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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순례: 남미와 아시아에 가톨릭 신앙 전파한 포르투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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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14 ㅣ No.379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남미와 아시아에 ‘가톨릭 신앙’ 전파한 포르투갈 (중)

청빈 · 침묵 · 육체노동 강조한 시토회 현대 신앙인들에 무언의 메시지 전해


- 왕릉으로 세워진 알카바사 수도원은 그 역할은 잃었지만 현재 베드로 왕의 무덤이 안치돼 있다.


알카바사의 시토회 수도원 방문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알카바사로 이동했다. 겨울은 낮이 짧기에 더욱 아쉬웠다. 오후 5시가 넘자 어느덧 새빨간 석양이 버스 차창 밖에 펼쳐졌다. 알카바사의 시토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해졌다.

광장 한가운데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축물을 발견했다. 바로 순례단의 목적지 알카바사 수도원이었다. 방문 일정이 수도회와 논의된 상태였지만 성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소문한 끝에 수도회 소속 수도자가 바로 몇 시간 전에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 모를 선종 수도자를 위해 짧은 기도를 바친 후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다시 알카바사 수도원을 찾았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용기, 지혜, 정의, 절제 등 네 가지 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조각상을 통해 청빈, 침묵, 육체노동을 강조한 시토회가 현대 신앙인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수도원 성당 내부 장엄하지만 화려한 장식 배제

선종 수도자의 장례 문제로 수도원 내부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초기 고딕 양식 가운데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라는 성당을 방문하는 것만으로 영광이었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던 성당 내부는 시토회 관할 성당답게 장엄하지만 화려한 장식은 배제돼 있었다.

포르투갈 초대 왕 알폰소 엔리케는 12세기에 지어진 성당을 클레베의 베르나르도 아빠스에게 봉헌했다. 이후 시토회가 1223년 온전히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됐다. 수도회는 진출 초기부터 수로를 만들며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알카바사 수도원은 물론 유럽의 수도회는 유럽문화와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유럽역사는 수도회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 정면의 ‘용기 · 지혜 · 정의 · 절제’ 네 가지 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알카바사 성당이 세워진 목적은 원래 왕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도읍을 세 번이나 옮기면서 그 역할이 유명무실해졌지만, 성당에는 현재 베드로 왕과 왕비의 무덤이 보존돼 있다. 역대 왕이었기 때문에 무덤은 땅이 아닌 성당에 안치돼 있다. 무덤의 양식은 르네상스 형식으로 이뤄져 있으며, 왕의 무덤은 천사와 사자 형상 조형물로서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성당 한편에는 역대 왕을 숭배하던 ‘왕의 방’(King's room)이라고 하는 작은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벽을 장식한 타일이었다. 당시의 모습들이 그림으로 잘 표현돼 있는 타일은 이슬람 문화에서 유래했다. 지금과는 달리 초벌만을 하고 그늘에 말린 다음 그대로 벽에 장식했다고 한다. 900℃에서 초벌을 하고 재벌구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만 수분에는 굉장히 강해 벽을 장식하기에 적합했다고 한다.


파티마서 묵주기도와 행렬에 참여

다음 목적지는 ‘파티마’였다. 늦은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파티마 광장에 있는 성모 마리아 발현 소성당에는 많은 이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코바 디 이리아 근방 농민이 처음 세웠다는 소박한 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참나무가 서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후 9시 합동 묵주기도 봉헌 후 성모상을 모시고 행렬을 한다. 동절기에는 주말에만 행렬이 있다. 주말 동안 이곳에 묵는 순례단은 묵주기도와 행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알카바사 수도원 회랑.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140여km 떨어진 파티마는 루르드 성지와 더불어 성모 마리아 발현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한 해에도 수많은 국내외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발현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5월 13일 일어났다. 성모 마리아는 양치기 어린이 루치아, 히야친타, 프란치스코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매월 13일 이곳 발현지에 나타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발현은 같은 해 10월까지 총 5개월 동안 여섯 차례나 이어졌다. 네 번째 발현은 현재의 성모 마리아 발현 소성당이 아닌 세 어린이 집과 가까운 곳에서 있었다. 특히 여느 발현과 달리 8월 19일에 일어났다. 세 어린이와 양친이 읍 당국에 의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세 어린이는 이틀 동안 심문을 받는 동안 일체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마지막 발현에서 성모 마리아는 “나는 매괴의 여왕이며, 내가 바라는 것은 매괴의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을 지어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계속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군인들은 곧 집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성모발현 목격한 세 어린이 생가도 순례

작은 도시인 파티마는 모든 것이 성모 발현과 관계돼 있었다.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이동하자 야외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었다. 기도 중간에는 네 번째 발현지도 지나쳤다. 약 한 시간동안 뜨거운 태양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봉헌한 십자가의 기도를 봉헌했다. 실내에서의 기도와 사뭇 달랐다. 자연과 어우러져 더욱 경건하게 느껴졌다.

십자가의 기도를 마치고 성모 마리아 발현을 목격한 세 어린이의 생가를 방문했다. 남매였던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 이들의 사촌이었던 루치아 생가에서 그들과 관련된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루치아의 조카와 만남이었다. 순례단이 루치아 생가를 방문했을 때 그는 지역의 한 방송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와 한 공간에 머물며, 기자는 주님의 기적이 현재 우리 안에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다.

- 야외 십자가의 길 도중에 지나치게 된 네 번째 발현지의 성모상.




-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세 어린이 중 루치아의 생가에서 우연히 지역 방송과 인터뷰 중인 루치아의 조카를 만났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12일,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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