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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 평화를 찾다7: 슬로베니아 10일 전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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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4 ㅣ No.381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7 · 끝) 슬로베니아 10일 전쟁의 기억


종족 · 종교 벽 허물고 평화를 다시 짓는다

 

 

- 알프스 산자락에서 이어진 평원이 매혹적인 슬로베니아의 목가적 풍경과 어우러져 차장으로 스쳐 지나간다.

 

 

세르비아에서 슬로베니아로 가려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거쳐야 한다. 

 

짧게는 두세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마다 4개국 국경을 넘는 지리한 시간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유채와 해바라기, 옥수수,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지루함을 달랜다. 

 

아침에 출발했는데도 오후 늦게야 슬로베니아로 접어들었다. 구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 공화국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던 나라답게 한눈에 봐도 윤택하다. 발칸 국가 중 2004년에 맨 먼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슬로베니아는 1인당 GDP가 미화 2만 3184달러로 가장 많다.

 

- 류블랴나대교구 주교관에서 접한 안드레 아이디치의 ‘부활하는 그리스도’상. 그리스도의 형상이 깊게 패인 십가가에서 막 일어선 그리스도가 지상에 땅을 딛고 승천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단지 10일 만에 전쟁은 끝났지만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다. 전쟁의 흔적 역시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구 유고 연방에서 첫 번째로 탈퇴할 당시 슬로베니아엔 세르비아인이 거의 없어 구 유고 연방의 개입 명분이 적었다. 그래서 전쟁은 10일 만에 끝나 버렸고,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슬로베니아에선 18명이 사망하고, 28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구 유고연방인민군은 44명이 사망하고 146명이 부상했다. 이 밖에 류블랴나 공항 폭격 등으로 저널리스트와 트럭 기사 등 12명의 외국인이 사망했다. 구 유고연방인민군 4600여 명과 연방경찰 250여 명이 슬로베니아군에 잡혔고, 이들도 그해 7월 7일 브리유니 평화 조약의 서명으로 풀려났다. 

 

기묘한 건 슬로베니아의 독립일이 6월 25일이었다는 점이다. 개전을 불러온 독립일이 한국전쟁 발발일과 겹치는 기막힌 우연에 발칸과 한반도의 유사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그럼에도 전쟁의 기억은 슬로베니아인들에게 선명하다. 슬로베니아 출신 포콜라레(마리아사업회) 회원 로베르트 자이츠(47)씨의 말을 들어 보자. 

 

“전쟁이 막 시작됐을 때 전 피렌체 인근 로피아노에서 막 포콜라레 양성 과정을 마쳤어요. TV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긴급 뉴스 타전과 함께 폭격 장면이 비쳤어요. 그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으실 거예요. 다행히도 전쟁은 곧 끝났어요. 슬로베니아 내전 직후 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로 가야 했는데, 그곳에서도 전쟁이 번졌어요. 자그레브의 포콜라레 양성 센터는 밀려드는 난민들로 수용소가 돼버렸어요. 고국에서도 겪지 못한 전쟁의 아픔을 크로아티아에서 살며 ‘온몸으로’ 체감해야 했지요.”

 

- 화려한 바로크 풍의 류블랴나대교구 주교좌성당 내부.

 

 

종족별로 종교별로 갈라져

 

‘10일 전쟁’에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로 번져간 전쟁의 가장 큰 폐해는 ‘사람들을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두려움 탓에 세르비아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이주해야 했고, 이는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족별로, 종교별로 이합집산하면서 발칸의 갈등은 증폭됐고 그에 비례해 전쟁은 격화됐다. 그 참혹했던 전쟁이 끝난 지도 이제 16년째로 접어들지만, 종족 간, 종교 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양성 속의 일치

 

자이츠씨는 그래서 “발칸 국가들에겐 ‘다양성 속의 일치’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라며 “전쟁의 상처는 크게 남았지만, 기도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젊은이들에게서 우리는 미래의 희망과 평화의 꿈을 본다”고 말한다. 

 

슬로베니아 출신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 대주교도 “개전 당시 구 유고 연방 공군의 폭격 소식에 매일 저녁 주님 앞에서 평화를 지향으로 열렬히 성무일도(시간전례)를 바치며 화해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분만이 평화를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대화를 증진하며 애덕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안톤 얌니크 주교(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교구 보좌)


과거 박해자들도 끌어안는 화해 사목에 주력

 

 

류블랴나대교구 안톤 얌니크 보좌주교는 공산주의 치하의 박해 얘기부터 꺼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슬로베니아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만 600여 명이 순교했는데, 가톨릭 신자만 골라 처형했어요. 실은 그게 슬로베니아 독립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 됐어요. 슬로베니아는 구 유고연방 내에서 맨 처음 독립을 선포했기에 6개 공화국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르비아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어요. 다행히 슬로베니아에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아 전쟁이 일찍 종식될 수 있었지요.” 

 

그럼에도 얌니크 주교는 “발칸 지역의 평화가 슬로베니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며 “그래서 류블랴나대교구를 비롯한 슬로베니아 교회는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는 데 사목의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힌다. 

 

얌니크 주교는 특히 “과거 박해자였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화해에도 사목의 손길을 뻗고 있다”며 “이는 과거 공산주의 체제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살았든 아니었든 간에 인간의 내면엔 하느님이 있기에 대화를 통해 화해해야 하고, 그래서 이들에 대한 사목에 힘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재위 때부터 류블랴나교구는 특히 화해를 통한 ‘새로운 복음화’에 주력해 왔고, 그 덕분인지 세속화 속에서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이 요즘 들어 교회로 돌아오는 희망적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얌니크 주교는 또 “슬로베니아 교회는 유럽의 최빈국으로 떨어진 세르비아나 보스니아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낫기 때문에 현지 교육 시설 신축이나 증개축을 돕고 있고, 실업률이 거의 25%에 육박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큰 발칸 5개국의 청소년, 청년 사목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슬로베니아도 공산 체제 붕괴 이후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청년 교육에 특히 사목적 관심을 쏟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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