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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 - 독일 가톨릭의 날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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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5 ㅣ No.1327

[신앙과 정치]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


독일 ‘가톨릭의 날’ 유감

 

 

지난 5월 말 2년마다 열리는 독일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100회째 행사가 구동독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다. 라이프치히는 독일의 분단 시절,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독일 통일을 위한 집회와 기도회가 열린 유명한 도시이다.

 

 

계몽과 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다

 

그리스도교 국가로 알려진 독일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50%를 조금 넘는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비율은 거의 반반이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그리스도교의 명맥은 유지되어, 동독 지역에서 가톨릭의 비율은 5%에 달한다.

 

올해 ‘가톨릭의 날’ 행사를 라이프치히에서 거행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라이프치히는 구동독 사회주의 정권의 대표적인 도시인데다 가톨릭 신자 수는 아주 적었고, 예산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제의 수도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독일 가톨릭교회는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요한 19,5 참조)라는 주제로 모험을 감행했다. 신자와 비신자, 이웃 종교인, 무신론자 등 4만 명이 참여한 닷새 동안의 라이프치히 ‘가톨릭의 날’은 아주 ‘의미 있는 실험’으로 평가받았다.

 

독일 ‘가톨릭의 날’은 1848년 시작되었다. 1848년은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사회에 혁명이 전염병처럼 번졌고,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당시 유럽은 계몽주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위축되었다. 종교는 환상의 산물이요 계몽의 적으로서 미성숙을 대변했으며, 종교적 행위는 미신이자 주술로 여겨졌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1784년 ‘베를린 월보’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계몽은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미성숙으로 나온 인간의 출구”라고 적었다. 그에 따르면, 미성숙은 타인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 미성숙은 전적으로 본인의 탓이다.

 

칸트는 이 미성숙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와 결단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그래서 ‘알고자 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Sapere aude!)’는 것이 계몽의 신조가 된다.

 

계몽과 혁명의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위축되었다. 근대의 지식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일에 관여하시는 것을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 칸트의 ‘실천이성’이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다만 도덕의 잣대로 ‘요청’될 뿐, 그 이상이나 이하도 아니었다. 계몽된 인간에게 문명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는 합리적 이성의 힘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과 절제 그리고 번영의 정신은 자본주의 체제와 짝을 이루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세상 안에서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는 왠지 도회적이었고, 가톨릭은 아직 촌스러웠다.

 

 

평신도의 손으로 이룬 가톨릭의 역사

 

1848년 독일 혁명은 가톨릭 평신도들을 깨웠다. 그 당시만 해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교서 ‘성직자와 평신도’(Clericis laicos, 25. 2. 1296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평신도를 성직자의 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올해 가톨릭의 날 개막연설에서 밝혔듯이, “독일의 평신도들이 1848년 3월 혁명의 와중에 로마의 지침을 따랐다면, 시민권에 따른 가톨릭 단체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마인츠에서 첫 번째 가톨릭의 날 행사를 거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며,오늘 1백 번째 가톨릭의 날 행사를 거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교황청의 처지에서 본다면, 가톨리시즘과 시민의 자유는 서로 양립불가였다. 교황청은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물인 집회와 결사, 언론, 종교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를 두고 ‘흑사병과 같은 오류’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교회 내적 상황에서 독일의 평신도들은 시민적 자유를 행사했다.

 

가톨릭의 날이 168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186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제20회 가톨릭의 날을 두고 칼 마르크스는 “(가톨릭의) 개들이 아양을 떨고 있다. … 마치 노동 문제에 자신들이 적합한 것처럼”이라고 비난했다. 교회 대내외적 비난에도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이 판단한 시민적 자유를 교회와 교황의 수호와 자유를 위해 사용했다.

 

가톨릭 정치적 결사체인 ‘종교 자유를 위한 비오회(Piusvereine fur religiose Freiheit)’는 1848년 제1회 가톨릭의 날의 심장이었다. 이 단체 회원들에게 교황에 대한 신뢰와 혁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위험한 기억’ - ‘사람’을 보다

 

올해 가톨릭의 날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되짚어주면서 “사회의 변화와 ‘혁명적’ 개조에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독일 교회의 역사에서 ‘위험한 기억’(요한 밥티스트 메츠)을 되살려내는 데에서 시작한다.

 

메츠 정치신학의 주요 주제이기도 한 ‘위험한 기억’은 ‘한 사람’을 기억해 내는 일이다. 그 한 사람은 2천 년 전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모든 인류를 대변했다. 우리가 ‘보는 ’그 사람은 고통받고 소외당하며 억압받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당대 모든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군중 앞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고문을 받으며 마침내 비참한 죽임을 당한 청년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 시대 가장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인이 주변부의 약자들을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올해 독일 가톨릭의 날 주제인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는 난민 문제를 구실로 극우 세력이 준동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특히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라는 극우 정치세력은 ‘가톨릭교회가 난민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중세 때 면죄부를 파는 것과 같다. 곧 난민 한 명 받아들이는 것이 연옥영혼을 한 명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라며 가톨릭교회를 비난했다. 오늘날 극우파는 세계 어디서나 심각한 골칫덩이이다.

 

개신교 신자인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는 가톨릭의 날 축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악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행사의 압권은 2만여 명이 참석한 폐막미사였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이자 뮌헨교구장인 라인하르트 마르크스(칼 마르크스와 성이 같다!) 추기경은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을 향해 모든 가톨릭 신자와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생각이 없지만, 복음의 원리를 사회에 옮겨놓아야 하고, ‘사람’을 정치적 행위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보라,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가톨릭의 날 주제를 환기시켰다. 그는 또한 가톨릭교회의 자비는 “해마다 유럽의 국경을 넘으려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라고 했다.

 

 

두려움 없이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라!

 

평신도의 손으로 시작한 독일 가톨릭의 날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놀며 토론하면서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리스도인의 행사가 시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도전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을 선언하면서, 우리가 금과 옥조와 같이 여기는 가톨릭교회의 소중한 자산을 보존하는 것만 우리의 과제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두려움 없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라!”라고 했다. 성숙한 신앙인은 기쁘고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가 복음의 원리를 행동으로 옮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신학적으로 정초했던 칼 라너는 “우리가 더 영성적일수록 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고, 또 우리가 더 정치적으로 행동하길 원한다면 그만큼 더 영성적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나온 영성과 정치는 양립가능이다. 이 둘은 서로를 요청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016년 한국, 사방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데도 전혀 사람을 보지 않는 국가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미세먼지 가득한 오후, 신앙과 정치를 나누지 않고 ‘기쁘고 두려움 없이 시대에 필요한 일’을 용기 있게 해나가는 한국 천주교회 ‘가톨릭의 날’을 꿈꾼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7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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