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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07년 사순절, 천주교회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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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2-12 ㅣ No.57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07년 사순절, 천주교회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들다


올해 2013년 2월 13일은 재의 수요일이다. 그리고 3월 31일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다. 1907년의 성회례봉재수일(재의 수요일)도 2월 13일이었고 3월 31일이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다. 한편 1907년 성령 강림 대축일은 5월 19일이었다. 1907년 한국사회에서는 이 석 달 가량을 기한으로 우국충정의 진동이 소용돌이쳤다. 천주교회는 그 진동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의 핵은 대구였고, 그 가운데에는 서상돈과 정규옥이 있었다. 정규옥은 계산성당이 지어지기 전 자신의 집을 성당 건물로 제공한 사람이며, 서상돈은 계산성당의 건축 및 교구 중요건물을 짓는데 활약한 인물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은 이러했다. 1907년 광문사 부사장이었던 서상돈이 발의하여 사장 김광제 등과 함께 3개월을 약정하고 금연을 통해 일본에서 빌린 국채 1천 3백만 원을 갚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 달 담뱃값이 20전인데 한 사람이 석 달을 금연하면 60전, 이에 2천만 동포가 참여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당시 1천 3백만 원은 대한제국 1년 총예산과 맞먹는 액수였다. 그때 경향신문 1년 구독료는 80전이고, 백미 상급 한 말이 1원 15전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천주교 신자가 발의했고 여기에 천주교회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7년 5월 10일부터 9월 20일까지 경향신문만 보더라도 교우촌 44곳, 천주교 사제 2명, 천주교 신자 600여 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수원천주교회 부재열 신부와 신자 일동’이 대한매일신보에 성금을 기탁했던 예와 같이 다른 일간지를 통한 참여나 개인적인 기부를 제외한 숫자이다. 국채보상참여자에 관한 종교별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계에서는 약 88건의 참여가 드러나는데, 개신교 유력인사는 볼 수 없었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11개의 사찰에서 586명의 승려, 신도들이 참여했다.


천주교의 사람들, 대구골목 안에서 뭉쳐진 불씨

대구근대사에 등장하는 서씨들은 여러 갈래가 있다. 현재 동산언덕 아래 불천위 서침을 모시는 구암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달성 서씨들은 고려 말부터 달성, 동산, 남산, 계산동 일대에서 살던 양반들로, 서거정은 이 계열이다. 반면 서상돈 계열은 근대화 무렵 대구에 도착했으며, 그와 연관 있는 사람들은 현 계산성당과 진골목 근처를 개척했다. 서상돈 계열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신문들은 「국채보상취지서」를 보도하면서 서상돈을 먼저 내세우고 이어서 김광제를 쓰고 있다. 당시 사람들도 이 국채보상운동을 서상돈이 한 일이라고 하며, 그의 이름을 주로 거론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함경북도 단천에서 지은 ‘국채보상가’를 통해 서상돈의 위상과 그 운동의 상황이 잘 드러난다.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 대구 서공 상돈(徐公 相敦)일세 / 1천 3백만 원 국채 갚자고 / 보상동맹 단연회 설립했다네 / 면실(勉實)하는 마음 발양하니 / 대한국민 분명하도다 / 지금 우리 국가 간난(艱難)한데 / 누가 이런 열성 가질 건가? / 경상도 대구의 서공 등 / 사람마다 찬미하도다 / 대구 땅만 나라 땅이냐? / 대한 2천만 민중에 / 서상돈만 사람인가? /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 한국백성 아닐런가?”(이하 생략)

이 노래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 서상돈임을 보여주며, 그 운동에 대한 호응이 얼마나 널리 펼쳐졌는가를 알려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자로 김광제, 서상돈이라고 쓴다. 이는 김광제가 이 운동의 주도자인 듯한 인상을 주는 말이나, 이 순서는 발기문에 적힌 이름의 순서일 뿐이다. 상돈(1851-1913)은 김수환 추기경의 외가쪽 친척인데, 그 집안의 신앙과 교회사업에 대한 그의 공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행상에서 출발하여 3만석꾼 부자까지 되었고, 경상도 시찰관을 지냈으며, 대구 지역 경제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집안에는 순교자가 여러 명 있고, 그의 후손 가운데 상당수는 성직자, 수도자로 지금도 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한편 서상돈과 함께 일한 주요 인물로는 정규옥이 있다. 상인이었던 정규옥은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는 병인박해로 인해 고향 서울을 떠나 상주지역에서 거주하던 중 부친을 잃었다. 15세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처음에는 보부상을 따라다니며 장사하는 법과 요령을 배웠다. 결국 그는 각 지방의 특산물과 교역의 실태 등 경제지식을 깊게 체득하여 경상북도 영일 지방에서 건어물 도매와 무역으로 재산을 늘려갔다. 정규옥은 로베르 신부가 1891년 대구에서 추방당했을 때 자신의 대어벌(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집을 내어 놓았다. 그래서 그의 집 사랑채는 임시 성당이 되었고, 복사 이호연 및 교회 종사자들이 모두 그의 집 담장 안에서 살았다. 이 집의 대지는 1천 평이 넘었고, 당시 대구에서 관아를 제외하고 가장 큰 저택이었다. 그는 계산성당을 건축할 때 서상돈과 함께 각각 500원씩 기부했다. 이 성당이 화재로 불타자, 다시 새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 서상돈과 함께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자 이에 적극동참하며 대구지방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대구 단연회의 회원으로 특별의연금을 여러 차례 내어놓았다. 또 그는 서상돈, 김종학 등과 함께 신교육운동에도 참여하여 협성학교나 수창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정규옥의 부인 김 젤마나(1958-1933)는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집 사랑채가 임시 성당으로 사용되자, 김 젤마나는 로베르 신부가 불편함이 없도록 도왔다. 그리고 계산성당이 화재를 당한 이후 이를 새로 건립할 때는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김 젤마나는 새 성당의 종탑에 설치할 두 개의 종 중 하나를 헌납했다. 나머지 하나는 서상돈이 기증했다. 그리하여 뮈텔 주교는 1903년 계산성당의 종을 축성하면서 각각 기증자의 본명을 따라 종의 주보를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명명했다.

