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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9: 카롤링거 왕조의 와해와 수도 생활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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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3

[새로 보는 교회사 9] 카롤링거 왕조의 와해와 수도 생활의 쇠퇴

 

 

카롤링거 제국의 와해(843-887년)

 

샤를 대제가 이룩한 왕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제국의 정치적인 일치는 서방 세계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오고 또한 교회도 발전시켰으나, 제국이 무너지면서 오랜 기간 무질서한 사회를 야기시킨다. 제국의 와해만 무질서를 가중시킨 것이 아니다. 북부에서는 바이킹족들이 유럽을 약탈하고 남부에서는 사라센인이 침입하여 로마를 약탈하니, 모처럼 이룩했던 서구 국제 사회의 통일이 깨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와해는 경건한 왕 루도비꼬 황제가 살아 있을 때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여, 840년에 그가 죽자 자식들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면서 심화된다. 형제들의 영토 분쟁은 841년에 두 동생 루도비꼬 2세와 대머리 칼이 손을 잡고 맏형 로타리오 1세와 싸움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했고, 두 동생의 승리로 843년에 베르됭(Verdun) 조약을 맺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로타리오는 북쪽 네델란드 지방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이르는 중부 제국을 차지하고, ‘독일인 왕’이라는 별명을 가친 루도비꼬 2세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 왕국을, 대머리 칼은 론강 · 손강 · 셸트강 서쪽의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하면서 제국은 셋으로 나뉘었다. 뒷날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이 되고,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가 된다.

 

그러나 분할된 세 왕국은 질서를 잡지 못했다. 지역 특성상 동프랑크 지역도 서프랑크 지역도 일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천 킬로미터가 넘는 중부 왕국 역시 남북이 지역적으로 너무나 달랐다. 이때 교회 조직도 와해되었다.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대교구와 그 밑에 종속된 교구의 관계가 왕국이 세 군데로 나뉘면서 조직 자체가 모호해지고, 수도원과 교구의 지역적인 구분도 명확하지 못한 채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그 가운데 로타리오 1세의 로트링겐 왕국은 다시 영토 분쟁의 현장이 된다. 869년에 로타리오 2세가 죽고 카롤링의 왕통이 끊기자 칼 2세가 로트링겐을 병합했고, 이에 분노한 루도비꼬 2세가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결국은 870년의 메르센 조약으로 중부 왕국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 합병되고, 남부 지역은 지방 영주의 영토가 되어 버렸다.

 

카롤링거 왕조가 이렇게 무질서하게 분열되고 있는 와중에 9세기의 서유럽을 더욱 암울하게 한 종족은 바이킹족이라고 하는 북방인들의 침략이었다. 이들은 9세기 초입부터 전유럽을 침입하기 시작해 845년에는 파리까지 침입하였다. 이들은 기민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수비가 튼튼한 지역은 우회하는 방법으로 약탈을 하였다. 이때 이들의 침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대수도원들로, 많은 대수도원이 파괴되었으며 수도자들은 살해당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각 수도원이 간직했던 모든 서책과 귀한 물건과 유해들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북방인들은 이미 사라센의 침입을 받아 피폐해진 이탈리아를 침입해서 이탈리아 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면서 교황좌의 권위를 다른 지역 교회에 미치지 못하게 함은 물론, 교황령을 지방 영주들의 권력 아래 두었다. 이렇게 제국이 나뉘는 843년부터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한 887년까지의 수도 생활을 알아보기로 한다.

 

 

제국의 혼란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서방 세계에는 차츰 봉건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모든 영토에 주인이 생기고, 동시에 모든 교회와 모든 수도원에도 주인이 생겼다. 그리고 주인은 자기한테 속한 산하나 재산, 성당이나 수도원을 보호하는 책임과 아울러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샤를 대제 때부터 제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교회는 이제 변화한 제국의 영향을 그대로 입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원들도 이 봉건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에 권위가 있을 때는 자유롭게 수도원 고유의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수도원이 주변의 영주들이나 북방인이나 사라센인들한테 약탈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자신의 수도원을 보호해 줄 주인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816년의 제국 공의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베네벤토 공작의 약탈을 겪으면서 또 사라센인한테서 약탈을 당하고서 황제한테 보호를 요청했었다.

 

따라서 제국에 일치와 평화가 없는 상황에서 교회의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교구 시노드는 열리지 않았고, 참사회의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수도자들의 선교 사업도 멈췄고 수도 성소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제국은 국경이 없어져도, 내부 반란이 생겨도 힘있게 대항하지 못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해지자 교회 재산을 차지하고 힘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제국은 개별화하고 사유화하는 교회를 막을 힘이 없었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암울한 속에서도 교회와 수도원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에 따른 끈기와 반응하려는 노력이었다. 동시에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견뎌 낼 수 있도록 의지할 수 있는 권위가 필요했다. 의지할 권위가 필요함에 따라서 로마 교황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전통에 호소하게 되었다. 이때 나온 것이 ‘가짜(假) 이시도로 법령집’(Pseudo Isidoro)이다.

