 베네딕도회의 손님 환대 전통의 뿌리들 중 한 부분을 재발견하게 해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을 것 같다.


II. 바실리오와 수도승적 가르침

이제 바실리오의 저술을 통해, 이미 백 년 전부터 형성되어온 수도승 조직의 바실리오적 적응이 수행 생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자.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이미 그 윤곽이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신에 있어 그토록 복음적이었던 바실리오였기에, 몸소 체험한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칠 수 없었으리란 사실 때문이다. 결국 그의 가르침은 체험의 결정(結晶)이었던 것이다.


1. 가르침의 형태

체사레아의 바실리오는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서문의 형태, 그리고 특히 대화의 형태를 사용하여 전개하였다. 서문들 중에서 많은 것은 신앙 고백이거나 신앙을 부각시키는 문헌이다. 필자는 이를 서문의 형태 (forma prologale), 대신적(對神的) 형태(forma teologale), 대화적 형태(forma dialogale)와 같은 세 가지 표현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 신조어들은 다소 과감하게 만들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문헌학적으로 뒷받침이 가능한 것이다.

바실리오는 자신이 신약 성서를 주제 별로 분류하여 모아놓은 것에,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고 집성한 것인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지닌 유일한 문헌이라는 뜻에서, <윤리 규정 Regole morali>이라는 이름을 붙였다.41)

1) 서문의 형태

이 작품은 바실리오가 선택한 성서 구절로 이루어져 있고 각 항목 마다 짤막한 논술이 붙어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띠는 성서 사화집(詞華集)이다. 이 작품은 최초로 편찬되던 때부터 서문이라는 문학 양식으로 된 글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바실리오나 다른 깝바도치아 교부들의 시대에 ‘서문’의 구조는 대단히 중요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보통으로 글쓴이들은 그의 작품 전체를 가장 객관적으로 해석하게 해 주는 열쇠를 바로 이 서문에서 제공하였기 때문이다.42) 물량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윤리 규정>의 첫 머리에 나오는 세 서문들은 그것만으로도 30쪽 정도를 차지한다. 우선 수행 저작집의 두 번째 판에 붙이는 해제에 해당하는 것이 맨 먼저 등장하는데 제목은 “수행의 개략적 묘사(ipotiposi)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에 대하여” 쓴 서문이 나오는데, 이전에는 “화합에 대하여”로 불렸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동방의 여러 교회들에 퍼져 있던 불화에 대한 꾸짖음을, 그리고 중재를 위한 시도를 일종의 미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신앙의 와해와 교회적 몰락이 도래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앙에 대해” 쓴 서문이 이어진다. 이것은 수신인이던 수행자들의 재촉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바실리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 관심사를 드러내 주고 있다.

서문이라는 문학 양식은 이미 고대 비그리스도교 세계에 알려져 있었지만 특히 4세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양식이 바실리오의 바로 이 작품의 역사적 상황을 짧게 묘사해 주며 그의 저술 목적을 밝혀 주고, 나아가 작품의 주요 내용을 가능한 대로 요약하고 있다. 물론 제목과 기본 분류 역시 대략 설명이 되어야 한다. 시작부터 바실리오의 의도가 독자의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처신을 위해, 요컨대 복음적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은총과 신구약 성인들의 모범을 힘입어 진보하도록 실용적인 ‘유익’을 제공하는 데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소 아쉐티콘>의 서문43)은 라틴어 역본에서 역자 루피노가 붙인 해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서문은 바실리오가 사제임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에게 “말씀의 봉사직”이 주어졌고, “아버지에게 물어 보아라. 그가 알려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들이 말해 주리라”(신명기 32,7)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스스로를 전통의 진정한 증거자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수행자들이 ‘최고-그리스도인’(super-cristiani)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노심초사 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각자의 필요에 맞게 조절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있었다. 기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님의 몇 가지 계명에 대해 가르쳤지만 완덕에 더 나아간 이에게는 다른 계명들을 더 제시하였다. 여기서 ‘계명’이라는 말은 바실리오에게 “복음과 완전한 삶의 신앙과 진리”를 뜻한다. 성당에서 거행되는 밤기도가 끝나면 바실리오는 복음화라는 그의 의무를 수행자들에게 실천하기 위해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그런 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기를 기구하는 기도로 마무리하였고, 그의 청중들을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전망 속으로 끌어 들였다.