뿐만 아니라 김 젤마나는 1921년 300명의 회원으로 계산성당 최초 여성단체인 성모회를 창립한 초대회장이었다. 그는 신교육을 받은 막내며느리 최지홍(아네스)을 비서로 삼아 10년간 성모회를 이끌면서 매년 평균 300여 명에게 대세를 주었다. 그는 병자방문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활동으로 이름났는데, 특히 성탄절 무렵의 빈민구제 활동이 유명했다. 그는 성탄시기 어느 날을 택해 가난한 막노동자, 지게꾼, 걸인들이 많이 내왕하는 네거리마다 큰 가마솥에 떡국을 끓여 이들에게 한 그릇씩 대접하고, 옷 한 벌씩을 나눠주었다. 이렇게 대야벌의 정승지 댁에서 여러 날 전부터 수십 섬의 쌀로 가래떡을 빚는 일에 하인들은 물론 며느리들까지 총동원 되었다 한다.


남일동 부녀패물폐지회는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열고

국채보상운동에 조직을 통한 여성들의 참여와 활동도 대구, 그것도 진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진골목에는 최대 갑부인 서병국의 저택을 비롯해 방계 형제들의 집이 있었다. 즉 서병직(정소아과)과 그의 형이면서 화가인 이인성과 함께 활동한 서병기(중앙시네마 뒤 공터), 서병원(진골목식당)이 여기에서 살았다. 또한 중앙로변의 서병오와 서병규(국채보상회간부), 이외에도 서철균, 서창규, 서철규, 서병진, 서상민 등 서씨들의 집이 여기에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시민대회가 열린 이틀 뒤인 2월 23일, 진골목에서 여성 7명이 모여 남일동 부녀패물폐지회를 조직했다. 이 여성들은 각자가 소지한 패물을 폐지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경고아부인동포라」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했다. 발기인은 정운갑의 어머니 서씨, 서병규의 처 정씨, 정운화의 처 김씨, 서학균의 처 정씨, 서석균의 처 최씨, 서덕균의 처 이씨 및 김수원의 처 배씨 등 7명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인 은가락지와 은장도·은가락지·은연화 등 총 13냥 8돈의 패물을 의연금으로 냈다. 한국인의 삶 속에서 패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아기의 백일이나 돌, 혼인 등 특수한 추억이 담기는 재물이상의 물건이다. 이러한 패물을 내놓는 진정성은 이후 전국 30여 개 여성단체가 발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 여성 단체에는 서씨 성을 가졌거나 서씨의 부인이었던 여성들이 참여했음을 볼 수 있다. 누구의 부인으로밖에 이름이 남지 않았던 여성계의 근대적 사회 참여는 이렇게 그 문을 열었다.

또한 경향신문은 국채보상운동에서 천주교인들을 결집시켰다. 당시 신문의 발행인은 미래 대구교구장이 된 드망즈 신부였다. 경향신문은 “패물을 찾다 보면 집안도 정리되고 자신도 찾게 된다.”며 이 운동의 또 다른 이익을 역설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에는 로베르 신부의 격려도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국채보상운동은 이를 주도한 천주교 신자들의 사순절 절제운동 및 자선운동의 경험과 계산성당을 지으면서 체험했던 근대적 모금의 놀라운 결과를 사회로 확대시킨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생활 속에서 짚어낸 작은 실천이었기 때문에 쉽게 공감을 얻어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기생이나 감옥의 죄수까지도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신자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들을 결집해 낸 국채보상운동의 진동은 대구 이곳에 아직도 흐르고 있다. 관덕정을 개관하고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순례객들에게 정규옥 승지댁 사진을 설명하다가 정승지의 후손이라는 분을 만난 적도 있다. 또 대안동에는 국채보상운동 시발지이며 의연금을 관리했던 광문사 옛터가 있다. 현재 대성사라고 하는 절이 들어서 그 마당 안에 표지석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국민대회를 열던 북후정터, 진골목의 여성모임터, 미소시티아파트에 편입되어 새로 복구된 서상돈 저택, 고려예식장이었던 서상돈의 장남 서병조의 저택 터 등은 그 날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박해를 받던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첫 번째로 일으킨 본격적인 사회운동이요, 민족운동이었다. 당시 신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쉽게 거닐 수 있는 거리마다 신자로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심어놓았다. 사순절에 이 길을 걸으면, 그때의 정신을 특별히 더 잘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 : 마백락,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김영균)

[월간빛, 2013년 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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