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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5: 다양한 수도 생활을 퍼뜨린 스페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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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59

[새로 보는 교회사 5] 다양한 수도 생활을 퍼뜨린 스페인 교회

 

 

서고트 왕국의 수도 생활

 

16세기에 가르멜 수도원을 부흥시킨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낳은 스페인은 옛부터 지리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일찍이 알라니아족 · 스베니아족 · 반달족이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갔으며, 마지막에 도착한 서고트족이 반도를 점령하여 국가를 세웠다. 서고트족은 410년경에 로마를 약탈하고 피레네 산맥 근처 아퀴타니아(Aquitania) 지방에 톨로사(Tolosa) 왕국을 세웠으며, 뒤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507년에는 톨레도(Toledo)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 왕국은 이슬람 교도한테 멸망할 때까지만 존속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한 야만인들은 모두가 다 아리아니즘으로 개종한 종족이었으나, 마지막에 왕국을 세운 서고트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로써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서고트족의 개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시벨리아의 주교 성 레안드로(Leandro)였다. 586년 성 레안드로 주교는 스페인이 아리아니즘으로 넘어갈 위험한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한 레가레도(Recaredo)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589년 5월 8일 톨레도에서 국가 공의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이 공의회는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데, 예순 네 명의 주교가 참석한 이 공의회에서 전국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공의회는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왕은 이 결정을 법으로 지키게 함으로써 이후 이베리아 반도 재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8세기경 내분을 틈타 침입한 이슬람 교도들한테 정복당했을 때도 북쪽으로 이주하여 왕국을 세워 15세기경에는 본토 재탈환의 의지를 끝내 관철시킬 수 있었다.

 

스페인은 반도로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까닭에 지브랄타 해협을 통해서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았고, 지중해 해상을 통해 비잔틴 문화와 교류가 있었으며 피레네 산맥을 통해서 프랑크 왕국의 영향도 받았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레안드로 주교가 만남으로써,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화편”과 “욥기 주해”가 스페인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서고트 교회의 특수성

 

서고트 왕국의 교회는 국가 종교였다.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왕국 전체를 하나의 신앙 왕국으로 선포한 것이다. 성 레안드로 주교는 왕국의 모든 백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고 또한 동시에 이 지상의 모습이 천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공의회에서 천명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왕국의 보호자가 되었다.

 

주교들은 공의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의무를 결정해서 시행하도록 했다. 왕과 사제, 수도자, 판사들의 의무를 규정하는 등 공의회 활동이 활발했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법이 되었고 주교들의 권위는 최상이었다.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왕은 로마 황제의 칭호를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이고, 옛날의 로마처럼 법에 따른 통치를 추구했다. 506년에 ‘서고트의 로마법’(Lex romana Wisigothorum)을 제정하였고, 654년에 ‘서고트의 법’(Lex Visigothorum)을 반포하여 로마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교회 생활에 대해서는 모든 지역의 공의회 결정, 곧 아프리카 · 동방 지역 · 서방 지역의 공의회 문헌들과 교황들의 칙서와 서로마 왕국의 공의회 결정을 모아 만든 ‘스페인 교회 규정집’(Collectio Hispana, 633)을 통해 일치를 꾀했다.

 

 

수도 생활의 특징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서고트 왕국의 수도 생활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놀랄 만큼 성장했다. 수도원의 형태와 수도자들의 단체는 매우 다양해서, 은수의 형태에서부터 부인과 아이와 종을 거느린 수도원 형태까지 있었다. 수도 생활의 구성원들로 ‘헌신적인 소녀들’(Puellae devotae), ‘베일의 처녀들’(Virgines velatae), ‘세속의 처녀들’이 있는가 하면, 과부와 재속 수도자, 봉쇄 수도자, 규칙을 지키는 주교, 수도 사제 그리고 가짜 수도자들을 거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도시 속에 있기도 했으며, 남녀 수도원이 따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남녀 복수 수도원도 있었고 심지어 가족 수도원까지 있었다. 또한 주교한테서 독립된 수도원도 있었으며, 해이해진 수도원과 동맹 관계에 있는 수도원도 있었다.

