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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0: 흙먼지 날린 혜화동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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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30 ㅣ No.389

[추기경 정진석] (10) 흙먼지 날린 혜화동 로터리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이땅의 젊은이들

 

 

- 6ㆍ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앙청 일대(지금의 광화문광장 인근).

 

 

남북 분단에도 한국은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는 해방 후 북쪽으로는 소련군이, 남쪽으로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에게 각각 항복을 받았다. 여기서부터 분단의 아픔이 시작됐다. 북쪽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남쪽은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남북 분단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가족이 이남과 이북에 친척이 있고, 어떤 이는 친지 중에 북쪽 공산당에서 일하는 사람, 남한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 있는 경우도 있었다. 38선은 그어졌지만 처음에는 몰래몰래 왕래도 가능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군대가 내려온다고 해서 딱히 겁을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분위기였다. 공산당도 같은 한국 사람인데 큰 문제가 있겠느냐며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북한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계속적으로 군비를 늘려나갔고, 6ㆍ25전쟁 직전에는 남쪽과 북쪽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전력이 비대칭을 이뤘다. 6ㆍ25가 일어나기 전 이미 38선을 중심으로 국지전도 많이 있었다. 국군과 북한군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남한은 1949년 미군이 모두 철수하고 약간 명의 미군이 고문으로 한국 군대를 지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을 위해 전쟁을 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미군은 국군에게 무기와 화력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다. 공군과 해군이 변변찮았던 것은 물론 육군도 탱크 하나를 보유하지 못한 군대였다. 

 

전쟁이 시작된 주일 아침에 많은 사람이 단잠에 빠져 있었고 많은 군인도 주말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 북한군은 새벽에 38선 전체에 걸쳐서 도발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 전 며칠 동안 북에서 싸우는 척하다가 후퇴하는 식으로 위장 전술을 펼치고 있었기에 6ㆍ25 전쟁이 터졌을 때도 한두 시간 후에는 전투가 끝난다고 착각을 한 사람도 있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전쟁이라는 것은 

 

그러나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의 전투는 전혀 양상이 달랐다. 북한은 오전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 화력을 집중해 수많은 군인을 전장에 투입하고 병력을 계속 남쪽으로 밀어붙였다. 남측은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다. 전 군이 휴가를 나간 주일 아침에 일어난 전투에 우리 국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병력은 더 많이 늘어났고 특히 우리 군은 굉음을 내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제 T-34 탱크의 실물을 전장에서 처음 보았다.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막는다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국군이 포탄을 탱크에 명중시켜도 포탄이 그저 튕겨 나갈 뿐 탱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몇몇 전선에서는 용감한 국군들이 맨몸으로 폭탄을 메고 탱크로 뛰어들어 폭파를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전력이 열세였던 국군은 짧은 시간에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 전쟁으로 수많은 양민이 공산군에게 학살됐다. 사진은 학살된 민간인 시신.

 

 

진석은 주일 아침 간간이 들려오는 전투 소식을 듣게 됐다. 처음엔 38선에서 양측이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혜화동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고 나왔는데 혜화동 로터리에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돈암동에서부터 길가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국군 병사들,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들이 내려왔다. 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패잔병들처럼 보였다. 주일 오후에 그 모습을 보고 진석은 처음으로 전쟁을 실감했다. 

 

국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오는 길이었다. 벌써 의정부가 공격당하고 당일에 점령됐다는 소문마저 들려왔다. 밀려 내려오는 국군은 지금의 창경궁 앞 돌아가는 모퉁이, 그러니까 현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이 있는 쪽에 집결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우거진 숲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그곳에 정렬했던 국군들은 서울로 들어오려는 북한군과 미아리고개에서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주일에 늦게 집에 들어온 진석은 다음날 월요일 학교에 갈 생각도 못 하고 전쟁 소식 들으러 혜화동 로터리로 다시 나갔다. 온종일 서성이며 전쟁 소식을 주워담던 진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심각해짐을 직감했다. 국군 부상병, 패잔병이 자꾸 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동네에 나가 보니 인민군의 모습이 보였다. 정찰대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진석은 화요일에는 집안에만 있고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이기고 있고 오히려 북진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만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27일 오후 10시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8일 새벽 2시 30분 서울 지역에는 큰 폭발음이 들렸다.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던 것이다. 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피난민도 사망했다.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던 인도교가 폭파되자, 정부의 발표를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던 수많은 서울 시민이 고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부의 수뇌부들은 서울을 떠난 상태였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진석은 한강대교에서 희생된 이들이 오랫동안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나란히 놓여 있는 한강 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공산군의 진군을 늦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북에 남아 있던 이들의 한강 도하는28일 오후부터 29일 오전 사이에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한강 이북에는 여전히 국군 병력이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9ㆍ28 수복 후 국군에 복귀했으나 상당수가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군이 6ㆍ25 전쟁 동안 수만 명의 국군 포로로 구성된 부대를 운영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국군이 북한군 옷을 입고 북한군이 되어 아군인 국군에 총을 겨누고 싸운 셈이다. 시간이 지나 진석은 그들 대부분이 낙동강 전투에서 무기도 변변히 지급받지 못하고 총알받이가 되어 희생됐다고 들었다. 가장 비인간적인 죄악이 벌어지는 현장 한가운데에 이 땅의 청년들이, 그리고 진석이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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