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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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 영성: 살레시오회 - 나에게 영혼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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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139

[수도 영성] 살레시오회* - 나에게 영혼을 달라

 

 

왜 살레시오 수도회인가?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왜 창립자 돈(don : 사제란 뜻의 이탈리아어) 보스코의 이름을 따 ‘돈 보스코 수도회’라고 하지 않고 ‘살레시오 수도회’라고 지었나요?”

 

돈 보스코에게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프란치스코 드 살, 1867-1622년) 주교는 각별한 인물이었다. 돈 보스코(1815-1888년)보다 앞서 살았던 프란치스코 드 살은 당시유럽 교회 안에서 널리 공경되던 성인이었다. 특별히 그가 남긴 겸손과 온유, 친절과 인내, 사목적 열정과 낙관주의는 돈 보스코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결국 돈 보스코는 수도회를 창립하면서 수도회 수호성인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수도회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하게 된다.

 

 

돈 보스코는 누구인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는데, 아이들 표현대로 ‘살짝 맛이 간다.’ 거금을 들여 선물공세를 펼치기도 하고, 잠깐의 만남을 위해 천리 길도마다 않고 달려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한다.

 

돈 보스코가 그랬다. 그는 한마디로 ‘청소년에 미친’ 사람이었다. 실제로1841년 사제가 된 돈 보스코에게는 여러 ‘물 좋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모두 마다하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이로 내려간다. 이런 그를 두고 동료 사제들은 미쳤다고 했다. 교구 관계자들은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돈 보스코가 살았던 1800년대 토리노시 주변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농촌인구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많은 도시빈민이 양산되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일터로 나서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은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나의 목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을 지닌 돈 보스코는 토리노 거리를 뛰어다니며 청소년들을 만나고, 오라토리오에 초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경험을 쌓아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를 ‘예방교육’이라 일컫는다.

 

 

청소년들과 함께 성화의 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돈 보스코는 시대를 앞서 산 성인이었다. 그는 성화의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수많은 그의 청소년들과 제자들이 돈 보스코가 제시한 아주 쉬운 방법을 통해 성덕의 길로 나아갔다. 돈 보스코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자신의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깜짝 놀라 반문하는 청소년들에게 돈 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애야, 성인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하루하루 기쁘게 사는 것, 네게 날마다 주어지는 일과를 충실히 행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돈 보스코는 1835년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신학교 복도에 걸려있던 다음의 글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요 지침이 된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돈 보스코는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까지 말하면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강력한 열정을 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명확하게 구현하였다.

 

돈 보스코의 이러한 마음은 그가 청소년들과 함께 기도하고, 뛰놀고, 공부하고, 생활하던 ‘오라토리오’(일종의 기숙 기술학교)라 부르는 삶의 현장에서 활활 타올랐던 그의 사목적 사랑과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이런 어록들이 눈에 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우리 수도회는 큰 영광을 이룬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살레시오회 위에는 하늘에서 풍성한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본능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웠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강조했다. 말보다는 실제를 중요시했다. 행동 없는 신앙을 믿지 않았다. 생활과 동떨어진 복음도 믿지 않았다.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했습니까?

 

이토록 활동의 성인이었던 돈 보스코였기에 그의 시복시성 과정에서 큰 암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족한 기도’ 문제였다. 반대편 사람들은 집요하게 이 한 가지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일의 노예였던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한평생 활동으로 충만했던 돈 보스코가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기도라는 주제는 수도회 창립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돈 보스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본적인 기도마저 소홀히 한 사람을 어떻게 성인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시복시성 조사 과정이 진행될수록 뜻밖에도 돈 보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발베리 신부는 증언했다. “돈 보스코는 삶의 순간마다 기도하고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그가 층계를 오르내릴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늘 봐왔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여행 중에는 원고를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언제 돈 보스코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돈 보스코는 꽤 현실적인 사람, 외적인 활동에만 전념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들을 - 가난한 청소년의 영혼 구원, 영적 생활, 하느님과 일치하기 -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활동하는 관상가’였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수사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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