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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으로 돌아온 동방 가톨릭교회6: 시리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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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28 ㅣ No.166

가톨릭으로 돌아온 동방 가톨릭교회 ⑥ 시리아 교회 (끝)


초기 안티오키아 교회가 기원

 

 

시리아 가톨릭교회의 이그나체 요셉 3세 유난 총대주교가 지난해 2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거행된 총대주교 착좌식에서 신자들을 축복하고 있다.

 

 

시리아 교회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초기 안티오키아 교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시리아 도시 안티오키아에 세워진 안티오키아 교회의 초대 주교는 바로 베드로 사도였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로마로 가기 전에 안티오키아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를 지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 역시 안티오키아였다(사도 11,26).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예루살렘,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다섯 중심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서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관할하게 됐다.

 

그러나 칼케돈 공의회 이후 이 지역 교회는 단성설 추종자들이 득세하면서 로마 교회와 멀어지게 되고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동ㆍ서 교회 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에 속하게 된다. 그러다가 12세기 십자군 원정 때에 시리아의 정교회 주교들과 가톨릭 주교들 사이에 우호 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일부 정교회 주교들은 로마와 일치하기를 바랐던 것 같지만 구체적 결실은 맺지 못했다.

 

17세기에 들어와 예수회와 카푸친회 선교사들이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고, 1662년 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면서 적지 않은 정교회 신자들이 로마 교회와 친교를 이뤘고, 이들은 시리아 교회 총대주교를 독자적으로 선출함으로써 시리아 교회는 친-가톨릭 파와 반-가톨릭 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친-가톨릭파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친-가톨릭 세는 수그러들었다.

 

이라크 모술에 있는 한 시리아 가톨릭 성당.

 

 

오늘날의 시리아 가톨릭 교회가 출발한 것은 1782년 시리아 정교회 시노드(교회회의)에서 총대주교로 선출된 알레포의 미카엘 자르베가 로마 교회와 일치를 선언함으로써였다. 그 후 자르베 총대주교는 레바논으로 피신해 가톨릭 시리아 총대주교좌를 다시 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지원을 받은 정교회 탄압으로 시리아 가톨릭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한편 레바논에 있던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알레포와 터키 마르딘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 때 아시리아 인종학살을 피해 다시 레바논 베이루트로 옮겨갔다. 이 인종학살로 당시 7만5000명에 이르는 시리아 가톨릭 신자 절반 이상이 터키 민족주의자들 손에 희생됐다.

 

시리아 가톨릭교회는 서시리아 예법이라고 부르는 고유한 전례를 사용한다. 그래서 서시리아 예법 교회라고도 부른다. 전례 언어는 시리아어다. 오늘날 시리아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20만 가량으로, 레바논을 비롯해 시리아ㆍ이라크ㆍ이집트ㆍ터키 등지에 있고, 미국과 캐나다ㆍ호주ㆍ프랑스와 수단ㆍ스웨덴 등지에서도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있다.

 

현재 시리아 교회는 지난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착좌한 이그나체 요셉 3세 유난 총대주교가 이끌고 있으며, 유난 총대주교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상주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0년 12월 2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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