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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2: 아일랜드-프랑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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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56

[새로 보는 교회사 2] 아일랜드-프랑스 교회

 

 

3. 아일랜드-프랑스 수도 정신

 

아일랜드에서 켈트족의 전통과 맞아 떨어진 수도회가 프랑스 북부에까지 확산이 되면서 어떤 수도 정신으로 살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책이 있다. “골롬반의 규범집”(Sancti Columbani Ppera)이라는 것으로 1957년 더블린에서 발간이 되었다. 이 규범집은 ‘수도자들의 규칙’(Regula Monachorum) 그리고 ‘수도 생활의 규칙’(Regula coenobialis) 등 규칙서들과 ‘회개(속죄) 규정’(Penitenziale)과 골롬반 성인의 강론들과 수도자들에게 보낸 서한들과 성인의 시들을 가지고 만들었다. 그 규범집 안에는 야만적인 풍습을 순화시키려는 성인의 뜻이 많이 담겼다.

 

그러나 이 규범집의 어떤 자료들은 성인의 작품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다. 특히 ‘속죄 규범’이나 ‘규칙서’들은 골롬반 성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아일랜드 교회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골롬반 성인 역시 밴고르(Bangor)에서 아일랜드 교회의 전통에 따른 규칙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규범집은 수도회의 관습(태형이나 금식)과 정신을 알게 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회개 규정은 6세기 초반의 한 수도원 원장이 신자들과 수도자들, 즉 자신의 수도원의 주민, 수도자, 신자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만든 교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회개 규정집이 일반화하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체 교회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간략하게 소개를 한다면 먼저 고해성사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고백을 장려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먼저 이러한 아일랜드 교회의 ‘개별 고백’과 ‘잦은 고백’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고해성사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회개에 관한 제도는 3세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제도가 형성되는 데는 데시오 황제의 박해와 발레리아노 황제의 박해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황제의 박해 때 많은 배교자들이 나왔는데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가 어떻게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무조건 용서할 수 없다는 엄격주의와 다른 하나는 전반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로 주교가 용서를 해주되 몇 년 동안의 적절한 회개 생활 이후에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이 제도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엄격성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본질적으로 회개와 용서는 엄격하게 이어져 왔다.

 

당시에 말하는 회개는 공개적인 것을 뜻한다. 큰 죄는 오랜 기간 동안 회개 생활을 한 뒤 공개적으로 엄숙한 전례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 소죄, 즉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나 결함이 원인인 경우에는 개별 고백이 아닌 기도와 단식과 선행 등으로 용서가 되었다. 큰 죄에 관해서는 회개하는 과정과 용서하는 의식이 필요했는데, 공적 회개의 필요성은 사제가 판단하였다. 이럴 때는 먼저 사제가 비밀로 죄의 고백을 듣고 공적 회개를 청하게 한다. 어떤 죄들이 이에 해당하느냐는 것은 당시 교부들이 작성한 목록이 있는데, 대체로 십계명을 위반했을 경우는 공적 회개를 해야 했다.

 

