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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6: 영국 교회의 발전과 수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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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0

[새로 보는 교회사 6] 영국 교회의 발전과 수도자들

 

 

앵글로 색슨 교회의 수도자(581-755년)

 

영국에 대한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407년경에 로마 제국이 영국에서 물러가자 440년경 앵글로족과 색슨족, 유트족이 영국에 침입해 왔다. 이 침입자들은 영국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모든 교회 조직을 파괴하였고,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를 포기하고 추방당하였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전멸한 영국에서 교회는 처음부터 다시 선교를 해야 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이 이 선교를 어렵게 만들었는데, 첫째,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의 차이였다. 많은 부분에서 서로의 관습이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 활동에 일치된 노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어 일치된 정치력의 부재뿐 아니라, 전쟁이 선교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골롬반 성인은 590년경 유럽 대륙의 선교와 수도원 건설을 위해 영국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6년 뒤에는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파견한 로마의 성 아고스티노 원장이 이들한테 선교를 하였다. 이전에 이미 영국에는 라틴계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 북쪽에서는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라틴계 수사들이 앵글로 색슨계 교회를 형성시켰다. 그러다가 664년에 가서야 휘트비(Whitby) 공의회에서 로마 전례를 따르기로 선언하였다. 이달에는 휘트비 공의회를 통해 로마 전례로 통일되기 전까지 혼란스러웠던 영국 교회의 모습과 수도회를 통한 영국 교회의 발전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라틴계 수도자들의 노력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선교는 그레고리오 대교황한테서 비롯한다. 교황의 영국에 대한 선교 계획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이 되기 전에 로마의 노예 시장을 지나면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금발의 잘생긴 청년들을 보고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들이 앵글로(Angli)족이라고 대답하자 교황은 그들한테 “당신들은 앵글로(Angli)족이 아니라 바로 천사(Angeli)들이오!” 하고는, 그들이 이교도라는 사실을 알고 이들한테 선교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 펠라지오 2세한테 앵글로족 선교를 하러 가겠다고 청을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 청년들의 모습과 앵글로족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영국 선교는 프랑크 왕국의 공주 베르타와 켄트 왕국의 에텔베르토 왕의 결혼이 그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처음에는 토착민 선교사가 선교하는 것을 바랐지만 그것은 너무나 긴 세월이 걸리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다른 지방의 선교사한테 의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교황은 자신이 세운 첼리오 수도원에서 아고스티노 원장과 그 수도자들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일세대 수도자 선교사들이 말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잔인함을 듣고 겁을 먹자 교황은 그들을 북돋우며 선교할 것을 부탁하였다.

 

선교사들은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통역자를 대동하고 597년 영국의 한 섬에 상륙하였다. 당시 영국은 여러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같은 종족끼리 연합체를 형성하고 그 연합 왕국의 대표를 뽑았다. 로마에서 파견된 수사들은 다행스럽게도 켄트 왕국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 켄트의 에텔베르토 왕이 프랑크 왕국의 공주 베르타로 인해 개종할 준비가 되어 있던 까닭이다. 그는 연합 왕국의 대표였다. 그러나 개종에 대한 결정은 자신의 왕국에만 한하였다. 에텔베르토 왕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그 먼 곳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왔겠느냐”는 생각에 수도자들한테 머물 집을 제공하였다. 그러면서 수도자들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은 597년 6월 1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옛 성당을 재건하도록 하고 수도원을 지어 수도자들한테 제공했다. 물론 그는 신하들한테 개종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교황은 왕과 왕비한테 콘스탄틴 대제와 성녀 헬레나에 비유하는 찬사를 보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선교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이차로 첼리오 수도원의 멜리토 원장과 다른 수도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뒤에 모두 주교가 되고 성인이 되는데, 교황의 편지를 갖고 어렵지 않게 영국에 도착하였다. 교황은 이번에는 런던과 요크 지방 두 군데에 대교구를 설정하고 옛 로마 통치의 행정 구역을 그대로 답습하여, 대주교는 각기 열두 사람의 주교를 거느리는 교회 조직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을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는데, 아고스티노 성인은 침입자들을 미워하고 침입자들의 개종을 도와줄 의사가 전혀 없는 영국인 주교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또한 켈트족 수사들도 자신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어서 로마 전례를 수용시키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던 것이다.

