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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 평화를 찾다4: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땅 바냐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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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1 ㅣ No.371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④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땅 바냐루카


서로 죽고 죽인 비극의 아픔 품은 고색창연한 고도(古都)

 

 

- 바냐루카교구 성 보나벤투라 주교좌성당. 종탑은 내전이 끝난 뒤에 세워졌다.

 

 

“바냐루카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봐 달라”는 말에, 현지 여행사 사장은 “그 위험한 곳을 왜 가느냐?”며 의아한 반응부터 보였다. 슬쩍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현지 교구청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한 터였기에 바냐루카 방문을 강행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달려 사라예보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브르바스 강 연안 바냐루카 시로 접어드니 해거름 무렵이었다. 

 

바냐루카는 연방 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FBiH) 북부와 동부를 포위한 듯한 형국의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RS)의 ‘사실상’ 수도(정식 수도는 동사라예보)다. 

 

울창한 가로수 숲길로 널리 알려진 바냐루카는 고대 로마의 성채였던 도시답게 고색이 창연하고, 16세기 오스만튀르크 제국 시절의 성터와 모스크, 극장 또한 이국적이었다. 17만 5000여 명의 인구 중 세르비아계 정교회 신자들이 16만 1000여 명(92%)을 차지하는 정교회 도시답게 신앙 유산도 풍부해 보였다. 바냐루카교구청에 도착하니 이웃한 정교회 성당과 사제관 등이 성 보나벤투라 주교좌성당과 낙조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바냐루카도 20세기 중반과 끝에 다른 보스니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피로 얼룩졌다. 1992년에서 1995년까지 벌어진 내전 당시 바냐루카 교구 48개 성당 가운데 35개 성당(73%)이 피해를 봐야 했다. 16개 성당은 아예 흔적도 찾지 못할 정도였고, 19개 성당과 204개의 여타 교회 건축물도 심각하게 파손됐다. 7만 3000여 명에 이르던 가톨릭 신자 또한 전후엔 62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헌데 역설적이게도 바냐루카에는 한 차례도 폭격이 없었고, 전쟁 또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세르비아계 비밀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성당과 사제관에 폭약을 설치해 파괴했고, 그 와중에 교구 사제 7명과 수도자 2명이 희생됐다. 한밤중에 집에서 잠을 자다가 끌려가 살해당한 가톨릭 신자 수는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성 가톨릭 신자들은 끌려가 집단으로 수용됐고 성폭행까지 당했다. 그랬는데도 유럽엔 이 같은 비극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잊힌 땅이 된 것이다.

 

- 바냐루카는 고대 로마의 성채도시답게 성곽과 신앙유산이 풍부하다. 사진은 바냐루카교구 주교좌성당 옆 정교회 성당과 시내 전경.

 

 

학살 당시 어린 나이였던 바냐루카교구의 보리스 요르기치 부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중에 들었는데, 학살 당시 세르비아계 비밀경찰에 내려진 지령이 ‘목자와 양떼를 죽여라’였다고 해요. 바냐루카는 세르비아인이 많아 폭격은 하지 못하고 대신에 성당에 폭발물을 반입해 폭파했다고 해요. 그래서 사제나 수도자들의 희생이 아주 컸어요. 심지어는 사제를 불에 태워 죽이거나 세르비아로 끌고 가 행방불명된 경우도 있어요. 야예체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완전히 파괴되는 등 작은 형제회의 피해가 특히 컸습니다.” 

 

왜 이 같은 학살이 자행됐는지, 그 원인을 알려면 20세기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 1941년 발칸을 점령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바냐루카를 크로아티아에 귀속시켰다. 당시 바냐루카는 정교회 신자가 50%, 가톨릭 신자가 20∼30%였는데, 바냐루카가 가톨릭계의 크로아티아에 귀속되는 데 정교회 신자들이 저항하자 크로아티아 민병대 우스타샤(Ustaa)는 어린이 500여 명이 포함된 2500여 명의 정교회 신자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벌였던 것. 

 

파시스트 우스타샤의 학살은 50여 년이 지나 바냐루카에서 그대로 재현됐고,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바냐루카는 학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보혈 선교 수녀회 멜라니야 이체비치 수녀

 

“매일같이 장례 미사를 드려야 했어요, 성당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눈물 속에서 지켜봐야 했지요.”

 

내전 당시 4년간 날마다 바냐루카교구 주교관에서 박해 소식을 듣고 견뎠던 보혈 선교 수녀회 멜라니야 이체비치 수녀는 “정말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우리는 분노로 그 희생을 예수님께 봉헌하며 평화를 주시기를 청했었다”고 회고했다. 

 

“무기를 든 전쟁은 아니었지만, 세르비아계 비밀경찰에 의해 계속된 심리전과 교란은 무서웠습니다. 밤마다 가톨릭 신자들이 죽어가거나 끌려갔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이 크로아티아로 피란하는 걸 도와달라며 주교관에 몰려들자 프란요 코마리차 주교님과 신부님들은 크로아티아에 연락해 그들을 도와줬어요. 저는 그들을 국경 근처 사바 강까지 데려다 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나중에는 여성이나 노약자들조차 피란해야 했지요.” 

 

세르비아계 정교회 신자들이 모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우리에게 버스를 가져다주고 사바 강 건너 크로아티아로 피신하는 것을 도와줬다”는 것. 

 

결국은 1995년 8월 자신도 크로아티아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체비치 수녀는 “평복을 입은 채 어선을 타고 사바 강을 건너는데, 다시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수도생활을 시작한 고향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굉장히 슬펐던 기억이 난다”며 “그런 상황에서도 분노나 증오, 공포보다는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다 예수님의 고귀한 피 안에 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하면서 주교관에 두고 온 주교님, 신부님들께 하느님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기도를 바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피란을 떠난 지 10년 만인 2005년에 되돌아와 다시 교구청 사도직 소임을 맡은 이체비치 수녀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평화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라며 “내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평화를 찾아내고 그 평화를 다른 이들과 나누며 실천해야만 평화는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아직도 분단으로 고통받는 한반도와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꼭 기도하겠다”고 덧붙이는 이체비치 수녀의 눈가엔 살짝 눈물이 비쳤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1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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