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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9: 비극의 역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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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3 ㅣ No.388

[추기경 정진석] (9) 비극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 발명가 꿈 안고 서울대로

 

 

- 진석이 서울대 공대 입학시험을 치른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의 경성제국대학 시절 모습.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자리다.

 

 

1950년에 현재의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한 이들은 광복 이후 변경된 학제를 처음 적용받은 세대였다. 일제 강점기에 설정된 중등 4년 과정이 광복 후에는 6년으로 변경되었다. 강점기에는 중학교 4년을 보내고 나면 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군 인력 보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이하고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6년제로 변경되면서 1950년도에야 6년제 졸업생이 탄생하게 됐다. 진석도 1950년 졸업생 중 하나였다. 새 학제는 4월이 졸업이었고, 5월이 신학기였다. 

 

교육과정뿐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재들의 집합소인 서울대학교 역시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그 기원을 1895년 고종이 고등교육기관으로 최초로 설치한 ‘법관양성소’에 두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강점기 일왕 칙령에 의해 1924년 설립됐는데, 광복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45년 11월 유지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구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해 국립 종합대학을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가 1946년 8월 22일에 ‘국립 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하고, 이에 따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가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ㆍ공ㆍ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의과, 공업, 미술 등 전문학교 10곳이 합쳐지고,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됐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다. 유명한 ‘국대안(國大案) 파동’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9개 단과대학과 한 개 대학원으로 출발한 이후 점차 학부와 대학원의 규모가 늘어났다. 대학 캠퍼스도 옛 경성대학의 동숭동 캠퍼스를 주 캠퍼스로 활용하고, 연건동, 공릉동, 을지로, 소공동, 남산동, 그리고 수원 등지에 단과대학들이 있었다. 진석은 동숭동 캠퍼스에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입학시험을 보았다. 중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던 진석은 어렵지 않게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전국의 수재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좋은 성적표 보여 드리는 것이 큰 효도라 생각해

 

- 진석이 입학했을 당시 서울대 공대. 태릉에 있던 서울대 공대는 1980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진석은 자신이 좋은 성적인 것은 신부님들께 받은 교리교육과 복사 활동, 매일 열심히 책을 읽은 까닭이라 생각했다. 겸양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진석은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치닫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제는 한국인의 자주성을 흔들고 저항 정신을 위축시키기 위해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뿌리 뽑으려 했다. 민족의 정신과 혼이 들어 있는 말과 글을 가장 먼저 탄압했다.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도 금지했고, 이를 어길 시 엄중히 처벌하는 한편 신고자는 포상했다. 이름조차 창씨 개명으로 일본식 발음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그런데 진석은 계성보통학교에서 신부님들에게 한글로 교리교육을 받았다. 당연하게 조선말을 사용하고 한글을 썼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한국어와 일본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동시에 익힐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게 됐다. 비로소 학교에서 한글책으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안타깝게도 일제의 교육제도 탓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글을 몰랐다. 진석은 한국어책이 나오자마자 금방 읽을 수 있었지만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더듬더듬 읽었다. 심지어 한국말도 잘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중1 때부터 배우는 영어도 진석에게는 익숙했다. 진석은 미사 때 라틴어로 신부님과 계응을 주고받는 복사 활동을 오래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파벳을 익혔다. 당연히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3가지 언어를 사용하며 생활한 것이 진석에게는 요즘 표현으로 이른바 선행학습을 한 셈이 되었다. 도서관을 좋아해 책을 매일 읽었으니 독서 요령도 늘어 중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진석은 수업시간에 최대한 집중하여 칠판에 있는 내용을 그림처럼 통째로 머리에 넣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반복하니 점차 효과가 나타났다. 글자보다는 이미지나 숫자가 오래 기억되고 정확히 머리에 새길 수 있었다. 어느 일정 부분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한 장면처럼 보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실수가 없었다. 5학년 때 수학을 잘하니 선생님께서 6학년 수학 시험을 보게 할 정도였다. 진석은 어머니께서 아들의 성적표를 보고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이 큰 효도라 생각하고 공부에 임했다.

 

 

6·25 하루 전에도 평화로운 일상 풍경

 

그렇게 중학교 과정을 우수하게 마치고 진석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발명가’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에 가려면 매일 아침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태릉에 위치한 서울대 공대 캠퍼스에 가다 보면 태릉역까지 가는 열차는 서울대생으로 가득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함께 기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전교생, 전 교원이 한 기차를 타고 등ㆍ하교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 공대 옆에는 화랑대, 즉 육군사관학교도 있어 토요일이면 한 주 만에 귀가하는 사관생도들과 함께 열차를 타야 했다. 주말 휴가를 위해 같은 기차에 탄 사관생도들로 토요일 하교 열차는 한껏 들뜨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그날도 육군사관생도들과 서울대 공대생들이 함께 섞여서 청량리로 가는 기차에 있었다. 청량리역에 도착한 젊은 청년들은 깔깔거리고 장난도 치며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람이 많고 붐볐지만 평화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6ㆍ25전쟁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이었다. 다음 날 전쟁이 일어날 줄은 어느 누구도 꿈에도 몰랐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2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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