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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인간이 이 땅과 생명체들의 주인인가 - 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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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7 ㅣ No.1030

[영화 속 신앙 찾기] 인간이 이 땅과 생명체들의 주인인가, 옥자

 

 

세상이 혼탁하고 뻔뻔할수록 풍자와 은유는 약하고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보다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언어와 고발과 비판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것을 사람들은 ‘용기’라고 말하고, 그 용기가 세상과 인간을 바꾼다. 그렇다고 날카롭고 거친 ‘직설’만이 능사는 아니다. 예술은 은유와 상징, 풍자와 역설로 세상을 비틀거나 깎고 다듬어, 그 울림을 크고 오래가게 한다. 문학도, 그림도, 영화도 그렇다.

 

예술도 때론 직설로 나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외쳐도 들으려고도,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구호나 운동, 고발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영화가 진실을 파헤치고, 정의를 밝혀야 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것에 놀라 그때야 허겁지겁 뒤돌아보는 사회는 더 불행하다.

 

영화가 세상을 직접 바꿀 수는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 권력이나 제도가 될 수 없다. 세상은 세상을 사는 인간이 바꾼다. 다만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그 길을 잠시 보여 줄 뿐이다. 상상으로 모두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섬세한 시선으로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며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 영화는 현실을 마음대로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을 꼽으라면 봉준호이다. 사회학도 출신인 그의 시선은 늘 사회 부조리에 가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찍으려고 경찰서와 신문사 자료실을 샅샅이 뒤지지만, 그는 경찰이나 기자가 아니다. 틈만 나면 만화를 읽고 그리지만 그렇다고 만화가도 아니다. 가끔은 두 주먹 불끈 쥐고 거리에서 구호도 외치지만, 운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봉준호는 영화감독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영화로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의 삶과 풍경을 본다. 그에게 영화는 섬세하게 디자인이 된 투명한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우리에게 ‘세상’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영화는 상상이면서 현실이고, 미래이면서 현재이고, 자아이면서 타자이다.

 

 

봉준호 감독의 은유와 풍자의 현실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풍경은 현실 그대로가 아닌 은유와 풍자의 세상이다. 잃어버린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플란다스의 개’). 미궁에 빠진 연쇄 살인 사건(‘살인의 추억’). 한강에 나타나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든 어처구니없는 가상의 괴물(‘괴물’). 엄마의 병적인 자식 애착이 불러온 살인의 비극(‘마더’).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유일한 삶의 공간으로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투쟁(‘설국열차’). 이 모두가 은유와 풍자의 작품이다.

 

그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로 가든 자신의 은유와 상징, 상상과 영상 언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황당한 허구의 세계에서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온라인 스트리밍(인터넷 상에서 음성이나 동영상 등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기술. - 편집자 주) 개봉으로 논란과 충격을 던진 그의 여섯 번째 작품 ‘옥자’ 또한 마찬가지다. 슈퍼 돼지(옥자)는 한강의 ‘괴물’처럼 만화적 상상일지는 모르나, 영화가 은유하고 풍자하는 것은 현실이다.

 

‘옥자’에서 그 대상은 인간의 ‘탐욕’이다. 그리고 그 풍자는 다층적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유전자 조작을 하고서도 슈퍼 돼지를 대자연의 선물이라고 속이는 다국적 기업(미란도 코퍼레이션), 그 거대 자본에 놀아나며 육식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을 때론 우화적, 때론 섬뜩한 분위기로 비판한다.

 

‘옥자’는 독특하게 창조해 낸 캐릭터다. 인간이 아닌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괴물’과 비슷하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 척하는 사회 부조리를 각인시켜 준다는 점에서는 ‘설국열차’와 비슷하다. 달리는 ‘설국열차’는 미래이지만 그곳의 차별과 폭력과 갈등과 분열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습과 다를 게 없듯, 슈퍼 돼지 ‘옥자’는 우리의 추악한 현실을 집약하고 있다.

 

‘설국열차’가 그렇듯 ‘옥자’ 또한 그 현실을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혹시라도 모르고 지나친 ‘세상’이 없나 돌이켜 보게 만든다. 여기저기 숨겨 놓은 은유와 상징은 영화가 언제든 현재성을 가지고 새롭게 다가오게, 오래 살아 있게 한다.

 

‘옥자’는 애틋하고 따뜻하다. 옥자가 자신이 자란 자연(강원도 산골)으로 돌아와 미자(안서현)와 함께 다시 살아가는 동물과 인간의 특별한 교감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가진 힘

 

‘봉테일’이란 별명까지 붙은 봉준호 감독에게 ‘디테일’은 영상 언어요 영화적 설득력이며 생명력이다.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도,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도, 은유와 풍자의 힘도 거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건, 구성, 인물, 대사는 물론 단역 배우에서 어떤 것은 제작진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소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디테일을 자랑한다.

 

디테일은 무대나 소품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이야기의 복선을 다양하게 배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꾹꾹 눌러 담는다고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물은 물론 물건 하나하나에 섬세한 표정이 있어야 하고, 표정과 이야기가 살아있어야 한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서 폭동을 일으킨 주인공 커티스가 “두 팔이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뜬금없는 말을 영화는 치밀한 시간 계산으로 나중에 그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해 준다.

 

또 열차 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가 성냥개비 하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남겨둔 것을 보여 주고는 마지막에 그것으로 열차 문을 폭파한다. 봉준호 감독에게는 작은 눈송이 하나, 지나가는 행인조차 ‘우연’이란 없다.

 

‘옥자’에서도 미자의 할아버지인 희봉(변희봉)이 가지고 있던 금으로 만든 돼지의 출처와 쓰임새, 옥자를 처음 싣고 가던 비정규직 청년의 세태를 꼬집는 한마디가 그렇다. 살아 있는 슈퍼 돼지의 속살을 확인하는 기구나 그것으로 채취한 고기를 맛보는 모습도 마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처럼 생생하다.

 

‘옥자’에서 디테일의 백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옥자’이다. 돼지와 하마를 합친 모델이 있었고, 이미지가 친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세련됨과 그것이 가져온 미자와의 자연스러운 어울림 때문만도 아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옥자의 디테일은 움직임과 눈빛으로 나타내는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에 있다. 그 감정은 비록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지만, 옥자도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란 사실, 동물이지만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을 가졌으며, 인간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 섬세한 감정 표현과 미자와의 교감은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질타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특별한 존재인가? 인간이라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이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는 물론 다른 생명체까지 그 모습을 바꾸려 한다. 환경 오염의 산물인 ‘괴물’이 인간의 오만과 무책임에서 나온 것이라면, 옥자는 이기심과 탐욕의 산물이다.

 

어디 옥자뿐이랴. 옥수수가 그렇고 콩이 그렇다. 유전자 복제로 생명을 함부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인간만의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지면서 사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 옥자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미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도 이런 것이 아닐까.

 

‘옥자’는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과장된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도살장에 끌려간 슈퍼 돼지를 전부 구해 내지 못하고, 겨우 옥자를 고향으로 다시 데려온다. 거기에 다른 슈퍼 돼지가 도살장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 아기 돼지 한 마리만 구해 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세상은 영화가 아니기에 그렇게 하나라도, 한 사람이라도 바꾸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풍자와 은유와 상상도 그 작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대현 요나 - 영화 평론가로 국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겸임 교수이다. 한국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이대현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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