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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4: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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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58

[새로 보는 교회사 4]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 생활

 

 

교황과 수도자(581~775년)

 

역사적으로 수도회는 로마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이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베드로좌는 양떼를 돌보고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영적 발전을 위해서 수도원의 쇄신과 교회 정신을 필요로 하였으며, 수도회는 소속된 지방의 세속적 간섭과 주교들의 수도회에 대한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교황의 권위에 의존하였던 까닭이다. 우리는 이미 프랑크 왕국 안에서 골롬바노 성인이 자신이 세운 수도원을 교황의 권위에 귀속시키고 문제 해결을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밀접한 관계는 로마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교황이 직접 수도자들을 지도하고 활동을 지시한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동방계 교황이나 라틴계 교황 대부분이 수도자들을 우대하여 중용했는데, 교황 사절로 파견하는가 하면 교회 행정에 참여시키고 재속 성직자들 감독까지 맡겼다. 교황 가운데서도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라틴 수도원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

 

그레고리오 교황(540?~604년) - ‘하느님의 집정관’이라고 하는 - 은 자신을 ‘하느님의 종의 종’이라고 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 교회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모든 일을 슬기롭게 풀어나감으로써 교회를 살린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이교도인 롱고바르디족의 위협과 비잔틴 제국이 압력을 넣는 정치 상황에서, 흉년으로 생긴 기아 현상과 창궐하는 흑사병으로 무질서한 상태였다. 590년경에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은 상황에서 ‘베드로의 유산’을 잘 관리하여 백성을 먹여 살리고 롱고바르디족과 담판을 하여 로마를 구해낸 분이다.

 

이렇듯 외적 치적이 뛰어난 교황은 교회 안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는데, 수도자로서 수도회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귀족 가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교황은 복음 정신대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여섯 군데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첼리오(Celio) 산에 있는 자신의 집을 수도원으로 개방했는데, 교황은 이때부터 이 수도원의 수도자로 살면서 거친 수도복을 늘 입었다. 교황은 고행의 하나로 단식을 지나치게 하여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또한 그레고리오 교황은 완덕을 향한 여러 가지 저서로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마쳤다. 여러 저서 가운데 “사목자들의 규범”(Liber regulae Pastoralis)과 “욥기 주해”(Moralia) 와 특별히 수도 정신에 영향을 끼친 “대화편”(Dialoghi)이 유명하다.

 

“사목자들의 규범” : 새로운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한테 편지 형태로 자신의 신앙과 공의회적 내용을 적어 보내는 관습에 따라 로마의 총대주교가 되어 쓴 책이다. 그는 여기서 (1) “사목자는 사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야망도 소심함도 없어야 하지만 예술 가운데 예술인 영혼의 지도에 적합한 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롭게 말해야 하지만 침묵할 때 침묵하고 겸손하고 자비로우며 명령하기보다는 봉사해야 하고 진실을 사랑하며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신자들에게 적절하고 필요한 설교를 해야 하며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이용하되 늘 자신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하여, 먼저 자신한테 되물은 뒤 자신이 실행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모든 공의회에서 인용을 하게 되었고 사목자들의 영성 서적으로 그 으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욥기 주해” :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로 가 있을 때 시작하여 로마에 와서 완성한 작품이다. 콘스탄티노플 수도자들의 질문과 요청으로 쓴 책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계시에 대해 주해를 하면서 윤리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내용은 신비신학적이면서, 비유로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을 지도하고 있다. 더욱 완성된 삶을 지향하도록 하는 주해서로 “성무일도” 독서로 사용되어 왔다.

 

“대화편” : 가장 대중적인 저서로 베드로라는 부제와 대화 형태로 쓴 책인데, 그 당시 제목은 “이탈리아 교부의 기적”(I miracoli dei Padri d’Italia)이었다. 제목대로 성인들과 기적에 관한 책으로, 네 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제1권과 제3권은 이탈리아 반도의 성인들과 아프리카의 순교자를 포함한 여러 성인의 행적에 관한 책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사료를 현지에 요구까지 하였다. 제2권은 서방 수도원의 대부 베네딕도 성인의 삶과 기적 그리고 규칙에 관한 것이다. 교황 자신이 따랐던 규칙으로 수도 생활과 규칙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다. 제4권은 지상 생활보다 천상 생활에 관한 것으로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연옥 생활을 끝내고 우리의 기도로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의사이면서 수도자였던 유스토는 금화 세 개를 숨겼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축출당한 뒤 죽었는데, 교황은 그를 불쌍허 여겨서 삼십 일 동안 그 영혼을 위해 미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랬더니 삼십 일 뒤에 유스토의 영혼이 연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레고리오 미사’가 생겨났는데, 어떤 영혼을 위해서 삼십 일 동안 다른 미사 지향 없이 끊이지 않고 드리는 연미사를 말한다.

