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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6: 어린 날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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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4 ㅣ No.380

[추기경 정진석] (6) 어린 날의 등불


책에 빠져 살던 10살 진석, ‘보미사’를 꿈꾸다

 

 

- 1939년 7월 23일 첫영성체 후 기념 촬영하는 정진석(앞줄 맨 오른쪽). 앞줄 왼쪽부터 당시 명동본당 보좌 노기남 신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 명동본당 주임 비에모 신부, 보좌 조인환 신부. 정진석은 명동성당에서 유아세례, 첫영성체, 견진성사를 받았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외조부와 어머니는 진석이 8살 되던 해 명동성당에 있는 계성보통학교(현 계성초등학교)에 그를 입학시켰다. 외조부와 어머니가 계성학교에 입학시킨 이유는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로 수업하지만 한국어나 한문도 동시에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성학교는 1882년 9월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가톨릭계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계성학교는 초창기 중구 인현동에서 인현서당으로 설립되어 학생 11명으로 시작했다. 1883년 학교를 명동 천주교회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국어와 한문이 주된 교과목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어와 한문은 가르치지 못하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으나, 계성학교는 방과 후 종교 교육을 한다는 핑계로 한글을 계속 가르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진석은 한국어를 쓰고 말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진석이 계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명동의 옛 계성여고 본관 건물이 학사 건물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계성학교의 유일한 건물이었다. 

 

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 3학년이던 10살의 진석은 방과 후면 어김없이 명동을 벗어나 소공동으로 향했다. 주위 한번 둘러보지도 않고 등에 진 책가방을 고쳐 메가며 한달음에 도착한 곳은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뒤, 일본인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 그 옆에 있었고, 그 근방이 일본인들 관공서였다. 일본인 촌(村)인 곳에 지어진 이 도서관에 가면 모두가 일본인 소학생이었고, 진석이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진석은 학교에서 배웠듯이 유창하게 일본말을 했다. 사서는 그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출입을 허락했다.

 

 

어린이 도서관은 별천지 

 

진석은 처음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어린이 도서관은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별천지였고 신세계였다. 양질의 좋은 책은 그곳에 다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인들이 얼마나 미래세대 교육을 열심히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은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난 진석은 이곳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학교가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갔다. 다행히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아 도서관에서 쫓겨나지 않고 매일 책을 한 권씩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학, 과학, 역사, 예술 등 어떤 책이든 눈에 띄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당시 진석은 자신의 판단에 좋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면 빠짐없이 읽으려 했다. 책 읽는 재미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 명동 옛 계성여고 본관 건물. 정진석이 다니던 계성보통학교 건물을 증축한 것이다.

 

 

진석은 얼마 안 가 위인전에 푹 빠지게 됐다. 위인전을 읽으면 마치 자신이 책 속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위인들의 이야기가 그를 설레게 하였다. ‘나도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지!’ 도서관의 위인전이란 위인전은 모두 뽑아 읽었다. 우리나라에서 위인전은 전쟁 영웅이나 장군들, 왕의 이야기가 많은 반면, 당시 일본인 어린이 도서관에는 세상의 유명한 과학자들 이야기가 정치 영웅, 전쟁 영웅보다 더 많았다. 소학교가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독서에 맛 들이며 내내 책을 읽었다. 하루에 책 한 권씩을 읽는 이때의 습관이 성인이 돼서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 어린 진석을 알지 못했다.

 

 

보미사를 하면 어떨까

 

책에 푹 빠진 진석이 또 하나 관심을 가진 것은 다름이 아니라 보미사(補Missa, 오늘날 복사)가 되는 것이었다. 보미사는 진석의 어머니가 권고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미사를 보던 진석이 첫영성체를 받으며 자연스레 보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엄마! 내가 보미사를 하면 어떨까요?”

 

자녀가 신부님 곁에서 미사를 도우면서 보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기특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머니는 이내 어린 진석이 걱정되어 되물었다. 

 

“보미사를 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특히 추운 겨울철에 감기라도 걸리면 빠지게 될 텐데….”

 

명동대성당에서의 미사는 새벽 5시였다. 당시 신자들은 일찍 미사를 하고 일터로 나갔기 때문이다. 진석이 보미사를 하려면 집에서 4시 30분에는 떠나야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살짜리 꼬마가 매일 4시경에 일어나 보미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 걱정 마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도록 할게.” 

 

“그래. 그러면 신부님께 말씀드려보고 허락하시면 보미사를 하도록 하렴….”

 

어머니께 걱정하지 말라며 호언장담하던 진석은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보자는 어머니의 제안에 갑자기 가슴이 떨려왔다. 당장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뵙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막상 신부님께 열심히 하겠노라 다짐을 해야 한다니 어쩐지 손에 땀이 났다. 진석의 작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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