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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8: 무능한 왕의 종교적 경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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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2

[새로 보는 교회사 8] 무능한 왕의 종교적 경건성

 

 

카롤링 제국의 수도 생활 재정비

 

샤를(칼) 대제의 교회 정책은 교회와 수도원을 통한 제국의 통치, 즉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국가 임무를 수행하는 성직자 국가 관리 체제였다. 권력과 부가 수도원에 있게 되면 그만큼 속화하기 쉽다. 따라서 주교와 수도원장을 무장한 군대의 선두에 세우는 등 수도 생활 본래의 모습은 갖추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국가와 교회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이 무너지면서 교회 조직과 수도 생활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은 샤를 대제의 죽음과 통치 능력이 부족한 계승자 루도비꼬 황제 때문에 빚어졌는데, 샤를 대제를 계승한 사람은 ‘경건한 사람’(Pius)이라는 별명을 받은 루도비꼬 황제였다. 그는 별명처럼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으며, 부친의 영향으로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샤를 대제는 교회를 제국의 확장과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국가와 교회가 상충하지 않게 관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지만 신심이 깊은 루도비꼬 황제 밑에서 교회 사람들은 국가 권력까지 좌지우지하였다. 구체적으로 ‘황제의 공개적인 회개’도 나타난다. “사적인 죄는 사적인 회개로, 공적인 죄는 공적인 회개로”라는 옛 관습을 적용해서 황제에게 822년과 833년에 두 번이나 공개로 회개를 하도록 하였다. 제국의 실력자 주교들 앞에서 황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한 것이다. 황제의 권위가 약해지자 결국에는 제국이 나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어쨌든 신심 깊은 황제 밑에서 수도 생활은 쇄신되었고 규정 또한 정착되었다.

 

 

제국의 수도 생활

 

샤를 대제 치세 말기인 813년에는 교회의 모든 상태를 정돈하고 수도원의 수도 생활을 일관성 있게 하기 위해서 다섯 번 이상 공의회를 열어 수도 생활을 정비하기에 이른다. 은수 생활이든 가정 수도 생활이든 공동 생활이든 모든 수도 생활의 규정을 정해서 제국과 주교의 책임 아래 쇄신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샤를 대제의 죽음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경건한 왕 루도비꼬 역시 813년의 공의회에서 세운 계획대로 교회를 정비하기 위해서, 특히 제국 안에서 기도와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요 군사 요충지인 수도원을 정비하기 위해서 816년부터 계속해서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오랜 동안 쌓인 교회의 부패를 청소하고 교회 재산을 교회에 귀속시키는 문제, 주교 선출, 수도원장 선출 문제, 군에 대한 수도원의 봉사 규정들을 논의하였다. 특별히 829년에는 전체 프랑크 교회를 다시 돌아보는 네 번의 큰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주변의 정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샤를 대제의 죽음으로 북쪽에서는 노르만인들이, 스페인 지역에서는 사라센인들이, 동쪽에서는 불가리아인들이 파괴적인 침입을 해왔던 것이다.

 

나라가 불안해지자 이를 황제의 부덕으로 여긴 주교들이 황제한테 앞서 말한 공개 회개와 기도를 요구하였고 황제는 이에 응했던 것이다. 공의회는 마인츠(Mainz) 파리(Paris) 툴루즈(Toulouse) 리옹(Lyon)에서 열렸는데, 오직 파리 공의회 문서만이 남아 있다. 이 문서는 목자들의 게으름과 세속성, 사목 생활과는 동떨어진 몇몇 고위 성직자들의 회개와 교회 쇄신을 주장하고, 왕과 신하와 주교들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가정과 수도원 안의 수도 생활과 성당 소속의 공동체 생활, 개인적 은수 생활들이 명백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바로 이 공의회에서 이를 규정짓고 있다.

 

 

가정 수도 생활

 

봉쇄 구역에 있지 않은 동정녀와 과부와 홀아비의 가정 수도 생활에 관한 규정이 있는데, 829년의 보옴스와 파리 공의회 헌장에서 귀족 과부에 대해 규정을 했다. 귀족 과부는 남편이 죽은 삼십 일 뒤에는 재혼을 하든지 수도원에 들어가든지 결정을 해야 했고, 집에 머물러서도 안되었다. 따라서 수도 생활을 생각하고 수도 복장을 했거나 삭발한 이는, 수도원에 입회를 하든지 공동 생활을 강요했다. 이런 규정이 남자한테는 아주 엄격했으나 여자한테는 관용이 베풀어졌다. 이런 규정으로 가정 수도 생활은 현격히 줄어들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재속 사제 생활 규정

 

공의회 헌장은 또한 재속 사제 생활도 규정하고 있는데, 재속 사제들한테도 공동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816년에 열린 아퀴스그라나 시노드에서는 ‘성직자 규정’을 만들었는데, 144개 항에 이르는 것으로, 1항에서 113항까지는 성 아우구스띠노, 성 예로니모, 성 바실리오, 성 그레고리오 교부들의 권고를 서술하고, 114항부터 144항까지는 법적인 요소에 대해 규정하였으며, 재속 사제 생활과 수도 생활을 구분하고 있다. 수도 생활과 재속 사제의 공동 생활은 모두 특별한 선물이며 구원의 길을 확고히 하는 것이나, 의복과 식탁과 소유에 관한 법이 다르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첨가된 것은 사목을 위해서 사제관에 손님을 받아들이고 자선 사업을 하라는 사항이다.