 

 

혼란 속의 수도 생활

 

정치적인 혼란과 야만인들의 약탈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수도원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844년에는 티오빌에서 시노드를 열어 세 형제가 의견을 모아 제국의 분할로 생긴 수도원의 손실을 줄이려고 했다. 모든 수도원은 교황의 뜻에 따라 교회법 테두리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해야 함을 역설했다. 846년에는 에페르나이에서 영주들한테 교회 재산과 수도원을 교회에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영주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혼란의 와중에서 수도원의 주인이 된 영주들은 수도자들의 삶을 위한 수입을 마음대로 하였다. 수도원이 누리던 경제적인 번영이 영주들 손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853년의 로마 공의회에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지적하고 예전의 법 규정에 대해 말했지만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다. 오를레앙의 지오나는 대성당 참사들의 생활에 대해 증언을 하고 있으며, 라인강 동쪽의 알프리도는 대성당의 조직에 대해서 말하면서 재속 사제들이 너무 세속적인 방법으로 산다고 질책하였다. 반면에 수도자들은 그들을 지켜 주고 의지할 힘이 없었다. 지방 영주들의 횡포에 대해 보호해 줄 제국에 힘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권위의 부재는 이전의 수도원 규칙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수도자들의 문화 활동과 선교에 대한 열성이 수도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가능성만을 보였다.

 

 

수도원의 자구책

 

카롤링거 왕조의 집안 싸움이 그치지 않고 영토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교회와 수도원은 위험스럽지만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가능한 한 방법을 모두 취하고 있었다. 라인강 동쪽은 그런대로 평온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서쪽에서는 권위의 부족으로 교회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문서를 통해서 부족한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가짜 이시도로 법령집’이라고 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로렌조 발라가 위작이라고 증명할 때까지, 그야말로 중세 교회 사상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다.

 

‘가짜 이시도로 법령집’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당시의 혼란스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하는 소박한 심정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빌리고 교황들의 서한과 훈령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교황청의 고문서고가 먼저 과거 문서집을 만드는 것을 보고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섞어 만들어 당시 교황의 지위 향상을 꾀하였다. 이 법령집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로마를 교황한테 준다는 증여 문서가 첨가되어 있는가 하면, 위작자들은 재속 사제들이 너무 세속적으로 살고 있는데 초대 교회 형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또한 교황들의 훈령을 통하여 초대 교회처럼 공동 생활을 하며 철저히 가난하게 생활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성 아우구스띠노의 진짜 문서를 통해서는 모든 수도자들이 본래의 생활을 하도록 강하게 요구하면서 성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새로운 규칙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그럴 필요성이 없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가짜 이시도로 법령집’의 목적은 영주들이나 주교구에 대한 주교의 권리를 옹호하고 교황권에 대한 권위를 높임으로써 성직 사회와 수도자들을 보호하고 교회 재산을 지키려는 데 있었다.

 

수도 생활의 규칙을 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시노드를 열기도 했고 많은 탁월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때 열린 시노드에서는 법적인 원장 선출을 요구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수도자들을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라임스의 임마로 대주교는 교구의 수도 생활에 대해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장의 자유로운 선출을 강조했다. 당시의 수도원장은 주변의 입김에 따라 임명되었기 때문에 수도 규칙을 지키게 하는 데 가장 큰 장애였다.

 

시노드나 주교들보다 수도 생활에 훨씬 영향을 끼친 것은 교황들의 활동이었다. 교황들은 교황청의 보호를 드러내는 여러 방법을 통해 수도원을 보호했다. 먼저 교회법적이며 자유로운 원장 선출을 다른 권위에 일임하였다가 직접 보호하다가는 나중에는 형식을 통해서 몇몇 수도원을 교황청 직속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베네딕도 3세 교황은 855년에 코르비에 수도원을 교황청 직속 수도원으로 하고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여러 교황들이 세속 권력과 대주교들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직접 보호하는 것이 수도원엔 큰 힘이 되었다. 베네벤토의 아이오 주교는 879년에 자신의 교구 소속인 모데스토 수도원을 교황청 직속으로 하고 여섯 개의 본당을 맡기기도 했다. 제국이 혼란스런 와중에 북방인이나 사라센인의 침입과 약탈로 어지러워진 수도 생활은 교황청의 위엄과 시노드와 주교들의 노력으로 그 불씨를 보존하였고, 열풍을 불게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카롤링거 제국은 유럽과 그리스도교 사회의 중심이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의 문예 부흥으로 모든 학문이 발전하고 중세의 교육 제도가 정착하고 예술이 번성하는데, 이 모든 문예 부흥에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수도원 사람들이었다. 물론 제국 밖의 교회인 스페인이나 아일랜드, 이탈리아 남쪽에서는 그들의 전통으로 수도원이 계속 발전되어 오고 있었다.

 

[경향잡지, 1994년 9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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