 

 

켈트족 수도자들의 선교

 

켈트족 수도자의 근거지는 북쪽 지방의 이오나(Iona) 수도원이었다. 이오나 수도원에서 세례를 받고 교육받은 왕 오스왈도는 이오나 수도원에 자기 왕국 국민의 개종을 요청한다. 이때 정치적인 헤게모니는 켄트에서 노르드움브리아로 갔다가 다시 메르치아 왕국으로 움직이는데, 선교의 책임도 라틴계 수도자들한테서 켈트족 수도자로 옮겨진다. 라틴계 선교 책임자가 캔터베리의 성 아고스티노라고 한다면 켈트족은 이오나의 수도자로 린디스파르네(Lindisfarne)의 주교인 성 아이다노였다.

 

연합 왕국의 대표가 된 노르드움브리아의 왕 오스왈도가 켈트족 수도자들을 초청했을 때 라틴계 수도자들은 요크 지방을 떠나게 된다.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 사이에 전례와 전통이 몇 가지 달랐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켈트족 수도자들은 그 유명한 선교 여행을 시작한다.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전례와 신심의 중심인 수도원을 세우고, 신앙과 수도 생활을 확산시켜 나갔다. 여러 군데 수도원을 세우면서 드디어 휘트비에도 남자 수도원과 여자 수도원을 세우게 되는데, 이 수도원은 영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휘트비 수도원은 에드비오 왕의 손녀인 성녀 힐다가 원장으로 있었고 주교들을 배출해 내는 명문 수도원으로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캐드몬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많은 성가와 시를 지어 간접 선교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러나 휘트비 공의회가 열리는 시점에서 라틴계 수도자들은 켄트 왕국에서만 선교 활동을 하였고, 그 외의 모든 왕국의 선교는 켈트족 수도자들이 장악하였고 그들의 전통이 유지되었다.

 

 

로마 전례와 켈트 전통의 만남

 

라틴족과 켈트족은 종족과 언어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전례상의 전통까지 달라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는 다른 교회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사를 드리는 양식도 많이 달랐지만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세례 양식과 수도자의 머리 모양, 부활 대축일 날짜 문제였다.

 

우선 세례 양식에서 켈트족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라는 말이 빠졌으며, 기름 바르는 것을 생략하였다. 또는 사제한테서가 아니라 가정에서 세례를 준다는 말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캔터베리의 성 테오도로가 켈트족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로마 전례로 세례받을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을 통해서 그 갈등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더욱 큰 차이는 수도자의 머리 모양과 부활 대축일 날짜 문제였다. 로마 수도자들은 머리 윗부분 가운데를 다 깎아서 머리카락을 둥글게 남긴 반면에, 켈트족 수도자들은 앞부분을 다 깎고 한쪽 귀에서부터 다른 귀까지만 남겨 반구형 머리를 하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교회 원칙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부활 대축일 날짜 문제는 두 교회가 오랜 동안 연락이 끊어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그 동안 로마는 부활 대축일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이 발달하여 정확해진 반면에, 아일랜드나 켈트족은 옛 계산법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 대축일 날짜가 심하게는 한 달씩이나 차이가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이때 휘트비 수도원이 로마와 아일랜드 교회의 차이점을 토론하는 장소가 되었다. 차이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로마의 수도자들이 영국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성 골롬반이 대륙 ‘순례’를 하면서 그들의 전통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과 같은 경우였다. 두 곳이 다 자신들이 전수받은 전통에 충실했는데, 대륙에서는 이 차이를 학문으로 토론을 한 반면에 영국에서는 서로 분리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특히 노르드움브리아 왕궁에서는 켈트족 수사한테서 교육을 받은 왕 오스위가 켈트족 전통을 고수했고 왕비는 켄트 왕국의 공주로서 라틴(로마) 수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왕자 알크프리드 역시 로마 수도자한테서 교육받은 로마 전통 옹호자로 이는 왕궁이 분리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휘트비 수도원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켈트족은 왕과 린디스파르네 주교인 콜만이 대표하였고, 로마 쪽은 왕자와 윌프리드 원장이 대표자였으며, 성녀 힐다 수도원장은 중간 입장을 나타냈다. 토론이 있었지만 결론은 왕이 내렸다. 윌프리도 원장은 로마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서방의 모든 지방이 로마의 전례를 따르고 있으며, 아직 로마와 많이 떨어진 지역만 자신의 전례를 고집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아일랜드의 사도 골롬반 역시 성덕으로 가르친 큰 성인이지만 로마와 다른 전례를 가르칠 의사는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은 베드로한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풀고 매는 권한을 주셨고, 교황은 그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말했다. 이때 왕이 나서서 켈트족 대표인 주교한테 “주님이 정말로 베드로한테 그런 권한을 주셨느냐?”고 물었다. 콜만 주교가 그렇다고 하자, 왕은 또다시 골롬반 성인도 그런 권한을 전수받았느냐고 재차 물었다. 콜만 주교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왕은 “천국 문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가 정하고 따르는 전례가 옳다.”고 함으로써 결론을 내렸다.

