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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3: 동방 교회 수도자들이 로마 수도 생활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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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57

[새로 보는 교회사 3] 동방 교회 수도자들이 로마 수도 생활에 끼친 영향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 생활(581-755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 생활은 주변 상황과 교황들의 정책에 따라 많이 좌우되었다. 중세 초기의 이탈리아의 수도 생활은 두 가지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 첫째는 롱고바르디족의 침입으로 생긴 상황이고, 두 번째는 비잔틴(동로마 제국) 교회의 박해와 이슬람의 소아시아 지방 침입 때문에 로마로 망명 온 수도자들이 만들어낸 상황이다.

 

롱고바르디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한 마지막 야만인들이다. 이들은 반도를 침입하여 왕국을 세우고 로마와 가톨릭 교회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교황령을 형성하는 원인도 이들이 제공한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야만인의 침입으로 인한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이다. 문화 수준에서 뒤떨어진 그들은, 이교도이거나 가톨릭이 아닌 아리아니즘(4세기에 아리우스(Arius)는, 성자는 성부께 종속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3l년)를 열어 이를 단죄하였다. 아리우스 추종자들은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민족들을 개종시켰고,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한 이들은 지나는 지방마다 약탈, 방화, 살육을 일삼으며 마을을 황폐화시켰는데, 이때 교회도 큰 피해를 당했다.)으로 개종한 이들이었다.

 

롱고바르디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하기 전에도 게르만 민족들은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395년)부터 소그룹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했다. 401년부터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북부에 들어와 410년에 로마를 침입하고 약탈함으로써 공포를 조성했으며, 이들이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지나가는 동안에 무질서가 가중되었다. 서고트족 다음에는 451년경에 반달족이 이탈리아 북부에 침입하였다. 대 레오 교황의 담판으로 로마의 약탈은 일시적으로 면하였으나, 453년에는 무방비 상태의 로마를 침입하여 서고트족보다 더 악랄하게 약탈하고는 돌아갔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종말을 고한다. 오도아케르 역시 489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코에게 493년에 살해되었다.

 

동고트 왕국을 세운 테오도리코의 권력 아래 놓인 이탈리아는, 초기에는 왕의 종교 구분 정책으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왕이 아리아니즘과 가톨릭을 구분하여 두 민족이 서로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엄격하여, 왕에게 총애를 받던 가톨릭의 한 부제가 더 큰 총애를 받기 위해 아리아니즘으로 개종을 하자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왕에게도 충실하지 않은 자다.” 하면서 사형을 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종족, 언어, 종교의 차이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등으로 오래가지 못하면서 불협 화음의 사건들이 일고 왕은 점점 가톨릭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535년에 발발한 전쟁은 55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동고트 왕국은 멸망하고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일시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이렇듯 비잔틴 제국이 잠시 지배하다가 568년에는 롱고바르디족이 이탈리아 북부에 침입하여 파비아에 수도를 둔 왕국을 건설하였다. 동시에 키우시(Chiusi), 스폴레토(Spoleto), 베네벤토(Benevento) 등에는 공작령이 섰다. 그들도 아리아니즘의 선봉자였다. 그들은 약탈자이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교회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국은 무정부적인 권력 분산으로 공작령이 강화되었다. 이에 지역과 지배자에 따라 교회 약탈도 다르게 나타났다.

 

이탈리아 반도는 동고트족과의 긴 싸움이 끝난 후에 롱고바르디 왕국과 로마 공국으로 나뉘었다. 로마는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비잔틴 제국 자체가 무질서하고 이슬람의 공격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롱고바르디의 위협에 떨었다. 이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전쟁의 공포뿐만 아니라, 페스트와 같은 유행병과 흉년과 기아가 겹쳐서 무질서의 극치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에 교회와 로마의 질서를 되찾고 통치하는 분이 대 그레고리오 교황 이후의 교황들이다.

 

롱고바르디왕은 롱고바르디인들이 가톨릭 전례로 세례받는 것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592년부터는 로마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황의 가장 큰 임무 가운데 하나가 이들의 침입을 막고 평화를 꾀하는 일이었다. 평화는 잠정적이었다. 결국 칼 대제에 의해 롱고바르디 왕국이 없어지고 교황령이 형성될 때까지 교회의 자유와 로마의 질서는 늘 위협을 받았다.

 

야만인들의 침입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로마 교회가 얼마나 어렵게 지탱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동방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먼저 페르시아가 비잔틴 제국의 무질서를 틈타 제국을 축소시켜 나갔다. 611년에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많은 수도자들이 거처하던 지역인 카파도치아, 시리아 등을 점령하였다. 614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동방의 수도자들이 로마로 피해오기 시작했다.