바실리오는 <짧은 규칙>의 서문에 영감의 근원을 두고 <긴 규칙>에도 또다른 서문을 달았다. 이것은 전자보다 더 길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실리오의 주된 염려가 삼위일체 신앙을 분명히 설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더 후대인 약 372~375년에 쓰여졌으며, 청중들이 온전한 수계 생활을 하도록 촉진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실리오는 레위기 22장 17-25절의 한 계명을 우유적으로 해석하면서“결함이 있고 절단된 것은 비록 깨끗하다 해도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없다”44)고 말하였다.

독창적이지 않은 것은 <짧은 규칙>의 서문뿐이다. 이것은 <소 아쉐티콘>의 첫째 부분을 후에 다시 쓴 것이며, 청중의 주의를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스승인 전통에 집중시키고 있으며,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함”(시 1,2)에 집중시키고 있다.

바실리오 문학의 다른 형태들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많은 서문들이 콥트어로 번역되어 익명 저자의 소품으로 전해져 옴을 언급해 두자.45) 이 서문들은 독자들이 작품의 영성적 윤곽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의 겉표지와 같다.

2) 대신적(對神的 teologale) 형태

서문 <신앙에 대해>46)는 372년 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한 수행 공동체가 바실리오에게 신앙 고백문의 편찬을 부탁했는데, 이 서문은 이 공동체에게 주는 편지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47) 앞에서 다룬 서문<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와 같이, 여기서도 바실리오는 자기가 제시하는 대답의 의미와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에우노미오 및 여타의 이단자들과는 달리 신앙 고백문에 성서와 동떨어진 인간적 표현들을 삽입하지 않는다. 그의 수행자들의 세례 신앙도 헤매는 일이 없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그 신앙에 굳건해 지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수신인들의 수준과 교양에 따라 여러 형태의 삼위일체 신앙 고백 양식들을 사용한 점이 이해된다. 또 이 신앙 고백문 앞에 붙인 전문(前文)에서는 신적 신비의 의미에 대한 언급과, 하느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영감 받은 성서 역시 하느님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지식만 전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신앙 고백문은 대신적이고 삼위일체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항목은 당대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서 대단히 간략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동정 마리아 태중에서 사람의 형태를 취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한 항목과 성부와 성자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예배와 영적 흠숭을 바치는 유일하신 성령께 대한 항목에 많은 자리를 할애하고 있다.48)

이러한 삼위일체적 전망에서 바실리오는 제자들로 하여금, 잠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떠나 결코 지나가 버리는 법이 없는 사랑에다 온 힘을 쏟으라고 훈계한다. 이 사랑은, <윤리규정> 80에도 유사한 언급이 있거니와, 신앙에 뿌리를 둘 때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특성”이 되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49)

3) 대화적 형태

바실리오가 수행 저작집에 문답의 구조를 도입하기 이전에 이미 이 문학양식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짧게 잡아도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산파술’(maieutica)과 플라톤의 <대화>까지는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같이 성서주석, 신학 및 철학의 여러 분야에서 이 양식을 사용하였다. 곧 바실리오는 이 저술 방식을 애호하게 되었다. 그 생동적이고 간결하며 인격간의 통교를 촉진시키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꼭 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여러 형태의 교리교수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사실에 있어 이 대화의 형태는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윤리규정>에서 대화는 외형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대화다. 여기서 묻는 이는 성서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바실리오이고, 당신의 성령이나 혹은 어떤 사도를 통해 그에게 대답하는 이는 주님이시다. 명시적인 질문은 단지 띄엄띄엄 나올 뿐이지만, 모두 <윤리 규정> 80,22의 저 유명한 질문 “무엇이 그리스도인 본연의 것인가?”로 끝난다.

