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2: 고립된 서울 생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4 ㅣ No.392

[추기경 정진석] (12) 고립된 서울 생활


은신 생활 중 영적 독서와 기도에만 매달려

 

 

-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진은 6ㆍ25전쟁 당시 행군하는 미군 모습.

 

 

진석은 삼선교 친척 집에 은신처를 마련해 약 3개월을 지냈다. 이때의 서울 생활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우선 기본적인 의식주 모두가 결핍된 생활이었고 19세의 청년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은 가장 답답하고 큰 고통이었다. 또 한 가지, 기약 없이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나 인민군에 강제 징집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친구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것이라고 진석은 생각했다. 지금은 무조건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인민군의 눈에 띄면 인민군으로 징집돼 최전선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친구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때로는 부모님과 인사도 못 나누고 바로 전선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진석은 군인으로 징집된다면 어떻게든 국군으로 가야지 인민군으로 간다면 헛된 죽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민군은 처음에는 대학생 등 나이가 있는 청년들을 징집했으나 나중에는 14∼15세의 앳된 중학생들도 마구잡이로 징집했다. 서울은 인민군의 보충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해맑은 이 땅의 소년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인민군복을 입은 채 같은 민족이 쏜 총에 쓰러져 갔다. 

 

진석은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점차 이 생활에 적응했다. 진석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낙천적이었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어떻게든 하실 것이니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었다. 진석은 지금 처한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숨어 지내며 온종일 영적 독서와 기도에 매달렸다. 또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밖의 소식이 너무 궁금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럴수록 진석은 기도에 매달렸다.

 

 

북한의 속도전과 미국의 군사적 개입 

 

6ㆍ25 전쟁은 남한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그럼에도 적화 통일이 되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계획하고 실행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변수는 미국이었지만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상당히 늦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북한은 속도전을 벌이면 이른 시일 안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북한의 오판을 부추긴 것은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즉각 참전했다. 그 중심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있었다. 트루먼은 “북한의 전면 남침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시험이다. 따라서 이번의 침략을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마수는 아시아 전역으로 미치게 되고,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이 유발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지켜내는 데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1950년 6월 24일(미국 시각)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 인디펜던스(미주리주)에서 보내고 있다가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6ㆍ25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트루먼은 즉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하고 곧바로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그때 트루먼은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대처 방안을 골똘히 구상했다. 그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극적인 판단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6월 27일 백악관에서 열린 제2차 안보회의에서 미국 해ㆍ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지상군 참전에 관한 최종 판단은 맥아더 장군에게 맡겼다. 6월 29일 맥아더는 일본에서 몰래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했다. 위험하다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흑석동과 동작동 사이로 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용산과 남산이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총성이 가까이 들리고 대포의 파편이 떨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직접 쌍안경으로 한강 전선을 관측했다. 이어 참호 속에서 근무 중인 국군 일등병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것인가?” 

 

일등병은 부동자세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예!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이며, 저의 상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 않으면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지금 소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보내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 

 

“알겠네. 내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의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겠네, 그동안 용기를 갖고 싸워주기를 바라네.” 

 

통역을 통해 나눈 대화였지만 당시 주변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크게 감동했다고 전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맥아더는 약속대로 1950년 6월 29일 새벽 3시(워싱턴 시각) 트루먼 대통령에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전 상황을 보고하면서 미 지상군 파병을 건의했고 대통령 허가를 받아냈다. 한국전에 대한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초대 주미대사 장면(요한) 박사다. 그는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 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절박성을 전했다. 6월 25일 저녁 이승만 대통령과 통화한 후 미국의 상ㆍ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했고,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해 미군과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장면 박사, 한국 파병 위해 동분서주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했다. 6월 26일에는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찾아가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했고, 6월 27일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정치인 중에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해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장면은 미국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 줄 것을 계속 설득했다. 

 

드디어 7월 7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유엔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북한군과 싸우는 아군은 유엔군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됐다. 전쟁은 북한군과 한ㆍ미 연합군 간의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에 커다란 힘이 됐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1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2,17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