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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길 수도의 길: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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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5 ㅣ No.387

[영성의 길 수도의 길] (53)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한ㆍ일 두 나라 화해와 민족감정 해소 '다리 역할'


수녀회 심벌마크
 

몇 년 전 종교전문작가 김나미씨가 쓴 「파란 눈의 성자들」이란 책을 읽고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오딜(Marie Odile Megard, 프랑스) 수녀를 알게 됐다. 일본에서 불어를 가르치며 선교하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한국에 온 프랑스 출신의 오딜 수녀는 20년 넘게 한ㆍ일 양국의 화해와 민족감정 해소를 위해 노력해 온 분이다.

파란 눈의 이방인 오딜 수녀가 가난한 달동네에서 연탄을 때고 살던 시절을 추억으로 떠올리고, 선배 수녀이면서도 아침에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자리가 올라갈수록 몸은 낮아져야 한다'고 했던 이야기를 읽고 참 수도자의 모습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수녀원(경기도 부천 심곡본동 소재)으로 들어가 현관 초인종을 누르니 젊은 수녀가 밝은 웃음으로 맞아준다. 잠시 후 응접실에서 만난 수녀 네 명 중 젊은 수녀들은 수도복 차림인데 오히려 선배 수도자인 강진열(마르티나) 원장 수녀와 일본 출신의 하타 미츠에 수녀는 단발머리에 사복을 입었다.

강 수녀에게 "선배 수녀님 둘이 사복을 입으셨네요?"하고 묻자, "우리는 (아직 서원을 하지 않은) 지원자들"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1996년부터 수도복 착용을 자율화했어요. 한국에서는 사도직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어 수도복을 입기도 해요."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수녀들이 마당 성모상 앞에서 봄 햇살을 받으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한국인 수녀 다섯 명과 일본인 수녀 두 명이 살고 있는 작은 공동체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수녀회는 일본지부를 통해 한국에 진출했다. 올해 금경축을 맞은 미츠에 수녀도 앞서 소개한 오딜 수녀와 함께 1985년 한국에 파견돼 수도생활의 절반 이상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런데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도자를 파견한 계기가 특이하다.

"한ㆍ일 관계를 보면 일본은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저지른 잘못을 잊고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 취급하지요. 또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에 적대 감정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두 나라가 서로 화해하고 역사적 앙금을 해소하는 데 우리 수녀회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고 왔어요.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잘못을 어떤 식으로든 사죄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지요."

외교관도 아닌 수녀들이 어떻게 두 나라 화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언젠가 한 남자 중학생이 일본 출신인 저를 보고 '나는 일본 사람이 싫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시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학생이 '수녀님을 알고부터는 일본 사람을 무조건 미워하지는 않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수녀원 성당 감실 앞에서 성체조배를 하는 수녀들.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회원들은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길 기도하며 선교를 위해 매일 30분~1시간씩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미츠에 수녀는 "딱히 거창한 활동이 아니라 그냥 어울려 살면서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통해 사랑을 증거하는 것만으로도 반목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한ㆍ일 관계를 염려하는 수녀들의 기도 주제는 '속죄와 화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총리의 신사참배 등으로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항상 속죄와 화해가 수녀들의 기도 지향이 된다. 한ㆍ일 관계가 조금 나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수녀님들 기도 덕분이 아닐까.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마리아만큼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은 없다. 수녀회는 이름 그대로 이러한 도움이신 마리아를 본받아 구원사업에 응답하고 있다. 결핵 요양소를 닫고 정신지체장애인 요양시설을 열거나, 학교 사도직을 그만두고 여자기숙사를 만들고, 휴양시설을 피정의 집으로 바꾸는 등 특별히 고유 사도직을 갖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적절히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본당 사도직과 피정 사도직을 통해 하느님 은총을 주위 사람들과 영성으로 나누고 있다. 수녀원 내에 있는 피정의 집은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거나 삶에 지친 신자들이 언제든 찾아가 편하게 쉬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수녀들은 영적 치유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서 개인 피정과 소그룹 피정을 열고 있다.

피정사도직 담당 임태숙(마리 수산나) 수녀는 "하느님과의 영적 만남과 재충전을 원하는 분들이 명절이나 휴가 때 와서 며칠씩 머물다 간다"며 "피정을 들어올 때 모습과 나갈 때 모습이 변화되는 것을 보면 수녀들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수도회 영성과 역사 - 인류 성화에 도움되는 일이라면...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설립자 마리 데레즈 수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성모 마리아가 이처럼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며 구원사업에 협력했듯이,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인류성화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어떤 일이든지 봉사한다는 정신을 갖고 있다.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마리 데레즈 드 수비랑이 1854년 프랑스에서 설립했다. 마리 데레즈는 사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관상수도회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여파로 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기아와 빈곤, 질병으로 고통 받는 극빈층이 날로 증가하는 사회 상황을 보면서 빈민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모색하며 봉사에 주력했다.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격변하는 프랑스 사회 속에서 노동자, 특히 젊은 여성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감지했던 마리 데레즈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와 유럽 최초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고, 공제조합과 보험제도를 시작하는 등 선구자적 활동을 폈다.

하지만 수녀회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그는 1874년 초 수녀회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그 뒤 다른 작은 수녀회에서 일하다 1889년 세상을 떠난다. 그를 쫓아낸 수녀가 결국 총장직을 사임하고 수녀회를 나간 후 후대 회원들이 설립자 영성을 되찾음으로써 마리 데레즈는 명예를 회복했고, 1946년 10월 20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됐다.

마리 데레즈는 회원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는 데 있어 시대 변화에 따라 길을 개척하고 또 필요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성을 발휘하라고 강조했다. 설립자 염원대로 수녀회는 영국ㆍ이탈리아ㆍ일본ㆍ아일랜드ㆍ카메룬으로 퍼져 나갔으며, 다시 일본에서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작은 섬 폰페이와 한국으로 진출했다. 전체 회원 수가 200여 명 남짓할 정도로 아주 적지만 세계 각지로 퍼져 가난함 중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며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수녀회 영성은 △ 성체 중심의 삶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성 △ 성모 마리아와 함께하는 삶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성 이냐시오 영성으로 사도직 활동에 관상생활을 결합하면서,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주님의 종이자 구원사업 협조자'로 살았던 성모 마리아를 따라 그와 더불어 협조자가 되도록 초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열린 마음, 가난함 그리고 신뢰심'으로 표현되는 설립자 정신을 본받아 사도로서 하느님 부르심에 부단히 응답하고, 하느님 외에 그 어떤 세속적인 것에도 마음을 뺏기지 않는 영적 가난함을 추구하며, 당신 종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간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18일, 서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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