<소 아쉐티콘>의 기원이 바로 이 대화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실리오가 여러 공동체, 특히 뽄뚜스의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제자들과 가진 여러 차례의 상담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맨 먼저 나오는 질문들의 배열부터가 벌써 저자 바실리오의 의도를 보여 준다.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먼저 강조하고 있다. 즉 준수할 계명들에 순서가 있으니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요 둘째가 하느님 안에서의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긴 규칙> 첫째 판에 나오는 대화의 구조는 부분적으로는 문학적 허구인데, 전문가들은 수행 저작집의 두 번째 판의 들머리에 놓였던 55개의 <긴 규칙>들이 그러한 첫째 판의 개작이라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다. 반대로 313(혹은 318500)개의 <짧은 규칙>들은 그 현실성과 꾸밈없음으로 보아 원래부터 대화였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란 사실을 드러내 준다. 의사소통이라는 이 도식은 스승 앞의 제자 혹은 영적 아버지 앞의 수행자의 상황에 매우 잘 부합한다. 이런 용법은 요한 까시아노와 제르마노가 에집트의 수행자들과 가진 대화를 기록한 <담화집>에서도 발견하거니와, 익명의 저자가 쓴 <스승의 규칙서>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2. 성 바실리오 특유의 공헌

이 글의 첫 번째 부분에서도 강조했듯이, 교회 전통 일반과 같이 수도승 전통도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되기도 하고, 기억과 동시에 현재화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전통은 미래를 향한 전망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4세기 후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뿌리가 지닌 심원함과 생명력에 대해 바실리오 만큼 깊이 확신하고 있던 이는 없었다. 그 뿌리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쇄신하시는 예수의 성령께서 이루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바실리오를 ‘혁신가’라고 보지 않았다. (그에 대해 우리가 지닌) 몇 가지 의혹을 그가 알았더라면 아마도 깜짝 놀랐을 뿐 아니라 흥분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개혁가’란 호칭쯤은 겸손히 받아 들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바실리오 본인은 십중팔구 수도승 카리스마를 새로운 시대와 지역의 상황에 적응시킨 홍보가나 조정가라는 더 겸손한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수도승 카리스마, 혹은 수도승 전통의 중요한 요소들이 그의 저작들에서 쉽게 발견된다는 말이다. 이미 안토니오와 빠코미오, 그리고 고대 수도승생활의 다른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수도승생활의 이상과 조직이 태동하던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주목을 끄는 상이점들이 있다면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나 정도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빠코미오의 회 수도승생활은 이미 성서에 매우 근접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H. 바흐트가 기꺼이 인정하듯이, 바실리오는 복음서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일한 ‘규칙’으로 보며 더욱 가까이 따르고 있다.51) 은수자였던 빠코미오는 후에, 어쩌면 바실리오보다 더 과격하게, 은세 수도승생활에 대한 반대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바실리오는 은세 수도승생활과 회수도승생활을 ‘화해’시키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규칙>들에서도 그러하거니와52), 수도 공동체 주위에 은수처들을 세웠고 또 이 점에 대해서는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가 말해 준 바 있다 - 침묵과 내적 수렴을 엄격한 훈계로 보호하는 등, 실제에 있어서도 그러했다.53) 바실리오는 교회들이나 수행자와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형제회’(fraterni)라는 이름으로 즐겨 불렀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정신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혈족관계를 강조하고 수도승들이 교회에 활발히 편입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벌써 빠코미오가 복음의 문체에 따라 자연스레 자기 수도승들을 ‘형제들’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데 바실리오는 더 의도적이고 결정적인 강조와 함께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의 공동체들이 교회의 주변부에 위치한다는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달라진 강조점들을 부각시키면서 (수도승생활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이상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저런 점에 대한 연속성을 더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애덕의 수위권(首位權)은 이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와 과거보다 더 잘 운영되는 손님맞이를 요구하게 되었고, 더 인간적인 노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주축으로 삼는 수도승생활의 근본적인 엄격성이 없어지지는 않았다.54)

