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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탐욕은 악습의 우두머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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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3 ㅣ No.586

[레지오 영성] 탐욕은 악습의 우두머리입니다

 

 

방안 구석구석에 고인 낮 더위의 잔재가 뜨거운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을 괴롭게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방에 맘 놓고 에어컨을 팡팡 틀기도 뭐하니 더 그러네요. 이런 느낌이 단원 분들께도 예외가 아닐 듯해서 재밌는 얘기로 서두를 열어봅니다. 잠깐이라도 더위를 잊게 되시길……

 

어느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사건의 발단은 한 아가씨가 경로석에 앉는데서 비롯됐습니다. 방금 지하철에 오른 할아버지는 그 모습이 언짢으셨지요. 그래서 “여기는 노약자와 장애인 지정석이라는 거 몰라?” 그런데 아가씨의 답이 가관이었답니다. “저도 돈 내고 탔는데 왜 그러세요?” 히히…… 이쯤이면 말문이 막힐 법도 한데 우리네 할아버지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이 자리는~~~~ 돈 안 내고 타는 사람이 앉는 자리야!”

 

결말은 모릅니다. 다만 그 얘기를 들으며 재미있다고 킬킬댄 일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다 여기는 우리네 사고방식의 민낯을 보여주는 씁쓸한 이야기라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린 일이 문득 부끄러운 겁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나만 불행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웃을 그리고 세상을 불행으로 이끌어가는 욕심에 대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욕심, 즉 탐욕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의미합니다. 재물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질서한 폭력적인 욕구의 표현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는 횡포까지 불사하는 행위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불의일지라도 망설임 없이 행하는 무지막지한 마음을 뜻하기도 하는데요. 한마디로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인색한 삶이라 하겠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영혼과 정신의 유익에는 전혀 무관심해져 버린 상태가 바로 탐욕인 것입니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분명히 밝혔을 텐데요. 이를테면 물질을 소유하는 것에 우선권을 두고 지낸다면, 점점 더 돈에 대한 욕심이 커지고 있다면 탐욕의 손길에 사로잡혔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돈이 악은 아니지만 돈에 집착하는 마음은 악

 

문제는 우리들이 탐욕은 악습이며 죄악이라는 사실을 익히 인식하면서도 그 죄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탐욕이란 매일 매일 빠듯하게 살아가는 나 같은 처지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오해하고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탐욕이라 하면 ‘돈밖에 모르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고 ‘움켜쥐기만 하고 도무지 내어 놓을 줄 모르는’ 누군가의 죄인 줄로 착각하며 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야말로 탐욕의 음험함에 젖은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니, 제가 언제 탐욕에 젖었다는 뜻입니까?”라고 의아하십니까? “제가 언제요?”라고 되묻고 싶으십니까? 하지만 이것은 지금 당장,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 증명해주지요. 늘 아직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것, 지금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 그래서 조금 더, 약간만 더, 갖게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바로 그 마음이 탐욕의 씨앗이니까요.

 

그러기에 저는 탐욕의 가장 큰 문제가 상대방의 욕심에만 눈이 밝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돈의 폐해는 비단 많이 가진 부유층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이렇듯 탐욕은 결코 재물의 적고 많음을 가리지 않고 달라붙습니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뻔뻔하게 다가와 쉼 없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댑니다. 얼마 되지 않는 적은 돈일지라도 집착한다면 곧 탐욕의 악습에 탑승한 것입니다. 이 나쁘고 어리석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악덕이자 저주의 대상이었던 탐욕을 ‘이익’이라거나 ‘이윤’이라는 공명정대한 단어로 포장해 놓았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을 가치인 듯 뒤바꿔버렸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미 “억누를 수 없는 탐욕은 저주이며 오로지 현명한 사람만이 부유하다”는 키케로의 지적은 잊힌 지 오래입니다. “탐욕은 인류에게 내려진 가장 강력한 저주”라는 세네카의 말도 겉돌 뿐입니다.

 

물론 돈이 악은 아닙니다. 재물은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꼭 필요한 도구이지요. 다만 돈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은 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돈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수하에 두고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은 쓰임새에 따라서 유익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몹시 험한 해악을 끼치는 괴물로 변하는 둔갑술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지만 돈은 더 좋고,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훨씬 더 큰 축복으로 생각하는 걸 보면 너무 속이 상합니다. 이야말로 복음이 자리해야 할 마음밭에 온통 잡초만 그득한 꼴이니까요. 마음이 병들어 크게 탈이 난 상태이니까요. 결국 더불어 품을 아량을 잃고 불안한 영혼으로 지내며 평화를 잃게 될 것이니까요.

 

 

나눔은 믿음의 가장 근원적 삶의 형태

 

이렇듯 탐심은 모든 죄악의 시발점이며 죄의 뿌리입니다. 그럼에도 탐욕은 엄청난 생산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렁주렁 새끼를 생산합니다. 절도, 사기, 불성실과 위증이라는 가족으로 불어납니다. 결국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마저 힘들게 합니다. 마음에 생긴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게 합니다. 탐심이 마음을 부패시키고 병들게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지닌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마음 안에서는 결코 탐심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닌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있을 때, 그 무엇도 내 것이라고 움켜쥘 턱이 없습니다. 일생을 마친 다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모아 놓은 재산이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나눈 것뿐입니다. 숨은 적선, 진실한 충고, 따뜻한 격려의 말은 오래오래 누군가의 가슴에 간직될 보물로 자리합니다. 나눔만이 주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때문에 나눔은 믿음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나눔이야말로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1티모 6,19)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탐하는 마음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탐심은 선(善)이 아닌 악(惡)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또 다른 모습임을 명심해야합니다.

 

부디 레지오 단원들께서는 세상의 세태를 거슬러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주님께서 보여주신 천상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지혜로써 탐욕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사랑의 나눔이란 강력한 탐심의 치유제를 찾았으니, 헤맬 이유가 없습니다. 곧게 나아갑시다! 더위에 몸조심하시고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8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 부산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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