 

아퀴스그라나 시노드는 재속 여자 공동 생활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도 수녀원에서 사는 사람과 일반 가정에서 사는 사람을 구분짓고 있다. 여자들은 과부와 동정녀로 간단하게 규정짓고 있으며, 재속 사제 규정집처럼 교부의 말씀과 법적 요소를 구분하고 있다.

 

 

수도 생활 규정

 

수도 생활 규정은 제국의 기본 체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루도비꼬 경건 왕은 813년의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여 제국 교회 안의 수도 생활 규정을 재정비하도록 명령했다. 황제의 의도와 함께한 사람은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라고 하는 서고트족의 귀족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도였다. 아니아네의 베네딕도는 자신의 영지에다 수도원을 창설하고(780년)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도록 했다. 아니아네 수도원의 수도자는 가난하고 아주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일을 했으며, 원장 자신이 수도자들의 식단을 짜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다. 782년에는 삼위 일체께 바치는 새로운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규칙에 충실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제국 교회의 보호 속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에 따른 자유로운 수도원장 선출을 보장받기도 했는데, 이렇듯 아니아네 베네딕도의 개혁 정신을 황제는 좋게 보았고 베네딕도 수도원장도 경건 왕을 신뢰하게 되었다. 개혁은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기도 시간과 일하는 시간, 영적 독서 시간을 서로 균형 있게 하여 순수한 수도 생활을 지향했다. 따라서 경제적 군사적 봉사와 속인 수도원장을 반대하고 진정으로 세상과 떨어져 사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샤를 대제가 만든 국가 수도원 체제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도는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데 다른 규칙을 보기로 사용했다. 813년 아를르 공의회에서는 샤를 대제 앞에서 교회 쇄신을 역설했고, 816년 아퀴스그라나 공의회에서는 경건 왕 앞에서 똑같은 일을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수도자들의 규정도 만들었다. 816년에 36개 항을 정하고 817년에는 43개의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여 77개 항목의 이 규정에는 이전의 모든 법적 조항을 모았다. 베네딕도는 아퀴스그라나의 법률을 지키게 하는데 제국의 힘에 의존하였다.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도는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인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었는데, 베네딕도 성인의 기본 규칙에 충실하면서 수도원의 생활을 좀더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다. 모든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경건 왕은 817년에 아퀴스그라나 옆 인데(Inde)에 수도원을 세우고 모든 수도원에 두 사람의 수도자를 파견해서 개혁된 관습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새로운 규정은 수도원장의 자리를 약하게 하고 모든 수도원을 개혁원장의 권한 아래 두게 했다. 규정집은 원장의 권한을 축소하고 공동 생활에 참여하도록 했다. 특권을 없애고 직무도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며 순회 감찰사가 독립 수도원을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기도 생활을 더 무겁게 적용하면서 구체적으로 시간까지 명시하고 있다. 한편 수도자의 재산에 대한 수정은 강제로 성소의 길을 열게 했다. 즉 이전에는 수도자의 재산은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가난한 이들한테 나누어 주거나 수도원에 헌납되었지만 이제는 재산이 가족한테 되돌려졌다. 따라서 재산이 탐나면 강제로 수도원에 입회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도로 인해서 모든 수도자는 자신들의 규칙과 공적인 규정을 갖게 되었다. 여자 수도원은 남자 수도원의 모범을 따르게 되었고 여자 수도원의 규정은 10세기에 나타난다.

 

 

은수 생활 규정

 

카롤링 왕조 시대에는 오히려 은수 생활을 억제시키며 주교나 수도원장의 감시를 받았다. 혼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공식 문서는 없었다. 8세기초 메츠 교구의 그림라이꼬 사제의 규칙이 겨우 발견될 뿐이다. 여기서 그는 ‘영적이고 법적인 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동 생활과 은둔 생활의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지는 못했다. 은둔 생활의 정당성을 밝혔지만, 주교나 수도원장이 지정한 동굴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은수자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모여 사는 제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해 주었다.

 

 

경건 왕 루도비꼬의 업적

 

루도비꼬 경건 왕은 정치적으로는 무능력하고 불행한 사람이었으나 별명대로 교회에는 충실하였다. 첫 부인이 죽자 왕이 수도원에 입회해 버릴까 봐 주위 사람들이 서둘러 재혼하도록 만든 것만 봐도 그는 수도자한테서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황제로서 스스로 공개 회개를 한 사실은 그의 무능을 여러 모로 드러낸 사건이지만, 교회를 재정비하려는 그의 뜻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829년의 모든 규정은 수도 생활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이 해체되면서 수도 생활뿐 아니라 모든 교회 조직이 혼란에 빠지지만, 샤를 대제가 준비하고 확산시킨 모든 수도 생활의 규정은 모든 수도원에 공적 규칙을 갖도록 한 큰 의미가 담겨 있다.

 

[경향잡지, 1994년 8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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