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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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성 베네딕도의 길2: 하느님의 일(Opus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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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399

성 베네딕도의 길 2 - 하느님의 일(Opus Dei)


수도승의 하루일과는 성당에서 시작하여 성당에서,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찬미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수도승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마친 수도승들은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라는 찬미가와 더불어 끝기도를 바친 후, 장상의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강복을 받고 잠자리에 든다. 전통적으로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라 하며, 수도승은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리며, 수도승의 기도를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 일컫는다. 하느님은 수도승의 존재이유이자 수도승 삶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왜 기도하느냐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살기 위하여’ 기도한다고 대답한다. 이보다 간명하며 적확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하여 기도하니 수도승의 기도는 간절하고 절실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과 사랑은 저절로 기도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기도를 통해 수도승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행복의 원천이며 수도승을 살게 하는 힘이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수도승은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인지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잃어버릴 때, 영혼은 허무의 어둠 속에 무너져 내리고, 온갖 영육의 질병들이 뒤따라온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기도, 특별히 공동체가 마음 모아 바치는 공동기도는 참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RB43,3)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사실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많은 부분(RB 8-20장)이 하느님의 일인 공동기도에 할애된다. 수도승들에게 공동 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는 하루의 질서를 잡아주고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일용할 양식이다. 때때로 “답답한 수도원에서 도대체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느냐”는 신자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하느님 찬미하는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아마 이보다 더 좋은 대답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승들이기에 수도승들을 ‘찬미의 사람’이라 부른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기도인 하느님의 일은 수도승을 살게 하는 힘이다. 매일 하느님의 일이 거행되는 성당은 ‘하느님의 노래방(?)’이다. 노래방에서 세상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고 나서 개운하게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듯이,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노래방인 성당에서 하느님 찬미의 기도를 노래로 바치며 영육의 긴장을 풀고 기쁘게 공동체 생활을 한다. 수도원이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라면, 공동기도는 그곳에 끊임없이 시원하고 맑은 물을 대주는 원천이다. 수도승들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를 바치면서 세상을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한다. 더불어 하느님을 중심으로 수도공동체의 일치도 견고해지며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도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도원에서 ‘기도의 샘’이 마르고, ‘기도의 불’이 꺼지면 세상은 온통 말 그대로 황량하고 어두운 사막이 될 것이다.

수도승들의 공동기도는 찬미와 감사의 양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 올라간다. 하느님을 찬미하려 해도 끝이 없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려 해도 끝이 없다. 반대로 매사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려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다. 수도승들의 공동기도, 즉 성무일도는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필히 바쳐야 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다. 행복은 선택이다. 찬미와 감사를 선택하면 인생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뀌어 행복이 찾아오지만, 불평불만을 선택하면 인생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뀌어 불행을 초래한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에 있어서도 불평불만의 바이러스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으며, 성 베네딕도께서도 이 불평불만의 악덕을 가장 혐오했다. 수도생활을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알렐루야’와 ‘아멘’이다. ‘알렐루야’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다가, 축복된 인생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멘’으로 마감하는 삶,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는 삶이 수도승의 삶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와 성체성사는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관조(觀照)의 시간이다.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시간이요 주님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시간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시는 주님과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하느님의 일에 참례할 때 수도승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사실을 믿는다.(RB 19,1-2 참조) 그렇기에 기도하는 수도승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지혜롭게 마음이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시편을 노래한다.(RB 19,3-7 참조) 성무일도는 매 시편마다 마음과 정성을 다담아 바침으로써,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관조하는 성독(聖讀, Lectio Divina)과 다름없는 수행이다. 유별난 신비체험보다는 이런 공동전례를 통한, 평범한 주님 체험이 훨씬 건전하고 안전하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 비약이나 도약도 없고 지름길이나 요령도 없다. 잘하든 못하든 끊임없이 깨어 기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끊임없는 기도이다. ‘삶 따로 기도 따로’가 아니라 기도가 삶이 되고, 삶이 바로 기도가 됨을 목표로 한다. 수도승들은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지만, 이 셋은 별개의 수행이 아니라 긴밀한 보완관계 안에서 모두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지향하는 일종의 관조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성무일도와 성독, 노동 이 모든 것이 넓은 의미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늘 깨어 살기 위한 수행이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렇게 공동기도, 성독과 노동에 충실할 때 수도승의 삶 자체가 전부 기도로 변한다.

며칠 전 밤에 내린 비로 아침 배 밭 사이 산책길의 분위기가 참 상쾌했다. 문득 ‘하느님께는 매일이 새 아침, 새 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하느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적어보았다. “매일을, 새 아침, 새 날로 / 평생을 하루처럼, 새 사람으로 처음처럼, 살고 싶다. /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을!” 끊임없이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하느님의 일인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가 수도승들을 하느님처럼 매일을 새 아침, 새 날로, 평생을 하루처럼, 새 사람으로 처음처럼, 영원한 청춘을 살게 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주님을 노래 하리이다. 이 목숨 있는 한 내 하느님 기리오리다.”(시편104,33)

[분도, 2009년 여름호, 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진출처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2007년, 왜관 수도원 펴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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