공적 회개는 세 단계를 거치는데, 먼저 회개를 죄인이 요구하고, 회개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주교가 확인하고, 공적인 용서를 하는 단계이다. 회개자가 회개를 청한다는 것은 회개자가 죄인처럼 청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과 함께 신비체의 일원인 신자들에게 기도로 동참해 주길 청하는 것이었다. 회개자들의 등록이 끝난 다음에 신자는 회개자의 옷, 삼베 옷을 입고 주교나 사제가 명한 고행을 여러 해에 걸쳐 마쳐야 한다. 회개 생활은 단식이나 금육, 유흥이나 좋아하는 것을 금하거나, 자선 행위나 기도같이 개인적인 것도 있고, 회개자석(席)에 앉아서 전례에 참여하는 공개적인 것도 있었다. 사순 시기에는 특별히 이런 회개자들을 위한 전례가 많았다. 이 기간 동안에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였고 미사 참례까지도 제한되었다. 모든 회개 행위를 마치지 못하면 사죄가 되지 않았다. 이런 엄격성은 신자들의 생활이 해이해지는 것은 막았지만 고해성사의 제도적인 발전을 저해하였다. 사죄는 주교가 신자들이 모인 앞에서 안수로써 성대하게,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이 성사를 세우신 성목요일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신자는 다시 성체를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은 이와는 달리 죄의 개인 고백을 장려하였고 어떤 때는 날마다 하도록 하는 제도를 자주 사용했고, 이는 고행 훈련의 통상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 규정에 대해서 스페인 교회는 589년 툴레도 공의회에서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고 비난을 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이러한 개별 고백의 관습은, 요즘의 일부 수도원에 남아 있는 장상에게 하는 고백이나 양심 성찰 정도가 아닌 고해성사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고, 이 새로운 형태는 주변에 사는 평신자들도 수도원 원장이나 사제를 찾아와서 개별 고백을 청함으로써 고해성사가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회개 규정집’은 죄와 보속의 관계를 아주 명확히 법전처럼 규정하고 있다. 죄의 크기와 회개자의 자리에 따라(수도자와 사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른 일반 신자보다 보속이 무겁다.), 죄를 짓는 의지의 정도에 따라 보속이 달라지는 것이다. 훈계나 선행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살인이나 간음은 여러 해(수도자나 사제는 3~4년, 신자는 1~2년) 동안 빵과 물만으로 살아야 하고, 소죄 같은 경우는 여러 날을 빵과 물만으로 살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또 재미있는 것은 길게 해야 하는 속죄를 짧으나 무척 힘든 고행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일년 동안 빵과 물만으로 생활하는 보속 대신에 사흘을 잠자지 않고 밤낮으로 고행소나 경당에서 쉬지 않고 시편 등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규칙’은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수도자의 중요 덕목에 관한 규정이다. 순명, 고행, 그리고 겸손 등으로, 전체적인 정신은 수도자를 완덕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순명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것과 같아야 하고, 수도자 고행은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나에게는 우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나이다.”(갈라 6,14)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의 검소함은 먹는 것에서 알 수 있는데 빵과 채소와 콩 종류만 먹고 살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먹는 행위와 같이 했다.

 

‘수도 생활의 규칙’은 실제로는 수도원의 고행을 말하고 있다. 고백과 고행이 죽음에서 구원하기 때문에 식사 전이나 잠자기 전에 빠뜨린 일이나 결점 등을 고백하고, 그에 맞갖는 정확한 명령에 따라 고행하게 하는 것이다. 태형, 금식, 침묵, 용서를 청함이나, 좁은 방의 감금 등을 통하여 영혼을 치유하고 좋은 습관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는 강압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형제적인 사랑으로 하는 고행일 때가 많았다. 또한 여기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었고, 보속을 명하는 사제 역시 보속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함 속에서도 구분은 있었고, 수도자의 덕목 가운데는 전통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예를 들어 대축일에는 맥주를 조금은 허용하였고, 수도자들의 생일에는 시 낭송 등으로 작은 잔치를 벌이는 것을 허용했던 것이다. ‘법규집’에서 규정하지 못하는 특수한 사정의 수도원을 위해서는 골롬반 성인이 한 여러 가지 강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였고, 다른 부족한 규정이나 특수한 상황들은 성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활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4. 아일랜드-프랑스 수도원의 발전

 

독특한 문화와 관습 속에서 생성된 성 골롬반의 수도원과 그 회칙은 모든 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성인 자신도 이런 점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낭트에서 아일랜드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성인은 거기서 아일랜드 수도원의 분위기와 프랑크-부르군디 수도원의 분위기는 서로 많이 다르니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켰는데, 그 차이는 바로 교회의 모든 관습과 전례의 차이였다.

