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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교회와 아르메니아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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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4 ㅣ No.379

아르메니아 교회와 아르메니아 대학살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150만 명 집단 학살

 

 

프란치스코 교황의 14번째 사목 방문지 아르메니아는 터키 동부와 러시아 남부에 있는 캅카스 3국 가운데 하나다. 

 

고대 시대에 ‘아라랏’으로 불린 이 지역은 구약의 무대였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창세 8,4)에 내려앉고, 아시리아 임금의 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라랏 땅(이사 37, 38)으로 도망쳤다고 성경은 전한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다. 우상 숭배를 거부한 채 우물에 14년 동안 갇혀 살던 수석 주교 성 그레고리오(257~331)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자 왕이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국민의 93%가 동방정교회로 분류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 속해 있다. 451년 칼케돈공의회가 그리스도 단성론(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신성만 인정하는 것)을 배격하자, 이 지역 단성론자들이 로마와 결별을 선언한 후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사도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가톨릭 교회 신자는 6% 정도인데, 이도 라틴 전례와 다른 고유한 전례를 갖고 있어 ‘아르메니아 (동방) 가톨릭’으로 불린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이슬람계인 오스만 튀르크 제국(현 터키)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두 차례에 걸쳐 변방의 소수 민족인 그리스도교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특히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 손잡는 것을 막기 위해 1915년부터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약 150만 명에 달한다. 현재 인구 328만 명과 비교하면 참상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터키는 숫자가 부풀려졌을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측에 가담하면서 촉발된 내전 중에 발생한 희생이라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4월 아르메니아 참사 100주년 기념 미사에서 이 참극을 ‘대학살(genocide)’이라고 규정하자 터키 정부가 교황 대사를 소환하는 등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김원철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 아르메니아 사목 방문… 아라랏산 향해 ‘희망의 전령’ 비둘기 날려


“대학살 고통 이겨낸 힘은 뿌리깊은 신앙”

 

 

- 프란치스코 교황과 카레킨 2세 총대주교가 6월 26일 ‘희망과 평화’를 염원하며 아라랏산을 향해 비둘기 한 쌍을 날려 보내고 있다. [아르메니아=CNS]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세기의 대학살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캅카스 지방의 작은 나라 아르메니아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날렸다.

 

6월 24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아르메니아 사목 방문에 나선 교황은 26일 아르메니아의 최대 성지인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에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카레킨 2세 총대주교와 함께 아라랏산을 향해 비둘기 한 쌍을 날리며 ‘희망의 전령’이 되어 주었다.

 

아라랏산은 대홍수 때 노아가 방주에 몸을 싣고 도착해 물이 다 빠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날려 보낸 곳(창세 8장 참조)으로 알려져 있다. 그 비둘기가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와 노아의 방주에 희망을 전했듯, 교황은 위로와 희망을 갈망하는 아르메니아에 “미래의 희망이자 삶의 길을 밝히는 불빛은 바로 신앙”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의 이번 방문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대학살의 고통을 위로하고,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일치를 이루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교황은 방문 첫날인 24일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아르메니아를 “가장 비극적인 순간(1915년 대학살)에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선 민족”이라고 칭송하고 신앙의 깊은 뿌리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어 “대학살의 고통을 이겨낸 아르메니아의 힘은 신앙에 있다”고 강조하고 “어려움을 극복해낸 경험을 토대로 분쟁과 갈등, 고통이 혼재하는 국제사회에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25일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을 방문해 희생자들을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인류가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염원하는 글을 방명록에 적었다. 이 자리에는 대학살 기간 중 비오 11세 교황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난민의 후손들이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 

 

교황은 특히 미사 강론과 연설 때마다 아르메니아의 수호자 나렉의 성 그레고리오(257~331)의 삶과 영적 유산을 거듭 상기시켰다. 성 그레고리오는 박해 시대에 14년 동안 우물에 갇혀 살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이다. 

 

교황은 25일 제2의 도시 규므리에서 야외 미사를 거행하면서 “자비의 빛은 분노의 어둠에도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인의 말씀을 인용, “성인은 고통과 상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가두지 말고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마음을 열라고 재촉한다”고 역설했다.   

