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수도 ㅣ 봉헌생활

성 베네딕도의 길3: 노동(Labor manuus)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400

성 베네딕도의 길 3 - 노동(Labor manuus)


‘일’에 대해 묵상하던 중 궁금한 것이 있어 아침 식탁에서 수도형제들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잠자는 것도, 노는 것도, 먹는 것도 일인가?” 형제들이 친절하게 이구동성으로 이런 대답을 주었다. “잠자는 일, 노는 일, 먹는 일 모두 일이다. 단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된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코린 1,3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살아있음 자체가 일하고 있음을 뜻하며, ‘일하는 인간’, 이게 인간의 정의이다. 하느님처럼 스물 네 시간 일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직업에서 파생되는 노동만을 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일이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노고만이 아닐 터인데, 일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 볼 만하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한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하고 끝기도를 바치는데, 무의식 속에서 거룩한 일(성무일도)이 계속된다. 새벽에 다시 의식으로 돌아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로 자신을 깨우며 이 거룩한 일은 밤에서 낮으로 이어진다. 수도승들이 미사와 더불어 하루 일곱 차례에 걸쳐, 약 4시간 동안 하느님의 일인 공동 성무일도가 만만치 않아 우리들끼리 우스갯말로 ‘중(僧)노동’ 중 ‘중(重)노동’이라 부른다. 힘들기는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 역시 매한가지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이런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RB 48,17-18) 만일 독서가 TV 보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장로들이 이렇게 수도승들을 살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 베네딕도는 이런 이들에게 적절한 일을 부여하여 놀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RB 48,23) 사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나 성독, 육체노동만 힘든게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수도생활 자체 또한 힘든 일이다. 수도승들의 모든 수행은 결국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 안에, 즉 ‘일’에 포함된다. 그러니 우리 수도승의 삶에 수행 아닌 것이, 일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수도승들에겐 일이 있다면 ‘하느님을 찾는 일’,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 하나만이 있을 뿐이며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 어느 수도승이 마더 데레사에게 ‘내가 세상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성녀의 핵심을 꿰뚫는 대답은 ‘참으로 좋은 수도승이 되십시오(Be a really good monk).’라는 말이었다. 사실 수도승은 무엇을 ‘하기 위해’, 또 어느 특정한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일정 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일이기에 수도승들에겐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이 있을 리 없다. 어찌 수도승들뿐이겠는가. 참으로 믿는 모든 이들 역시 죽는 날이 정년퇴직일이요, 그 때까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계속된다. 일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일을 한다. 일에는 귀천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까지 목수 일을 하셨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문제요, 사람이 우선이다. 만일 수도승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구히 부지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그가 하는 일 모두는 기도가 되고 그 자신의 치유와 성화는 물론 그 모든 일도 성화될 것이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을 할 것이다.”(RB 48,1)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평생 부단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일정한 공간과 시간 안에 일정한 정력과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하고 싶다 하여 결코 무한정 일을 할 수는 없다. 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있다. 공동체의 일과표에 따라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각자 부여된 일을 제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집중하여 제대로 해야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성무일도와 노동과 성독이라는 세 중요한 일은 공주(共住) 수도생활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다. 이 세 일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질서 잡힌 건강한 개인이요 공동체가 된다. 외적 질서에 상응하는 내적 질서요, 외적 안정에 상응하는 내적 안정이다. 욕심을 비우고 일과표에 따라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다.

그러나 수도승이 일선의 현장에서 물러났다 하여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지만 수도생활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을 수 없다. 살아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돈이 되든 안 되든, 좌우간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해야 한다. 믿는 이들 역시 이런 자세로 살아야 영육의 건강하고 품위 있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게으름에 빠지면 썩는다. 게으름만큼 우리 몸과 마음을 쉽게 망가뜨리는 것도 없다. 청소를 하든, 쓰레기를 치우든, 설거지를 하든, 바느질을 하든, 그 무슨 일을 하든 부지런히 정성껏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된다. 설혹 몸이 불편하여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지 못하면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는 자체도 일이다. 이런 이들은 산이나 나무처럼 존재 자체가 일이 된다. 소화 데레사의 시성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주신 ‘성녀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일 하나하나에 큰 사랑을 담아 실행했으며 이게 시성의 이유다.’라는 요지의 통쾌한 답변이 생각난다. 제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충분하다. 누구나 똑같은 일이나 육체노동에 종사할 수는 없다. 공주 수도생활은 하나의 종합예술이며 사람에 따라 일의 분야도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그 수도승에 맞는 적재적소의 일자리요, 기술 좋고 능력 있는 자들은 그에 맞갖은 일을 하여 실제 공동체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은인들의 도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수도승의 전통이나 양심상 용납하기 힘들다. 그러니 수도승들에게 적합한 일이 있다면, 수행을 방해하지 않고, 어느 정도 돈벌이가 되어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정도면 좋다. 그렇지만 수도승들의 일은 반드시 수도생활의 균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수도승의 육체노동에 대하여 성 베네딕도는 이렇게 충고한다. “그러나 만일 지역의 필요성이나 가난함 때문에 직접 추수해야 할 경우에라도 불만스러워하지 말 것이니, 우리의 교부들과 사도들처럼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들 때문에 모든 일을 적절하게 행할 것이다.”(RB 48,7-9)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삶의 진리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뿐 아니라 필히 육신의 생산적인 일도 해야 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있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불교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 말씀도 있다. 그러니 수도승들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각자의 수준에 맞게, 무리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적절히 행해야 한다. 수도원 안에서 모든 일 역시 겸손의 수행으로서, 수도승들은 이 일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기술자들은 온갖 겸손을 다하여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며, 자기의 기술이 수도원에 어떤 공헌을 하는 줄로 알고 교만하거든 지체 없이 그 기술직을 중지시켜야 한다.(RB 57,2) 또한 수도원에서 생산된 물품의 가격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탐욕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다른 세속 사람들이 파는 것보다 언제나 싸게 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것이다.(RB 57,7-9참조) 수도승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든 일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가가 그 일의 잣대이다. 수도승이 평생 부지런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에 항구할 때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RB 57,9)

[분도, 2009년 가을호, 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1,80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