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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3: 수많은 젊음에 빚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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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21 ㅣ No.395

[추기경 정진석] (13) 수많은 젊음에 빚을 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아남은 자의 몫은…

 

 

- 6ㆍ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학도병 이우근(서울 동성중)의 편지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적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적군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적군의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는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덥석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壽衣)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님!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를 살려두고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중략)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6ㆍ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편지다. 그는 다시 편지를 이어서 쓰지 못했다. 학생모를 쓴 채 참호에서 전사한 그의 주머니에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성가 ‘순교자 찬가’를 작곡한 이문근 신부(1917~1980)의 동생이다. 

 

6ㆍ25의 참상은 이 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숨진 그처럼 이 땅의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갔다. 진석은 늘 자신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모든 젊은이는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목숨을 건진 진석과 남은 이들에겐 먼저 떠난 젊은 목숨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수복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인천 상륙을 시도하는 아군.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혜화동 로터리에서 인민군을 목격한 진석은 이후 삼선교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식사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주먹밥과 감자 한두 개를 친척 동생과 나눠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절망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께로 귀착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만이 진석에게는 유일하게 지켜가는 일상이었다. 그래도 친척 동생과 함께 피란 생활을 한다는 것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간단한 세수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진석과 친척 동생은 어느새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귀동냥한 외부 소식이 답답한 생활에서 약간의 숨통을 트게 했다.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국군과 미군을 몰아붙여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였다. 불행 중 다행은 외국의 참전국들이 속속 부산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 에티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등 16개국이었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포함해 총 34만 1000여 명에 이른다. 한반도 국토의 10%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과 UN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전선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갔다. 모든 것이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도움을 줬던 나라들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다른 가치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고귀한 인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한 UN군 젊은 병사들 대부분은 듣도 보도 못한 이역만리 한국이라는 타국에 와서 귀한 생을 마감하거나 평생을 가지고 갈 부상을 당했다. 부산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UN군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많은 이들에게도 큰 빚을 진 셈이다.

 

한반도가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어가며 1950년의 여름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UN군과 국군이 반격을 시도했다.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이 서울로 진격하면서 서울에는 대포 공격과 비행기 공중 폭격이 유난히 많아졌다. 인민군은 사력을 다해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려는 UN군과 국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밤낮으로 울리는 대포 소리가 서울 수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진석은 미군의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서울 수복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밤이었다. 친척 동생과 나란히 누운 진석은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간신히 잠을 청했다.

 

“쾅!”

 

갑자기 고막을 찢는 것처럼 큰 소리가 들렸다. 포탄 하나가 진석이 은신해 있던 집 위를 명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지붕을 받치고 있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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