 

성직자들과 함께 거행한 거룩한 전례에서는 “여러분의 스승이신 그레고리오 성인이 이 땅을 비추었던 그 신앙의 빛에 용서와 화해의 빛이 일치되기를 바란다”며 종교 지도자들이 용서와 화해의 다리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전신인 터키 정부가 대학살을 인종 말살 정책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지칭하는 데 반발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에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에 대해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의 의도는 상처를 기억하면서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소탈하고 격의 없는 행보로 아르메니아인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교황 특유의 카리스마에 대해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은 방문지마다 항상 그곳 국민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며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2014년) 한국 방문이 그 예다”고 말했다. 

 

교황은 오는 9월 30일에도 아르메니아 인접국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방문, 캅카스 지방 3개국 교회와 일치하면서 그곳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여정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한편, 교황은 24일 아르메니아행 기내에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관한 수행기자들 질문에 “영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며 “영국은 유럽 대륙의 행복과 공존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김원철 기자]

 

 

교황은 왜 아르메니아 학살을 ‘제노사이드(인종대학살)’라고 지칭했나

 

“거대한 악,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 25일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에 찾아가 희생자들 영령에 헌화하고 있다. [아르메니아=CNS]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터키 정부가 예민하게 반응할 것을 알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오스만 튀르크(현 터키) 통치자들이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을 학살한 참극을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지칭했다. 지난 6월 24일 아르메니아 대통령궁 연설에서다. 

 

터키 외무부는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역사가들이 희생자 수를 부풀린 데다 우리도 충돌 과정에서 피해를 봤다”며 “교황의 편견이 터키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또 “교황의 그런 인식은 캅카스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지난해 4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한 대학살 100주년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도 똑같은 단어를 썼다. 그때 터키 정부는 항의 표시로 바티칸 주재 대사를 자국으로 소환했다.

 

 

터키 반발에도 소신 굽히지 않아

 

아르메니아 학살은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던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틈을 이용해 오스만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봉기했다. 그러자 오스만은 봉기를 무력화하고, 남진하는 러시아와 아르메니아가 합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성들을 강제 징집해 집단 사살하거나 노역장으로 몰아넣었다. 사막으로 추방된 부녀자와 노약자는 대부분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르메니아는 희생자 수가 150만 명, 터키는 5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야만의 역사에는 두 나라 사이의 해묵은 종교적 갈등이 깔려 있다.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국가 아르메니아는 인접한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수난을 당할 때마다 신앙의 힘으로 시련을 이겨냈다.

 

-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아르메니아 쉐사란 마을에서 촬영한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관]

 

 

‘민족(인종) 대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는 인류 사회가 단죄하는 범죄 중의 범죄다. 가해자 입장에서도 어떤 잔악 행위에 제노사이드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건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다. 독일이 아직도 유다인 대학살의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터키 정부는 이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교황의 24일 연설 원고에는 애초 제노사이드란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20세기의 첫 제노사이드라고 불리는” 정도의 표현 수위였다. 15년 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했던 표현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에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의 의도는 상처를 기억하면서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수행 기자들에게 진의를 부연 설명해야 했다.

 

교황은 사목 방문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했다.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다. 달리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그들(터키)은 항의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항의 때문에 같은 사건에 다른 단어를 쓰면 낯설게 들릴 것이다. 나는 다른 무엇을 강조하려고 했다.”

 

교황은 이어 “지난 세기에 3번의 제노사이드가 있었다는 게 내 소신”이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첫 번째는 오스만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두 번째는 나치의 유다인 대학살, 나머지 하나는 스탈린의 인민 대숙청이다. 이 모든 비극은 1, 2차 세계대전의 연속 선상에서 일어났다.”

 

 

연합국은 왜 거대한 악을 방관했나  

 

교황은 강조하려고 했던 ‘다른 무엇’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방 강대국으로서는 새삼스레 들춰내고 싶지 않은 얘기다. 진실을 파헤치면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은 이런 비극을 다른 각도에서 봤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어떤 강대국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연결되는 철로 사진(항공사진)을 다 확보했다. 철로를 폭격할 능력이 있는데도 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상황 속에서 아르메니아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2차 세계대전 상황 속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문제는 어디 있는가? 얄타회담(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열린 승전 연합국 회담)에서 누구도 그것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수용소에서 대학살이 자행되는 것을 알면서도 연합군이 군사 작전을 우선하느라 그 거대한 악을 방치한 데 대한 비판이다. 반유다주의가 팽배한 연합군 수뇌부가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얄타회담 건은 연합국이 악을 심판하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패전국 처리 과정에서 자국 몫을 챙기느라 옥신각신한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이 대화 말미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 앞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들(강대국)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평화신문, 2016년 7월 10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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