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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0: 초기 봉건 사회에 등장한 클뤼니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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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4

[새로 보는 교회사 10] 초기 봉건 사회에 등장한 클뤼니 수도원

 

 

초기 봉건 사회(887-962년)

 

카롤링거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사회는 극도로 무질서해진다. 강력한 국가가 없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유럽을 약탈한 노르만과 사라센 그리고 헝가리의 영향이 컸다.

 

이들의 침략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뚱보 칼(샤를) 왕이 노르만인들한테 패배한 시기(887년)로부터 오토 대제가 헝가리를 쳐 이기고(955년) 독일에서 황제로 대관이 되는 시기(962년)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때를 ‘서구의 암흑 시기’ 또는 ‘칼의 시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질서와 혼란 때문이었다. 사라센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로마를 약탈하였을 뿐 아니라 노르만인이 여기저기 정착하기까지, 이들은 유럽 전체의 도시와 수도원을 약탈하였다. 또 헝가리는 955년 패배하기 전까지 비잔틴 제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다. 이탈리아의 극심한 혼란은 교황직을 놓고 귀족들 사이에 권력 다툼으로 확대되어 교황직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 유럽 사회는 작은 봉건 국가로 쪼개지기 시작한다. 이 시대의 주된 관심은 바로 평화와 안녕이었다. 국가나 사회나 종족이 개인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자, 개별적인 관계 즉 주종 관계에서 충성을 매개로 봉건주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혼란이 유렵과 교회를 파멸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유럽이 형성되는 초기의 혼란이었고, 무질서한 때가 지나면서 유럽이라는 다민족 다국가의 형태가 아루어진 것이다.

 

 

수도 생활의 쇠퇴

 

제국 시대에 국가 질서와 통치 조직의 핵심이었던 수도원은 이제 침략과 약탈의 목표물이 되어 큰 피해를 입는다. 야만인들은 물건만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수도원엔 불을 놓고 수도자는 학살하였다. 이런 약탈은 노르만, 헝가리, 사라센이 거의 동시대에 전지역에서 행함으로써 많은 수도원이 황폐해졌다.

 

야만인들이 파괴하지 않은 수도원도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으니 탐욕스러운 지방 귀족이 수도원을 약탈했던 것이다. 이들은 수도원에 필요한 양식마저 가져가 수도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세속 일을 하거나 구걸을 하였다. 그러나 양식이 충분하여 수도자가 남아 있는 수도원도 이들 때문에 극도로 무질서해지는데, 바로 평신도 수도원장들이 이 무질서의 원천이었다. 평신도 수도원장들은 수도원 한편에 가정을 꾸리고 하인까지 두는 생활을 하였다. 기도하는 집에 세상을 즐기려는 사람이 살아서는 수도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거나 세속과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어떤 곳에서는 수도원의 수입을 나누어 가지고는 그 돈으로 각자 생활을 따로 하는 곳도 있었다.

 

이러한 무질서는 초기 봉건주의에 안전이란 문제로 생겨난 것이다. 국가와 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왕이나 귀족 또는 주교나 지방 귀족들이 성당이나 수도원을 개인 소유로 하여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 것이다. 개인 소유가 된 수도원과 수도원의 재산은 주인이 마음대로 하고 수도원장까지 임명하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수도원 수입의 일부를 신하한테 선물로 주기도 하였으니 수도원은 본래의 모습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 체계가 생성되면 수도 생활도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무질서한 시간이 길어지자 교회는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 쇄신의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교회와 수도원의 자유 즉 세속의 주인한테 예속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10세기경 수도원이나 수도자가 줄어드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껏 수도자들이 해온 일을 재속 사제한테 맡기고 수도원을 재속 사제들의 거처로 만든 것이다. 수도자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살기 때문에 개인 재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한테 드는 모든 경비를 수도원장이나 주인이 책임져야 하는데, 반면에 재속 사제는 개인의 재산이 있고 그 수입으로 살기 때문에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이 관리하고 있던 성당들을 재속 사제로 바꾼 것이다. 또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수도원도 평신도 주인들 즉 왕이나 귀족들이 유지를 위한 지출을 감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숫자만 쓰면서 수도자보다는 재속 사제를 더 선호했다. 심지어는 이러한 목적으로 수도자들을 쫓아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세속 생활을 하면서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따르기를 싫어한 수도원장이 수도자를 쫓아내고, 재속 사제로 대신해서 수도원의 봉쇄 구역을 허물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개혁을 위한 노력

 