이미 보았거니와 건전한 신앙은 이미 은수자 안토니오와 쥴리아노 사바도 강조하고 있었다. 전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고 후자는 안티오키아에서 아리우스파 이단과 맞선 바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실리오는, 바울로 사도와 복음서가 남긴 길을 따라, 더욱 명확하게 이 정통 신앙을 모든 수행 생활의 사부요 토대로 삼는다. 40명의 세바스테 순교자를 현양하면서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하였다: “박해와 매맞음, 화형 같은 것을 당하지 않고도,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려 애쓰는 (그리스도교 수행자는) 순교자와 동일한 보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 받을 것이다.”55)

눈길을 더 끄는 강조점의 이동도 보인다: 이집트인들의 영웅적 수행과 시리아인들의 과도한 수행 앞에서 바실리오는 엄밀한 의미의 영적인 싸움을 위해 모든 종류의 물리적인 극단주의를 거부한다. 그 영적 싸움이란 곧 절대적 순명56), “끝없는 사랑”57), 그리고 “하느님의 허락(beneplacito)”58)이다. 전례 기도가 길지 않다는 점은, 기도 회수가 잦고 집중적이라는 점으로 보상된다. 그는 대다수의 형제들이 빨리 주의가 산만해 지고 만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의 기억’에 대해 가르쳤다. 성독(聖讀), 육체노동, 강론의 봉사와 성사집전 등 일상의 여러 활동을 통해 끊임없는 기도의 상태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각자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받은 제 고유의 선물을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내어 놓도록 초대된다. 사유의 포기에 있어서 바실리오는 빠코미오를 이어, “한마음 한뜻”을 지니던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 공동체를 모델로 삼았다.59)

바실리오는, 이미 누이 마끄리나의 부탁을 받은 바도 있었거니와, 이 깝바도치아 수도원의 여성 공동체도 물론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는 신중하고도 형제애로 넘치는 지혜로운 조언을 남긴 바 있다.60) “동정녀들의 수도회”에 대한 그의 배려는 이코니오의 안필로키오에게 보낸 편지 119,18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서약에 불충실하게 된 동정녀들에 대해 쓴 것이다. 여기서 바실리오는 영적 아들이자 중요한 대도시의 주교였던 안필로키오에게 입회 연령에 대한 규정(16~17세)과 시험기, 그리고 동정에 대한 공식적인 서원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편지의 다음 항목은 남자 수도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참된 성소 식별을 돕기 위해 위와 유사한 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는 덜 엄격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시대에 남성에 대한 가정으로부터의 압력의 위험이 여자의 경우보다 적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바실리오가 에우스타시오에게서 물려받은 부분이 얼마나 되며, 또 반대로 그의 영적 유산 중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부분이 얼마나 되는 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편지 1과 223), 처음에는 찾아다니던 모범과 자극을 에우스타시오에게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경험을 가진 후, 에우스타시오가 지닌 결함과 분별력의 결핍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그의 저술들에서 어떤 거부적 반응의 징후들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것들은 흔히 방어나 반대를 담고 있다. 의도적인 자기 소외로부터 교회 안에 절대적으로 편입되는 입장으로 건너가는 태도 등은 그 예라 하겠다. 심지어 바실리오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마저 단순히 세례받은 사람과 수행자 혹은 동정녀를 구분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61)

비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전-메쌀리아니즘 추종자들이라 불리던 특정 부류의 그리스도인들도 과소평가했던 육체노동은, 공동체에서 바실리오계 수도생활 조직의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였다. 노동은 단지 공동체가 먹고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형제적 사랑의 목적으로 실천되었던 것이다.