 

에라클리오(Eraclio) 황제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소아시아를 얼마간 회복했지만(628년), 곧 그 뒤를 이어서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형성되고 이들은 성전(聖戰)을 내세워 세계 정복에 나선다. 이들은 모든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633년 예루살렘, 638년 안티오키아, 643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세 총대주교좌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망명을 오게 된 것이다. 동방의 수도자들이 로마로 피신해 오면서 로마는 신앙의 중심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 동방의 단성론자(單性論者)들에 대해 적절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망명 수도자들은 전쟁과 이단 앞에서 로마 교회의 커다란 힘이 되고, 서방 교회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롱고바르디 침입 후의 수도 생활

 

롱고바르디는 로마 문화와 가톨릭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정책 또한 일률적이지 않았다. 공작령이 강한 곳은 교회가 파괴되었으나 안전한 곳도 있었다. 예를 들면 베네벤토의 공작 조토네(Zotone)는 581년경에 베네딕도 성인이 세운 몬테카시노를 폐허화시켰으나, 롱고바르디 왕 아지룰포(Agilulfo)는 골롬반 성인이 보비오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보호해 주었다. 이렇게 당시 수도자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은둔처나 경당이나 수도원의 문서들은 대개 침입자들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주교들의 사목 조직 속에 나타나는 수도자들의 기초적인 구조는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로마로 도망온 수도자들을 보호했던 기록도 나타난다. 롱고바르디의 박해는 재생 불가능하지는 않아 뒷날 수도 생활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롱고바르디가 침입하지 않은 곳에선 수도 생활이 지속 · 발전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기록부’(Registrum)나 역대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 등에는 이들 수도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사르데나 섬이나 시칠리아 섬의 수도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들 수도원의 수사들과 동방에서 피난 온 수도자들은 바로 롱고바르디족이나 앵글로 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한 선교사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다스리던 지역과 로마에서는 수도 생활이 동방 교회의 전통에 접목하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로마 공국의 시민들은 전쟁과 기아와 흑사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다고 말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90년에 성모 설지전 대성당으로 향하는 기도 행렬을 주도했다. 이 기도 행렬은 일곱 그룹이 참여했는데, 계속해서 ‘자비를 구하는 기도’(Kyrie eleison)를 바쳤다. 이 그룹에 남자 수도자와 여자 수도자들이 장상들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과부 집단과 백성들도 함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의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대성당이나 공동 묘지를 가진 수도원으로 구성되었고, 고행은 주변의 집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수행했다. 세바스찬 카타콤바와 4대 대성당 옆에 수도자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남녀 수도자들이 전례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곁에는 ‘성 요한과 바오로’라는 이름의 대수도원이 있었고, 영국에 로마의 전례를 전달한 성 마르틴 수도원도 있었다. 성 바오로 대성당의 부속 수도원은 성 스테파노 여자 수도원과 성 체사레아 남자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많은 수도원들이 성모 대성당이나 성 안드레아 성당, 성 라우렌시오 성당, 성 아드리아노 성당 주변에 운집해 있었다.

 

로마의 수도 생활은 동방에서 온 수도자들 덕택으로 새로워지고 크게 발전했다. 부제직의 발전도 이들한테서 기인한다. 처음에 수도원 공동체내에는 보조직과 자선 활동을 하는 직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혼란에 빠져 있는 도시와 바티칸 주변에서 활동을 했다. 이들의 숫자가 열여덟 명까지 늘었으나 차츰 교황청 조직 속으로 흡수되어 교황청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변하면서 수도자적인 특색은 사라지게 되었다. 부제직은 교황청에 종사하는 성직 계급이 된다. 당시 로마는 롱고바르디족의 위협과 성화상 파괴론자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직무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베드로의 유산’(Patrimonium Petri)이라는 재산 행정이다.

 

로마의 수도 생활은 대성당 주변에서 생성된 자선의 성격을 띤다. 또한 도시 안에 있기 때문에 생활의 기초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어 오래 지속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나 교회 분쟁으로 로마로 피신 온 수도자들은 교회와 로마의 수도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에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언, 심지어는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수도자들이 합류하였다. 이틀 동방 수도자들은 교황과 함께 동방의 단성론자들과 성화상 파괴론자들을 반대하여 가장 열렬히 투쟁한 사람들이다. 시리아 출신의 세르지오 1세(701년 사망) 교황이나 그리스 출신의 요한 7세 교황(707년 사망)은 바잔틴 황제와 동방 교회에 용감히 대항해 나간 대표적 인물이다.

 

교황들 이외에도 초기 망명자 가운데는 그리스의 영성을 소개하고 수도 정신의 기초를 놓는 데도 기여하였으며, 단성론에 적절히 반박하는 저서를 저술한 이도 있다. 그리고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과 그들의 교회를 로마 전례로 흡수하는 등 망명 수도자들의 질적, 양적 활동은 자카리아 교황(752년 사망) 때까지 전성 시대를 구가했다.

 

[경향잡지, 1994년 3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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