 

서고트족이나 본토인 모두 수도 생활을 선호했는데, 공의회에 출석한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보면 서고트족 출신의 주교 가운데는 수도자가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시세부토(Sisebuto) 왕의 아들인 테우딜라(Theudila)도 있었다. 당시 귀족들은 수도 생활에 뚜렷한 모범이 되었으나 아일랜드-프랑크 왕국처럼 수도 생활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수도 생활을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궁정에 있는 사람들이나 종은 그렇지를 못했다. 서고트법은 로마법을 따르고 있는데, 그 법은 궁정에 종사하는 사람은 교회나 수도직에 몸을 담지 못하도록 금지해 놓았고, 노예 역시 지상의 주인에게 매인 몸이기 때문에 천상 주인에게 봉사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의 경우 가족 수도원에 속하여 수도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연유에서 가짜 수도자가 생기게 되었다고 성 발레리오(Valerio)가 지적하였다. 당시의 수도자는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서고트 왕국은 이런 전통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로마법을 따른 것도 아니고 서고트의 고유성을 살리지도 못했는데, 그것은 로마의 전통을 고수하던 베티카(Betica) 수도원과 서고트족의 전통을 강하게 주장하던 갈리지아(Galizia) 수도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두 수도원은 자신의 경향을 따르는 수도원을 큰 도시 주변에 확장했다. 이 큰 도시 주변의 수도원들은 수도자 주교를 배출시켜 주교 중심의 교회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 생활의 확산은 백성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전생활을 바치는 데 이바지했다. 즉 전례에만 쓰는 성잔이 있듯이 온 생활을 하느님께 바치는 생활이 찬양되었으며, 한번 바친 삶은 다시 재고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졌다. 신학적으로도 수도자들의 삶은 곧바로 신자들이 따라야 하는 생활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서고트 수도 생활의 형태

 

그러면 서고트 왕국의 수도 생활을 규정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로마 사회의 전통을 전승한 서고트 왕국에서는 ‘스페인 규정집’과 ‘규칙서’(Liber regularum)가 근본 지침이 되었다. 이 두 가지 규정서는 수도원장이 취임하는 자리에서 엄수하기로 약속하고 서약을 받았으며, 그 밖에도 ‘서고트 공의회’와 동방 서방의 ‘규칙서’를 활용했다. 이 규칙서는 서고트 왕국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규칙서를 종합한 형태였다. 성 아우구스띠노, 성 파코미오, 성 바실, 성 까시느, 성 예로니모의 규칙을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영성을 강조하였으나 실제 생활에서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 이시도로의 규칙과 성 레안드로의 편지로 보충했고, 북쪽에서는 고유하고 색다른 규칙서를 썼다.

 

규칙서에 따른 서고트 왕국의 수도 생활의 형태는 두 개 수도원이 중심이었지만 기원은 같다. 그것은 공동으로 사용한 ‘규칙서’ 때문이다. 규칙서는 서고트의 전례 생활과 수도 생활의 교부들의 가르침과 모범을 담고 있다. 게다가 양쪽 다 서고트의 계약(Pactum)을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두 수도원은 서로한테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양쪽 수도원이 다 문제로 여긴 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직 수행에 관한 문제, 은수 생활과 재속 생활에 대한 비교와 차이를 두는 것이었다.

 

계약의 정신과 사회성은 좀 달랐다. 계약은 300년경에 열린 엘비라(Elvira) 공의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수도 성소에 완전한 고행 생활을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이 서약했는데, 서고트 왕국에 와서는 원장이 취임하는 날 수도자와 수도원장이 서로 지켜야 할 의무와 규범에 대해서 서명하는 형태로, 그 뒤에는 서원하는 수도자가 허원식 날 서명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베티카에서는 갈리지아보다 좀더 영성적이었다. 서원하고 서명한 수도자가 의무를 등한시할 경우 태형과 같은 벌이 아니라 바로 파문시켰고 수도원장은 항소법(Jus appellationis)에 종속되지 않았다. 갈리지아에서는 그 반대였다.

 

수도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성 레안드로가 자신의 누이한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수녀원을 절대로 떠나지 말 것이며, 동료 수녀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노력해야 하는 덕목과 피해야 할 학습들을 나열하고, 성서를 읽는데 특히 시편 낭송을 열심히 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먹는 일과 단식하는 일과 목욕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 일상 생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성 이시도로 주교는 수사들의 의무에 관해 오노리오 원장한테 보내는 서한에서 수도원의 질서 확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세속 생활과는 거리가 있어야 하며, 수도원장은 수도자 각자한테 의무를 지우고 재산을 관리하고 잘못을 고쳐 주어야 한다는 것, 수도자는 수도원에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하고 죽은 뒤에도 수도원 무덤에 묻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 프루투오소(Fruthuoso)는 666년에 규칙서를 쓰면서, 수도원장은 원로 수도자들의 자문을 받으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수도자한테 벌을 내릴 때 이들의 의견 없이 결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서고트 왕국의 수도 생활의 영향

 

수도원은 서고트 왕국의 교회 생활에 아주 큰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스페인 규정집’과 ‘이시도로 성인의 지침서’들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전통은 11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이슬람이 쳐들어 온 후 많은 수도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도망하면서 오히려 서고트의 이러한 전통을 확산시켰다. 또한 주교 중심으로 뭉쳐진 성직 사회를 일반화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며 공의회에서 규정한 ‘스페인 법규집’은 이후 많은 지역 교회의 효시가 되었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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