집에서 사사롭게 거행되는 전례와 수행자들이나 동정녀들이 대중적 성지순례에 참여하는 일 등은 대단히 권장할 만하지 못한 일로 나타난다. 이 경우 너무 자주, 미심쩍은 만족감이 일탈 행위들과 뒤섞이게 마련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옷’ 역시 짐짓 아무렇게나 입음으로써 혹은 우아하게 차려입음으로써 남들과 구분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했다.62) 바실리오의 균형 잡힌 태도는,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심지어 침묵으로써도 드러난다. 몇몇 수행자 집단에서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던 ‘엔크라티즘’의 과도한 행위들 앞에서63) 바실리오는 동정의 특전을 지나치게 현양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복음적 완덕이란 미명 아래 혼인의 가치가 격하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그는 동정 생활의 실천을 고무하는 일을 동생 그레고리오에게 맡기게 될 것이었다. 기도와 관상 생활에 대해 가히 극단적이라 할 그의 신중함은 많은 경우, 메쌀리아니즘적 ‘영적 인간들’의 극단성을 암묵적으로라도 승인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세례와 다른 성사들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선포하려는 의지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이 성사들이야말로 성령을 전해 주고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시야에서 바실리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형제 공동체의 공동선에 수행자의 카리스마를 종속시킨다. 수행자들에게 보낸 편지 295는 필자가 보기에 바실리오의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헌 중 하나이다. 여기에 수도승생활에 대한 그의 구상과 이상의 근본 주제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64) 이 글을 읽고 또 읽노라면 그의 정신을 잘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적응을 위한 바실리오의 노력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서, 그가 통합된 기질과 집요한 성격과 함께 완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는 “기질상 나는 완전하지 못한 것은 다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65)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다: “단 하나의 계명에 대해서라 할지라도 주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직무에 태만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소홀히 하는 것이 전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거의 도달한 것은 사실 조금도 도달하지 않은 것이다.”66)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죽마고우의 수행 저작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창조하고, 때로는 모방했으며, 때로는 그 너머로 전진했다.”67)

바실리오의 고유한 공헌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실리오 보다 더 수도승생활을 세례 신앙의 확신에다 뿌리를 두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바실리오 보다 더 잘 수도승생활을 형제적 생활의 친교로 변화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두 가지의 공헌이지만, 영감의 원천은 유일하다. 왜냐하면, 전반적인 수도승 전통에서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요 마침이시기 때문이다.68) 이는 바실리오 자신이 다음과 같이 확언한 바와 같다: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라지지 않은’ 삶이다.”69)

(코이노니아 제26집 86쪽, Jean Robert Pouchet, 이연학 요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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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EAN-ROBERT POUCHET, OSB oliv.는 프랑스 마일리스 수도원 수도승으로, 현재 Roma의 “Augustinianum”과 “L’istituto Orientale” 교부학 교수(성 바실리오 전공)이다. 이 글은: “Tradizione monastica e Monachesimo contemporaneo”, Atti del XIII Incontro di Monte Oliveto 10-12 Settembre 1996, pp.11-33 (a cura di D. Donato Giordano, OSB)에 게재된 것인데, 저자의 허락을 받아 고성 수도원 이연학(요나) 신부가 옮긴 것이다.

2) 여기에 제시되는 자료 대부분의 출전은 바실리오의 서한집이다. 이에 관해서
는 필자의 Basile le Grand et son univers d’amis, d’apres sa correspondance, Roma 1992, 591-592를 참조.

3) Gregorio di Nissa, Vita di santa Macrina, Sources Chretiennes (=SC) 178, 52-53과 160-165(조모 마끄리나의 손녀요 바실리오의 손위 누이인 또 다른 마끄리나의 전기의 여섯 번째 단락임) 참조.

4) Gregorio di Nazianzo, Discorso 43, Orazione funebre di san Basilio, SC 302, 124-133(5-8) 참조 (앞으로 D 43으로 약칭함.)

5) 편지 204와 223,3참조. 바실리오의 서한집으로는 Y. Courtonne의 비판본 saint Basil. Lettres, I, II, III, coll. Universite de France, Paris 1957, 1961, 1966을 사용했다.

6) 편지 210, 1, 13-24.와 편지 204, 6, 1-7도 참조.

7) Discorso 43, 9, 1-8. SC 302, 132-133.

8) 편지 59, 1,8-13 참조. Basil le Grand..., 205-208도 참조.

9) 아리스토텔레스, Politica, 1과2 참조.

10) 바실리오, Sur l’Esprit Saint, c. 3,5와 4,6 in SC 17bis, 265-267과 269-271.