 

664년의 휘트비 수도원의 이 공의회로 앵글로 색슨족의 교회는 로마의 전례에 맞춰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비탈리아노 교황이 로마 수도자 선교사 이세대를 파견하는데, 이들은 교리로나 전례로 또 행정으로 영국 교회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673년 허트포드(Hertford) 공의회를 통해서 교구 구역을 확정하고 부활 대축일 날짜를 정확히 하며 수도자의 방랑 생활을 금지하고, 공의회를 정기적으로 열 것을 의결하였고, 이로써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교회로 발전해 갔다.

 

 

앵글로 색슨 교회의 수도 생활

 

이렇게 수도자들이 재건한 교회가 수도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휘트비 공의회 이전에는 수도자들이 복음 전파를 주도했지만, 그 뒤에는 수도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교들과 탁월한 인물들이 교회를 더욱 발전시켰다. 특히 수도자 출신의 주교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전수함으로써 학문적인 기틀을 잡았고, 수도자들은 앵글로 색슨족의 정서에 맞는 교회 예술을 창작함으로써 문화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된다. 동시에 많은 남녀 수도원이 영국에 세워졌고 많은 성인 성녀들이 나옴으로써 수도 정신이 전교회에 미쳐 영성적인 영향을 크게 남겼다.

 

특히 앵글로 색슨의 교회 박사인 가경자(加敬者) 베다는 영국 교회 전통에 큰 발자국을 남긴 분이다. 제로우(Jarrow) 수도원의 수도자로 온 생애를 학문 연구에 바친 베다는 그리스 말과 히브리 말과 라틴어를 완벽하게 하였고, 그럼으로써 성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국에서 물어 오는 여러 문제에 적절한 조언을 하는 백과사전의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문법, 성서 주석에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시(詩)로도 수도 영성을 전파했는데, 그가 쓴 “연대기”(Cronaca)와 “앵글로 민족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는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이어가는 역사의 주요한 사료이다. 이렇게 탁월한 업적으로 베다가 만든 전통은 그의 제자인 에그베르토한테 이어지고 나아가 요크 학파의 창시자가 된다. 또한 대주교인 그는 앵글로 색슨 교회 안에서 로마 교회 조직을 확고히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하지만 이 조직은 l세기 뒤에 덴마크 사람들의 침입으로 또다시 부숴지고 만다.

 

그러면 앵글로 색슨족의 수도자들은 어떤 규칙을 따랐을까? 709년경에 에베스함(Evesham) 수도원이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를 적용한 것을 보면 베네딕도 성인 규칙서와 함께 절충된 규칙에 따랐다고 여겨진다. 앵글로 색슨 교회의 수도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대륙 선교인데, 이들은 자신의 나라에만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프리지아의 사도라 하는 성 윌리브로르도와 독일의 사도라 하는 성 보니파시오는 사도직을 위한 순례를 대륙에서 시작함으로써 전교회를 로마와 연결시키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결론으로 얘기하면 로마에서 파견한 수도자 선교사들과 켈트족 수도자들은 앵글로 색슨족을 개종시키고, 이 교회의 전례를 로마 전례로 바꾸면서 로마 전통을 대륙에까지 확고히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영국 수도자들의 대륙에 대한 새로운 선교 노력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일치에 큰 역할을 하였다.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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