 

아일랜드의 켈트족의 관습과 함께 생성된 전례는 로마 전례와 많이 달랐다. 이런 독특한 전례는 아일랜드가 로마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도 있지만, 켈트족의 관습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가운데 특히 세례 의식과 삭발하는 모양과 부활 주일 날짜를 정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였다. 특히 부활 주일을 정하기 위한 날짜 계산의 차이는 브루군디 지방에서는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

 

켈트족은 인종적으로만이 아니라 언어와 함께 고유한 전례를 고집하였고, 골롬반 성인과 아일랜드에서 온 수사들은 이것을 고수했는데, 반대로 부르군디 지방은 로마 전례를 수용하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계의 지도자는 성 에우스타시오였고 그는 골롬반 성인이 593년에 세운 보르고뉴 지방 룩솔(Luxeui1) 수도원을 떠나서 다른 지방에도 아일랜드 관습의 수도원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나 부르군디 사람들은 테오도르 2세의 궁정에서 일한 적이 있는 귀족 아그레시오를 주축으로 아일랜드 관습과 에우스타시오 성인의 이와 같은 확장에 반대하였다. 628년에는 마콘의 공의회에서 논의가 있었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하다가 에우스타시오가 629년 사망하고 후임자인 성 발데베르토 때부터 화해가 이루어졌다. 스위스에서는 다툼은 없었지만 성 갈로가 사망한 뒤에 수도원이 사라졌고, 보비오의 수도원 역시 큰 진통을 겪은 후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크게 네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북부의 네우스트리아(Neustria), 서남부의 아퀴타니아(Aquitania), 동북부의 아우스라시아(Austrasia), 동남부의 부르군디아(Burgundia)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구분은 클로비스가 죽은 뒤 게르만의 관습에 따라 그 아들들에게 왕국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생겼다. 부르군디는 534년경에 부르군디 왕국이 없어지고 프랑크 왕국의 한 지방이 되었다.

 

그런데 부르군디 지방에서와는 달리 골롬반 성인의 업적이 네우스트리아 지방의 고위층 귀족으로부터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귀족들(영주 · 주교)이 룩솔 수도원의 수도 형태에 따른 남녀 수도원들을 여러 곳에 세우면서 귀족 사회가 주교좌를 장악하였고 이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골롬반의 수도 규칙은 통상적으로 확산 발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규정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발생하는 여러 가지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규정이 필요했다. 이에 에우스타시오는 아일랜드 관습을 포기한 경우는 있었으나 골롬반 성인의 규정은 엄격히 고수했다. 반대로 후임자 발데베르토는 성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수도 생활의 질서를 잡으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혼합 규칙”(Regulae mixtae)을 적용하면서 아일랜드-프랑스계 수도원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에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여자 수도원을 위해서는 어떤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발데베르토는 동정녀들을 위한 규정을 만들었다. 이 규칙은 골롬반 성인과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동등하게 적용하였고, 파레무티(Faremoutiers)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또 배상송의 주교였던 도나토가 만든 ‘도나토 규칙’은 성 체사레오와 성 베데딕도와 성 골롬반의 규칙을 혼합한 것으로 더욱 엄격한 것이었다. 이렇게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과 규칙을 완화하고 보완한 것은 아일랜드계 수도원의 활동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대륙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도 차츰 봉건 제도 속에 흡수되어 갔고, 지방 영주들 즉 주교나 귀족들의 간섭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유명한 필사실 운영과 선교 활동과 교육 역시 지방 영주의 권한에 예속이 되었다.

 

어쨌든 아일랜드 교회는 대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아일랜드 수사들이 있는 곳은 당시 지역 교회 앞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곳이었는데, 이런 자치권은 7세기 전체를 통해 아일랜드계와 지역 교회가 다투는 원인이 되었다. 많은 수도원이 지역 교회에 흡수되었지만 성 푸르세오 등은 끝까지 아일랜드 교회의 관습으로 남기를 고집했다. 아일랜드 교회의 관습이 대륙의 법 정신에 영향을 끼치면서 카롤링거 왕조와 그 후대의 오토 왕조에까지 지속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자들의 선교 정신은 단순히 수도 정신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상황으로는 아주 중요한 선교에 관심을 두게 하였다. 아일랜드 교회는 고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교들과 마찰할 때는 로마 교황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로마의 권위를 향상시키는 등 로마하고 연결 문제에서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서관 운영이라든지 문화적인 보존 발전 문제는 앞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다음부터는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생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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