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용서와 기도, 그 아름다운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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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3 ㅣ No.587

[허영엽 신부의 ‘나눔’] 용서와 기도, 그 아름다운 기적

 

 

얼마 전 예전에 받은 편지들을 정리했습니다. 누렇게 색이 바랜 편지지 위에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노라면 추억에 젖게 됩니다. 그 중에서 아주 오래 전에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형님 신부님에게 쓴 것이고 또 하나는 형님께서 나와 동생 신부에게 쓴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형님 신부님은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에 빠져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형님! 건강하게 치료를 잘 받고 계신지요? 지난달 L신부와 함께 형님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회복하여 술 없이 사는 형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로를 삼았습니다.

 

형님은 저희 동생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늘 자상하고 정이 많은 형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형은 제가 어려서부터 신학교 생활을 했기에, 방학 때만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방학이 끝나 신학교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꾸려 놓은 형의 짐을 보고 학교에 가는 날에는 왠지 슬프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형과의 추억은 나에게 잊지 못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던 초창기에는 몸이 자주 아팠습니다. 그럴 때면 형이 내 방에 내려와서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때 형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동생이 신학교에 들어 온 뒤에야 형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 영민이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날은 몹시도 추웠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1학년 신입생들이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동생의 얼굴을 찾고 있었습니다. 겨울 코트도 입지 않은 채 양복만 입고 추워서 손을 호호 불며 떨고 있는 영민이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마음이 몹시 안타깝고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아픈 나를 바라보던 형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지난주 가족 치료 때 사회자가 저에게 형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로서의 형을 연민의 정으로 아무런 원망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돌아와서 깊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저는 형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마음 깊은 곳에 분노와 회피하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형에 대한 혹독한 소리가 들려와도 귀를 막고 못 들은 척하며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형이 술을 끓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사제로 불러주신 그분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그 전의 형님 모습으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 동생 영엽 드림

 

얼마 후, 형 신부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작은 노트에 깨알같이 쓴 편지였습니다.

 

영엽, 영민아 받아보렴. 성주간 예절과 본당 사목에 얼마나 수고가 많니? 덕분에 나는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오랜만에 일요일을 맞아 미사도 참례하고 휴식을 보내고 있단다.

 

이곳에 처음 와서 일주일간은 폐쇄병동에서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지냈단다. 세평 정도의 좁은 침실에서 생활했고,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식사 후 30분 정도 뿐인 부자유스러운 생활이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의 개방병동으로 옮겼고, 매일 7시간의 치료를 받지만 산책과 가벼운 운동도 할 수 있어 그전보다 훨씬 좋다. 무엇보다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게 기쁘다. 이제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지난 16년간의 생활을 보속하고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성찰해보니 무엇보다 음주로 인해 그동안 홀로 계신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 가장 큰 회한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수치심을 주었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또 나에게 쏟아지는 수군거림과 비웃음 역시 무척이나 괴로웠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을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심적 고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의 안정과 평온 속에 치료에 전념하려고 한다.

 

술 없이 다시 태어나리라는 희망을 갖고 새롭게 살고자 한다. 지금의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내가 죽기를 기도해주렴. 어머님께 자주 연락하고 뵙도록 해라. 그럼 기쁜 부활을 맞이하기를. 형으로부터.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가 아닐까요? 특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라” 어쩌면 용서한다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용서하고 기도하는 것,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우선 나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살았는가? 부모님과 가족들, 또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는 나 자신일지 모릅니다. 형님 신부님은 분노와 슬픔을 거두고 자신을 있는 받아들이고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사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코 술을 끊지 못할 것 같았던 형님이 새롭게 태어난 가장 큰 힘은 어머니의 묵주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간절한 묵주기도가 자신을 용서했던 형에게 더 큰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용서하고 기도하는 것. 어려워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님을 위해 이어지던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 기도를 나직이 따라해 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8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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