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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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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2 ㅣ No.1630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7]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교황청

 

 

머리말

 

올해 2023년은 대한민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교회사연구소는 “HELLO 대한민국, HELLO 교황청”을 주제로 9월 6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대교구 영성센터에서 가을 학기 공개대학을 열고, 박해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1948년) 이전부터 교황청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시작은 1947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P. Byrne, 方溢恩, 1888~1950) 몬시뇰의 부임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최초의 외교 사절이 바로 교황사절이라는 점은 신생 국가 한국에 큰 힘이 되었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도 교황청은 한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훗날 성 바오로 6세 교황) 대주교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훗날 성 요한 23세)가 유엔 한국 대표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이 내린 지시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엔 한국 대표단 수석대표 장면(張勉, 1899~1966) 박사는 한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는 쾌거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어엿한 국제사회 일원으로 인정받도록 힘쓴 주체가 바로 교황청이다. 이 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교황청의 관계를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의 역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과 교황청의 수교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1963년 12월 11일 공사급 외교 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정식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교황청에서 한국에 교황사절을 파견한 데 불과하였다. 교황사절은 원래 국가를 대상으로 파견되는 외교관이 아니라 그 지방의 교회에 파견되는 사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황사절에서 교황대사로 승격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교황사절의 파견을 외교 관계 수립의 전 단계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한민국과 교황청 외교 관계에서도 먼저 교황사절의 파견부터 보아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이 파견된 것은 1919년이었다. 이때 교황청은 일본에 교황사절관을 설치하고, 주일본 교황사절이 한국의 교황사절까지 겸하게 했다.

 

 

 

위 인용문은 3·1운동 이후 교황청과 협약을 맺은 일제가 상호 간에 문제가 발생할 때 도쿄(東京)에 있는 교황청 대표자가 이를 처리한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에 따라 교황청은 일제와의 채널을 상시화하고, 필요한 조치는 교황청 대사를 통해 전달하기로 하였다. 이 사건은 교황청이 한국 교회의 외교 채널을 독점하고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2)

 

광복 이후 교황청은 처음으로 한국 교회에 고유한 교황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가 1947년 7월이었다. 이때 메리놀 외방전교회 패트릭 번 신부가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황사절의 권한은 갖고 있었으나, 직함은 정식 교황사절이 아니라 교황 순찰사(敎皇巡察使, Apostolic Visitor)에 불과하였다. 1949년 4월 7일 교황 비오 12세의 친서로 서울에 상주 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고, 동시에 번 신부도 주교로 임명되어 6월 14일 명동 대성당에서 서품식을 가졌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번 주교는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죽음의 행진’ 끝에 선종하였다.3) 이에 따라 일본의 교황사절 퓌르스텐베르크(M. de Fürstenberg) 대주교가 한국 교황사절을 겸임하였고, 1953년부터는 춘천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이 교황사절 서리를 겸임했다.

 

1957년에는 람베르티니(E.R. Lambertini) 대주교가 제3대, 1960년에는 주피(X. Zupi) 대주교가 제4대, 1962년에는 델 쥬디체(A. del Giudice) 대주교가 제5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과 교황청 간에 공사급 외교 사절 교환이 합의되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12월 11일 한국에 교황 공사관(lnternuntiatura Apostolica)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델 쥬디체 대주교가 초대 교황 공사로 승격되었고,4) 한국 정부는 당시 주 스위스 이한빈(李漢彬) 대사에게 주교황청 초대 공사를 겸임하게 하였다.5) 이한빈 공사는 1964년 4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제정(提呈)하였다.

 

1966년에는 양국이 공사급 외교 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6년 9월 5일 자로 한국에 교황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이에 델 쥬디체 교황 공사가 교황대사로 승격되고, 정일영(鄭一永, 1926~2015) 당시 주스위스 대사는 교황청 대사를 겸임하게 되어 1967년 1월 30일 교황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6)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교황사절 패트릭 번의 활동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8월 12일 초대 평양지목구장(1927~1929)과 초대 일본 교토(京都)지목구장(1937~1939)을 지낸 번 신부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이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주재 교황사절 마렐라(Paolo Marella) 대주교가 그에게 한국에 갈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기꺼이 찬성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때 번 신부는 항구적으로 머물러야 할 공식 지위에 관한 질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얼마 후 교황사절로 임명받은 것이었다.

 

패트릭 번은 1947년 10월 9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교황청의 교황사절 임명이 미친 효과는 매우 컸는데, 국제법과 외교 관례상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과 각 정치단체 및 교회 역시 국가로서의 교황청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국 교회에서는 교황사절 환영 준비위원회(위원장 이기준 신부)를 구성하고, 10월 12일 오전 10시에 명동 대성당에서 미사와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각 교구장과 성직자 이외에도 군정 사령관 하지(J.R. Hodge) 중장 대리 헤렌(T.W. Herren) 장군, 헬믹(C.G. Helmick) 군정장관 대리 등 50여 명의 미군정 관리와 서재필, 김구, 안재홍,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참석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조선의 독립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교황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므로 거국적으로 경하 감사한다.”고 하였고, 서재필 박사는 “사절은 조선을 오랫동안 체험하신 만큼 조선의 현실을 가장 명백히 알아보실 것은 우리의 큰 행복이다.”라는 요지의 환영 축사를 하였다. 패트릭 번은 “교황 성하께서는 여러분의 행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고 … 진정한 자주적 민주주의의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여러분의 굳센 신앙이 크게 이바지하리라는 깊은 신뢰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답사하였다.