11) 편지 1 참조. “철학자 에우스타찌오에게” 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편지는 J.
Gribomont의 통찰력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J. Gribmont, Eustathe le philosophe et les voyages du jeune Basile de Cesare, in RHE 54 (1959), 115-124 참조. 저자는 여기서 수신인이 세바스테의 수행자 에우스타치오가 맞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Basil le Grand 87-93도 참조.

12) 편지 1,21-23 참조.

13) 편지 1,23-25 참조.

14) A. de Vog, Sub regula vel abbate, in S.Benoit. Sa vie et sa Regle, ed. Abbaye N.-D. de Bellefontaine 1981, 특히 160-166을 참조.

15) 편지 223, 2, 10-35 참조.

16) 2고린 4,10 참조.

17) 편지 223, 3-12 참조.

18) 편지 204와 210 참조.

19) 편지 207, 2, 9-23 참조.

20) 편지 207, 2, 37-39 참조.

21) 편지 204, 7, 1-17 참조.

22) 편지 207, 3, 18-23 참조.

23) 편지 207, 3, 18-23 참조.

24) 역주: 바실리오는 생애 말년에 수행자들을 위한 저술집을 직접 편찬한 바 있다. 이것은 세 개의 <서문>들과 <윤리 규정>, <대 아쉐티콘>, 두 권의 <세례론> 및 몇몇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대 아쉐티콘>은 아직 젊은 시절에 쓴 <소 아쉐티콘>(360~370년)의 확대판인데, 이 <대 아쉐티콘>이 바실리오 사후 <긴 규칙(fusius tractatae)>과 <짧은 규칙(brevius tractatae)>이란 제목으로 두 권으로 나뉘어 전해지게 되었다(J. Gribomont, Basilio, Dizionario degli Istituti di Perfezione, v.1, coll.1103-1105 참조). 현대어로는 U. Neri 편찬의 이탈리아어 판이 나와 있다(Opere ascetiche di Basilio di Cesarea, Torino 1980).

25)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가 쓴 <안토니오전>은 최근 G. M. Bartelink의 비판본으로 출판되었다(SC 400, 1994).

26) Kosmou anacoresis, L2, 2, 22-28.

27)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D 43, 62, 17-32.

28) 예로니모는 390년 경 <힐라리오전>을 쓴 바 있다. Cfr. F. Cavallera, S. Jerome. Sa vie et sonoeuvre, t.I, Paris 1922, pp.132-133.

29) <시리아 수도승들의 역사>의 비판본은 P. Canivet와 A. Leroi-Molinghen에 의해 편찬되었다: SC 234 (1977). 율리아노 사바에 대해서는 pp.194-244 참조.

30) 편지 223,3; 7.

31) 편지 94 참조.

32)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편지 228 및 바실리오, 편지 8 참조.

33) <짧은 규칙=PR>, 235 참조.

34) GR, 15, in medio 참조. 바실리오는 세상에 남아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방법으로 가르쳤으니, 자신의 유명한 단편 <청년들에게 Ad adolescentes>를 권했다.

35) 편지 94,35-42 참조. 36) 편지 94,29-35 참조.

37) <긴 규칙=GR> 37 참조.

38) GR 38 참조.

39) GR 5-6과 8 참조.

40) 이런 안목에서 보면 PR 286의 질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병들면 그를 구호소(xenodocheion)에 데리고 가야 하는가?” 바실리오는 이렇게 대답한다 : “각 지역의 상이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따라 공동선을 위해 정한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PR은 외래 손님을 맞는 이런 종류의 구호소를 운영하는 사람은 수행자들이라고 시사한다. 그러나 두 <규칙>은 상호 보완하여 해석해야 한다. 다른 한편, GR 55는 수도자들이 의사에게 가거나 약을 사용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만일 바실리오의 수도자들이 많은 경우 의사나 간호사들이었다면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문은 제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41) 이 문헌의 묘사나 바실리오의 수행적 저술이 지닌 다른 요소들에 대한 개략적 분석에 대해서는 앞서 나온 나의 글 L’experience, le rayonnement et l’originalite ascetique de Saint Basile. Histoire et actualite, Collectanea Cisterciensia, 54 (1992), n.1, 43-65 참조할 것이다. 이 글은 애초에 이탈리아어로 발표되었다: L’esperienza, l’irradiamento e l’originalita ascetica di San Basileio. Storia e attualita, L’Ulivo 21 (1991), n.1, 19-41. 지금의 글은 앞서의 연구에 대한 보완일 뿐이며,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42) 이 점에 대해서는 B. Studer, La riflessione teologica nella Chiesa imperiale (sec. IV e V), Roma 1989, 64-96 참조.

