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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5: 전쟁 앞에 죽음은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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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04 ㅣ No.398

[추기경 정진석] (15) 전쟁 앞에 죽음은 이어지고


눈물 삼키며 어머니를 피란 보내드리고, 전장 속으로

 

 

- 삽화=문채현.

 

 

전세 변화로 서울 시민들은 피란길에 올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절대적으로 불리해져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고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했다. 급기야 12월 6일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군의 중ㆍ동부 전선 돌파로 서울 방어도 어렵게 됐다. 연합군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했다.

 

한국 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6ㆍ25 개전 초기와 달리 이때 대다수 서울 시민은 피란을 떠났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불시에 공격을 해와 다들 경황도 없었거니와 서울에 남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3개월간 지긋지긋한 공산 치하의 생활을 겪은 이들은 우리 군의 후퇴 소식에 일찌감치 피란 보따리를 챙겨 남으로 향했다. 유엔군의 철수와 피란민들의 피란은 작전 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전황이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곧 서울도 적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서둘러 피란을 떠났다. 진석은 먼저 어머니를 피란 보내기로 작정하고 설득했다. 남쪽 끝 도시 부산이 가장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부산으로 내려가세요!” 

 

“부산?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부산에?” 

 

처음에 어머니는 혼자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들 진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따르는 어머니라 이내 당신 뜻을 꺾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진석은 일부러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로 어머니의 피란 날짜를 정했다. 성모님께서 어머니를 보호해주시리란 믿음에서였다. 

 

어머니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던 날, 진석은 한강대교 북단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몸이 불편한 막내 이모도 어머니와 동행하기로 했다. 막내 이모는 혼자서는 못 가니 어머니가 데려가야 했다. 한참을 걸으니 흉물스럽게 끊어져 있는 한강대교가 보였다. 한강대교로는 여전히 사람들이 건널 수 없었다. 잠시 후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구했다. 어머니와 이모가 간단한 피란 보따리를 품에 안고 배에 올랐다. 

 

“부산에 가 계시면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너도 몸조심하거라.” 

 

진석은 일부러 대범한 척 씩씩하게 이야기했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어머니의 마음이 약해지실 것만 같았다. 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뱃사공이 노를 젓자 어머니를 실은 나룻배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진석은 나룻배가 건너가는 내내 지켜보았다. 배가 강 건너편에 잘 도착하는 것을 보고서야 진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혼자가 된 진석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되뇌었다.

 

- 한강대교(사진 아랫부분)는 6ㆍ25 개전 초기에 파괴되어 끊어졌다. 진석의 어머니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가야 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국민병 소집 명령 받아

 

그러는 사이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17일 ‘제2국민병 소집령’이 발동됐다. 소집령에 따라 경찰과 군인을 제외한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으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했다. 정부가 6ㆍ25 직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남한 장정들이 북한군에 징병됐던 사건을 심각하게 고려한 결과였다. 

 

진석도 제2국민병 소집 명령을 받았다. 전쟁터로 떠나려니 돈이 없어 급한 대로 이웃 아주머니에게 어머니의 재봉틀을 사 달라고 부탁했다. 집안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재봉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물처럼 아끼던 재봉틀이지만 당장 돈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돈을 조금 갖고 가면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 같았다. 이웃 아주머니의 배려로 재봉틀을 팔아 급한 대로 용돈을 챙겼다. 

 

소집일인 12월 20일 아침, 진석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창경궁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소집 명령을 받은 청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지휘관들이 나서 인원을 파악하고 대열을 정리했다. 

 

“차렷! 열중쉬어!” 

 

“앞과 옆의 열 맞춰라! 잡담하지 마라!”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다루듯이 절도 있게 질서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간단한 점호와 함께 청년들은 열을 지어 출발했다. 그룹별로 인솔자를 하나씩 붙여 계속 걸어서 갔다. 온종일 걸어 도착한 곳이 덕소였다. 마치 급하게 도망가는 느낌이 들었다. 걷는 것이 조금만 뒤처져도 큰소리로 채근했다. 대열을 지킬 것을 계속 강조하면서 걷는데,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걸음은 무거웠다.

 

날이 저물었는데 얼어 있는 한강을 건넜다. 긴 대열이 오랫동안 걸어서 얼음 위에 길이 생긴 것 같았다. 

 

“와장창!”

 

한참을 걸어 뭍으로 올라온 순간, 진석의 등 뒤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진석의 일행이 강을 건넌 직후 얼음이 그만 깨져 버린 것이었다. 두꺼운 강 얼음이 깨져 나간 자리 속으로 몇 사람이 빠졌는데, 너무 위험해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빠진 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진석의 일행이 지날 때 얼음이 깨졌으면 영락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예전 자신의 옆에서 예고 없이 죽음을 맞았던 사촌 동생이 떠올라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전쟁 앞에 사람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석은 야속한 현실에 또 한 번 깊게 탄식했다. 

 

국민병들은 여주에서 충주로 계속해서 행군했다. 식사는 중간중간 간단하게 먹었지만 사실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었다. 조금이라도 먹지 못하면 걸을 수 없었고, 낙오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던 극한의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영하로 뚝뚝 떨어지는 추운 날씨와 잠자리였다. 행군하다가 다행히 민가를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요기를 하고 몸을 녹일 수 있었고, 또 바람을 막아주는 실내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밖에서 밤을 보내야 하니 추운 겨울에 고역이었다. 잘 먹지 못한 이는 잠을 자다 저세상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은 극한 상황이 되면 자신의 한계를 넘기도 한다. 일행은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루는 진석이 어느 고개를 넘어가다 행인에게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문경새재입니다.” 

 

진석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지명을 알아두었다. 답답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지역 정보를 수집하면서 행군을 했던 것이다. 

 

경상북도 의성을 지날 때였다. 

 

“쾅!” 

 

고막을 찢는 포탄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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