 

천주교 언론도 패트릭 번 교황사절 임명을 반겼다. 『가톨릭청년』은 “조선이 독립될 것은 카이로(1943년 11월 27일), 포츠담(1945년 7월 26일) 회담에서 공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느 한 나라도 독립을 승인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교황청에서는 제국에 솔선하여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조선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며 국제 공약 이행을 추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사절의 내조(來朝)는 조선 역사상 획기적 성사(盛事)이며 역사적 의의가 깊다.”7)라고 하였다. 『경향신문』도 “우리는 이로써 그것이 비록 국제법에 따라 승인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미 운동을 통하여 신앙을 통하여, 두 번째 독립을 승인받았다고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장면(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교황청에서 단연 솔선하여 우리 조선을 종교적 견지에서 일개 독립 국가로 승인하여 주는 것은 일대 영단인 동시에 열강에 대한 정의의 시범이다.…금번의 교황사절 파견은 우리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고도로 향상시켜 준 것”이라고 하였다.8)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7월 20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번 교황사절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교황 비오 12세의 축전9)을 발표하고, 외교 사절 대표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사를 하였다. “교황청에서는 한국 국민에 대한 오랜 이해와 함께, 한국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과 이제 새롭게 구성된 정부가 조화롭게 통치할 것임을 충실하고 신중하게 확신합니다. 또한 세계의 자유주의 국가들의 존경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될 것도 확신합니다. 교황청은 한국에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보내는 결정을 내리고, 이 나라를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신속히 인정하는 결정을 내린 유엔의 형제적 관심과 완전히 일치를 이루어 왔습니다.”

 

9월 9일에는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천명하고, 유엔 승인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번 교황사절이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 캐나다 외무장관 생 로랑(L.S. St. Laurent)과 주캐나다 교황사절 안토니우티(Ildebrando Antoniutti) 대주교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과 지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해 9월 21일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캐나다가 한국 정부 승인을 반대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 등 공산국가와 캐나다·호주·인도 등 영연방 국가 사이에서는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10)

 

패트릭 번은 대한민국 정부를 거국 정부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로 첫째, 유엔의 위임을 받아 도덕적이고 전 세계를 대표하는 위원단의 활동에 의해 수립된 정부는 거국 정부로 인정할 만하다. 둘째, 남한 인구는 한국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며, 그 가운데 91%의 유권자가 투표하였고 처음으로 여성도 참정권을 행사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므로 ‘거국 정부’로 인정할 만하다고 강조하였다.11)

 

요컨대 번 교황사절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선, 그의 교황사절 임명과 입국에 대해 교회와 국가 지도자들은 바티칸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교회 내 활동은 물론 외교 사절들을 대표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하였고, 특히 한국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 승인받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맺는말

 

교황 비오 12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4월 7일 패트릭 번 신부를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는 국제 관례상 교황청이 남한을 주권 국가로 승인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교황사절 파견이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국가로 승인해 준 정의의 결단이며,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켜 준 것이라고 환영하였다. 그리고 이후 진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역시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의 긴밀한 교류 속에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는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 특별기획전 「모든 이를 위하여」를 2023년 10월 12일(목)부터 12월 24일(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다. 박해 시대부터 이어온 대한민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되새기며, 전시 취지처럼 ‘모든 이를 위하여’ 지향해야 할 공동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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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주교회보」, 『경향잡지』 434호(1919년 11월).

 

2) 박문수, 「일제하 천주교단의 친일활동」, 『역사비평』 23, 1993, 145쪽.

 

3) 최선혜,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참조.

 

4) 최근 교황대사는 제11대 알프레드 슈에레브(Alfred Xuereb) 대주교(2018~2023년)인데, 지난 2023년 6월 몽골 교황대사로 이임하면서 현재는 1등 서기관 페르난도 두아르치 바로스 헤이스 몬시뇰이 대사직을 대행하고 있다.

 

5) 오늘날 바티칸 외교망은 공산권을 제외한 세계 전역에 뻗쳐져 있는 만큼 이러한 강력한 외교진용을 가진 성청(聖聽, 교황청-필자 주)과 이번에 우리나라가 공사 교환을 하게 된 것은 우리 외교의 전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한국·성청과 외교 수립」, 『가톨릭시보』 12월 25일 자).

 

6) 이후 1967년 정일영 주스위스 대사가 초대 대사를 맡았다. 겸임이 아닌, 첫 주교황청 상주 대사는 1974년 부임한 초대 해병대 사령관 출신 신현준(요아킴) 대사였다. 그는 최초의 가톨릭 신자 주교황청 한국 대사이기도 하다. 현재 주교황청 한국 대사는 신현준 대사를 초대로 삼고 있다. 이후 가톨릭 신자 출신이 대사를 맡는 전통이 유지되었으며, 현재 제17대 오현주(그라시아) 대사가 활동 중이다.

 

7) 「교황사절을 맞이하여」, 『가톨릭청년』 1947년 10월호.

 

8) 「번 주교 조선주재초대교황사절」, 『경향신문』 1947년 10월 11일 자.

 

9)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중대한 책임감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이승만 대통령과 새 정부의 모든 각료를 지켜주시고 강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한국 전체가 통일과 평화, 행복을 이루도록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환영하는 내용이었다.

 

10) 당시 선거를 치르는 지역이 38선 이남에 국한되어, ‘거국 정부(擧國政府, National Government)’로의 인정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캐나다는 유엔에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남한에 국한된 선거로 탄생하는 정부를 ‘거국 정부’로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입장이었다.

 

11) 최선혜, 앞의 논문, 368~369쪽.

 

[교회와 역사, 2023년 12월호,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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