 

이런 책과 강론 들을 통해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수도 생활이란, 고요함을 사랑하고 순명할 줄 알며 공동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진정한 수도자는 가장 먼저 하느님의 뜻을 열망하고 세상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느님 뜻이라면 수도원을 떠나서 교회를 세우는 데, 영혼을 돌보는 데 일생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 자신도 그렇게 바라던 수도원 생활을 떠나서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 차원의 전통 수도 생활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수도자들의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의 구분이 생긴다.

 

 

수도자의 교회 활동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수도원들은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비잔틴의 수도원들은 은둔 형태로 발전해서 산속으로 바위 꼭대기로 옮겨 가서 오늘날까지 지속되어온 반면,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원은 변화를 거듭한다. 이 변화는 지역의 영향과 프랑크족, 앵글로 색슨족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당시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변화에 기인하고 있다.

 

통일된 국가가 없고 무질서한 권력으로 새로 생기는 수도원들은 정치 · 경제 · 문화 요소와 종교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수도원 자리를 고를 때에도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탈과 침입에 무방비로 내어 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은둔 생활은 약해졌고 대신 군사와 경제적인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수도원이 스스로 성을 쌓고 성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초기에 보호자(일반적으로 지주)는 수도원과 재산을 보호하는 대신 자신과 조상을 위한 기도만 부탁하였으나, 차츰 수도원의 주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서방 교회에 오랜 기간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또한 수도원은 기도와 고행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전초 기지가 되는데, 그레고리오 교황의 뜻에 따라 수도자들이 앵글로 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파견되고, 반도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롱고바르디족의 개종을 위해 노력한 까닭이다. 수도자들은 먼저 이교인 지역에 들어가 수도원을 건설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 이렇게 라틴 수도자들이 선교 활동한 결과 앵글로 색슨족과 롱고바르디족이 개종을 하였고, 개종한 결과 수도자 주교들이 탄생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첼리오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반도의 여러 곳에 주교로 파견하였고, 개종지의 수도자들이 주교로 활동하였다. 수도자들은 신앙 전파를 위해 수도원을 떠났을 뿐 아니라 교회 행정 조직을 구성해서 신자들을 사목했으며, 십일조를 거둬 들이면서 본당의 기원을 마련했다.

 

로마 밖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8세기에 생성되는 롱고바르디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교황좌와 함께 큰 역할을 한 수도원들이 있다. 이 수도원들은 주변에 예속된 작은 수도원을 거느렸다. 제노바와 밀라노 사이에 있던 보비오 수도원은 7세기경에는 필사실로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다가 가까워 상업의 중심이 되었으며 포도와 올리브 재배로도 이름이 났다. 보비오 수도원은 롱고바르디 왕국에서 가장 먼저 롱고바르디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로마 북쪽에 자리한 파르파(Farfa) 수도원은 스포레토 사이에 있던 수도원이다. 롱고바르디 왕국인 스포레토 공작의 보호를 받았고 뒤에 몬테카시노 수도원 재건에도 힘썼다.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은 나폴리와 로마 중간에 있는 산꼭대기에 베네딕도 성인이 세운 수도원이다. 그러나 롱고바르디족한테 침략을 당한 뒤 폐허가 되었다가 729년에 시작하여 자카리아 교황(74l~752년) 때 재건이 되어 교황을 열렬히 지지하게 된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노바레사(Novalesa) 수도원은 지금의 토리노 근방에 있었는데, 프랑크 왕국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으면서 중개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수도원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수도 생활을 함으로써 로마는 수도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방에서 망명 온 수도자들은 그리스어를 이탈리아 반도에 알리고 책자를 보급하고 또한 필사실을 수도원에 보급함으로써 수도원이 문화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수도원 필사실은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생긴 문화 공백기에 로마 교부들의 저서뿐 아니라 그리스 학문들을 필사해서 남김으로써 고대 문화를 보존하여 문예 부흥을 맞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로마의 대성당 중심의 수도원 전통은 교황청의 여러 조직에 수도자들을 이끌어 들였을 뿐 아니라 성가대 활동으로 전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 성가를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하듯이 그레고리오 교황 때에 성가를 정립해 나갔는데 이 몫을 수도자들이 담당했다. 특히 성가대 학교(Schola Cantorum)는 대성당 전례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교황들한테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원들은 기도의 중심지로 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기둥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 중세 시대를 맞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동방의 영향을 받았지만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그대로 받아들여 맞갖게 씀으로써 서방 수도회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4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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