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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1: 6·25와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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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08 ㅣ No.390

[추기경 정진석] (11) 6·25와 명동성당


전쟁의 여파가 교회에도… 진석은 강제 징집 피해 몸을 숨기고

 

 

- 6ㆍ25 전쟁 당시 명동성당(뒤편)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되찾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들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38선으로 남과 북, 미 군정과 소련 군정 지역으로 구분됐지만, 초창기에는 왕래나 활동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양쪽 진영의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도 쉽지 않게 됐다. 그러나 6ㆍ25 전쟁 발발 후 처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피란을 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경황도 없었지만 대부분 집에 월북한 젊은이 한두 명씩은 다 있었고, 또 공산당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처음 북한에서 내려온 공산당 정규군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정부 인사, 지주, 군인 가족, 경찰 등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인민재판을 열어 마음대로 처단했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더 큰 문제는 북한군 밑에서 새로 완장을 차고 권력을 얻게 된 일부 동네 사람들이었다. 주로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동네 빨갱이’가 돼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이웃들을 상대로 마음대로 복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남한과 북한 양쪽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교회 역시 각각의 정치 세력이 지닌 이념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남한의 천주교회는 미 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점차 발전해 갔지만, 북한 교회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북한은 천주교회를 미군과의 비밀 연락의 근거지로 의심하며 성직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교회 시설물들을 불법으로 폐쇄하고 몰수했다. 이는 6ㆍ25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쟁 발발 하루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사이에 북한군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13명의 한국인 신부를 모두 체포, 구금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 도선을 넘어 남침했다.

 

 

서울대교구, 긴급 참사회 열어 

 

서울대교구는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었다. 당시 교구장인 노기남 주교는 유럽 순방 중이었기 때문에 부주교인 이기준 신부, 명동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 교구청 소속 윤형중ㆍ김철규 신부 등이 모여 차후 교회의 행보에 대해 논의했고 빠른 결론을 내 전쟁에 대처했다. 회의 결과 본당 주임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 잔류하고 그 외 보좌신부와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가능한 한 피란을 떠나도록 권유하기로 했다. 특히 반공 저술 활동 등으로 북한군의 표적이 되었던 윤형중 신부와 1946년 해주본당 사목 당시 월남을 시도하다 체포돼 해주형무소에 수감된 이력이 있는 김철규 신부는 즉시 피란하도록 했다. 혜화동 신학교는 휴교하고 신학생들을 귀가 조처했다. 6월 27일 저녁에 신학교가 해산하고, 교수 신부와 신학생들은 신자의 집으로 몸을 피하거나 귀가해 있다가 나중에 피난 행렬에 섞여 부산까지 내려갔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6일 도림동본당의 이현종 보좌신부를 총살하는 등 본격적으로 남한 지역 성직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외국인 성직자들을 연행하기로 하고, 7월 11일 명동 주교관에 머물던 교황사절 번 주교와 외국 신부ㆍ수녀들을 붙잡아 소공동 삼학빌딩(현 대한항공빌딩 뒤) 지하에 감금했다가 심문을 하고 7월 19일 북한 지역으로 이송한 후 평양 감옥에 수감했다. 성직자들의 체포와 학살과 더불어 일반 신자들에 대한 체포와 학살도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민군 사령부는 ‘기독교 민주동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으며, 성직자들과 명동본당 회장들에게는 노 주교가 이승만과 공모하여 북침을 계획하고 무고한 인민을 학살했으며, 신부들은 신자들을 착취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결탁해 국가를 멸망의 길로 끌어넣었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자술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또 신자들을 총출동시켜 궐기대회를 개최할 것과 라디오 방송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와 이용은 다행히 명동 신부들의 기지로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명동성당은 상당 기간 본당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8월 6일까지는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됐으며, 가정 방문과 성사 집전을 비롯한 본당 신부의 사목 활동이 계속됐다. 북한군은 교회 시설을 강제 점령하고 강제 수용했다. 서울대교구청을 비롯하여 계성학교, 유치원 등 명동성당 구내나 인근에 소재한 대부분의 교회 시설들이 인민군에 점령돼 군사 시설로 활용됐다. 동시에 북한군은 교회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고 자신들의 선전선동에 교회를 이용하려 했다. 8월 6일 북한군이 다시 찾아와 신부들이 머물던 기숙사마저 비워 달라고 요청해 명동에 남아 있던 신부들은 제각각 흩어지게 됐다. 

 

그러던 중 당시 북한군 공작대 대장으로 행세하던 김충성(베드로)이라는 평신도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을 찾아와 ‘북한군이 교회 지도급 신자들을 모두 학살하기로 했으니, 신부뿐만 아니라 수녀와 회장까지도 다 피신하라’는 말을 전해 줬다. 고아원의 재산도 교우 집으로 분산시켜 보관하게 하는 등 수녀원의 시설과 물품을 지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래서 많은 신부와 수녀, 회장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김충성의 정보 제공과 노력은 신부들의 납북을 비롯한 교회의 인적ㆍ물적 손실을 극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북한군이 집집마다 수색하며 강제 징집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얼마 후 서울 지역의 젊은이들을 북한군 군대로 강제 징집했다. 이들 대부분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돼 북한군의 선봉에서 목숨을 잃었다. 진석은 집에 머물다가 징집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삼선교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겨 몸을 숨겼다. 서울이 수복되기 전 3개월 동안 삼선교 친척 집에서 친척 동생과 함께 은신처를 만들어 숨어 지냈다. 북한군은 집집마다 수색하고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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