43) 본문은 PL 103,485-554에서 읽을 수 있다. 쟝 그리보몽 신부가 이 글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 시리아본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 J. Gribomont, Histoire du texte des ascetiques de S. Basile, Louvain, 1953, 237-254. 뚜르베시 신부의 이탈리아어 번역이 Regole monastiche antiche, Roma 1974에 실렸고, CSEL 86 (Vienna 1986)에 Kl. Zelze의 비판본이 있다.

44) PG 31,900b 참조. 이탈리아어 역본으로는 U. Neri, S. Basilio. Opera ascetica, 221 참조.

45) T. Orlandi, Basileio di Cesarea nella letteratura copta, in Rivista degli studi orientali, 49 (1975), 49-59.

46) J. Gribimont, 위의 책, 288-289 참조.

47) 이 신앙고백문의 전통적 용도에 대해서는 B. Sesboet J. Wolinski, Histoire des Dogmes, Paris 1994에서 특히 B. 세스부에가 쓴 1, 2, 5, 6장을 참조(특히 69-134와 235-304).

48) 바실리오가 작성한 여러 신앙 고백문에 대해서는 앞에 인용한 졸고 Basile le Grand 337-347에서 몇 가지를 좀 더 선명하게 설명해 놓은 바 있다.

49). 갈라 5,6 참조: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50) 대부분의 수사본들은 313개의 <짧은 규칙>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장 그리보몽은 몇 개의 수사본에서 다른 것 5개를 더 발견하고 그 진정성을 규명한 후 이를 ‘엉뚱한 항목들’(extravagantes)이라 명명한 바 있다.

51) Antonius Magnus Eremita, in Studia Anselmiana 38, Roma 1956, 95-99를 보라.

52) 은수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GR 6과, 즉시 뒤이어서 회 수도승생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GR 7을 보라.

53)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D 43, 62, 17-32 참조.

54) 필립 2,8. 바실리오는 이 점에 관해 GR 28과 PR 317에서 철저한 언급을 남겨놓았다.

55) 40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 PG 31, 508B.

56) PR 116, 152, 317 참조.

57) PR 211 참조.

58) 이것은 바실리오 수행 저작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윤리규정> 80,22 및 GR 5, GR 7 등 참조. 따로 이 주제만 다루어 나온 연구로 M. Simon, Plaire a Dieu, seoln les regles monastiques de S. Basile, Collectanea Cisterciensia 39 (1977), n.4, 234-249가 있다.

59) 사도 4,32 참조.

60) 누이와 가진 대화에 대해서는 GR 33을 보라. PR 108, 109, 110, 111과 220도 참조할 것.

6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오는 처음에 가졌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수도원이 확장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세례받은 단순한 신자와 자신의 세례의 봉헌을 더욱 철저히 실현하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는 그리스도인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애초에 견지하던 언어 용법을 일부분 수정하여, 예컨대 편지 199의 항목 18,9와 19,2 같은 곳에서 교회 안에서 특이하게 구분된 그룹들로서 ‘동정녀들의 수도회’(to tagma ton parthenon)라든지 ‘수행자들의 수도회’(to tagma ton monazont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62) GR 22와 23; PR 49와 50.

63) 엔크라티즘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영적 일탈과 이단으로서, 영지주의 이원론의 사촌쯤 된다.

64) 이 점에 대해서는 Basile le Grand. 573-574를 참조하기 바란다.

65) Omelia sulla martire Giulitta, PG 31, 241C.

66) Sul Battesimo, II,9 (init.). 67) D 43, 70.

68) 묵시 1,8과 22,13 참조. 69) GR 20, 2,9-10 참조.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6 교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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