이런 파행 속에서도 정상적인 수도 생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상당수의 수도원들은 수도원 규칙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와 교회가 혼란스러워진 상황에서 수도원의 쇄신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쇄신을 위한 노력이 888년 마인츠 시노드에서, 909년 트로슬리 시노드에서 나타난다. 이 두 시노드는 당시의 쇠퇴한 수도 생활을 개탄하고 재건을 위한 논의를 하였다. 여기서 논의된 해결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예전 교회법에 충실하도록 권하는 일이다. 첫째, 수도자는 세속과 격리된 기도 생활을 하고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충실하며, 재속 사제는 아퀴스그라나의 규칙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도원의 자유를 되찾는 일이었다. 마인츠 시노드는 누구도 수도원의 장상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으며, 수도원에 소속된 성당의 사제 임명은 수도원이 한다고 결의한다. 즉 카롤링거 제국 시대의 법과 교황청 직속 수도원들이 옛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시노드에 참가한 주교들한테는 상황을 반전시킬 험이 없었던 것이다.

 

수도원이 개혁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면서 귀족들이 수도원을 세우거나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제랄도 공작은 아우리악에 수도원을 창설하고, 보르고느 지방의 베르노는 기니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들 수도원들은 앞으로 수도 생활의 개혁을 주도해 나갈 클뤼니 수도원을 창설하게 한다. 이들 새롭게 창설된 수도원들은 곧바로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왕과 영주와 주교들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옛 교회법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교황청의 권위에 호소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생긴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메츠 공의회에서는 교회법대로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합쳐서 먼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질서를 회복한 사람이 유명한 오토 1세(936~973년) 황제이다. 오토 황제는 독일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무질서한 교황청의 질서를 잡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로써 교회와 수도 생활은 차츰 쇄신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클뤼니 수도원은 재건되거나 개혁된 수도원이 아니라 개혁을 위해 처음부터 새로 창설된 수도원이다. 그리고 이 수도원은 2세기 이상 수도 생활의 개혁을 이끌어 가는 중심지가 된다. 클뤼니 수도원은 두 사람의 힘이 합쳐서 창설되었다. 먼저 경건한 공작이라고 불리는 기욤이 자신의 영지 클뤼니에 수도원을 세우고, 주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이미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수도원장 베르노한테 수도원을 맡겼다.

 

클뤼니 수도원을 맡게 된 베르노 원장은 기니에 수도원을 세우고, 오툰의 성 마르틴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그 뒤 기니의 원장이 되었다가, 다시 바우메의 수도원을 재건해서 수도 생활을 개혁하고 있던 이였다. 베르노 원장이 두 수도원을 개혁한 첫 번째 방법은 평신도들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894년에 로마에 찾아가서 포르모소(891-896년) 교황한테 특전을 요청한 일이었다. 즉 자유로운 원장 선출을 보장하고 교황청의 보호를 받으며 면세 특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 생활에서는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엄격히 적용하고 부각시켰다. 기도하며 일하는 생활과 엄격한 공동 생활 그리고 세속과 격리된 침묵 생활을 강조하였다.

 

베르노 원장이 있는 두 수도원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베르노 원장은 수도원을 좀더 넓히고자 했다. 이때 기욤 공작과 뜻이 맞아 마콘 근처의 클뤼니에 910년 9월 11일에 여러 주교와 많은 평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클뤼니 수도원이 창설되었다. 이 자리에서 공작은 기도하는 수도자들의 집을 베드로 바오로 사도와 로마의 교황한테 바치고 수도원에 대한 모든 재산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베르노 원장은 이 새로운 수도원에 베네딕도 규칙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시편 낭송과 침묵과 복음을 강조하였으며 단식과 복장을 철저히 하고, 개인 물건을 금하고 순종과 정결을 철저히 요구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생활이 많은 신자들한테 알려지면서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수도원의 재산은 수도자들이 필요한 생활을 하고도 남게 되었다. 수도원을 개혁하려는 베르노 원장의 뜻이 인정되면서 여기 저기 수도원들이 그한테 책임을 맡겨 왔다. 따라서 재건해야 할 수도원과 새로 창설되는 수도원을 그한테 맡기면서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확산되어 나갔다.

 

‘가(假) 이시도로 법령집’에 나타난 교회법에는 한 명의 수도원장이 동시에 여러 수도원을 다스리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유럽이 혼란해지면서 이미 공작이나 백작이 큰 수도원을 할 수 있는 대로 소유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이 교회법은 더 이상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혁을 바라는 주인이 클뤼니 수도원에 요청하면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를 파견하여 수도 생활이 제 궤도에 오르도록 협력하였다. 그러나 베르노 원장은 이 여러 개의 수도원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지 않고 자기 개인한테 예속시켜 마치 자신의 재산처럼 926년에 죽으면서 다른 수도원의 주인들이 하는 것처럼 수도원을 나누어 주었다. 친척인 귀도(Guido)한테는 기니와 바우메와 에티체 수도원을 주고, 사랑하는 제자 오도한테는 클뤼니와 펠로스와 마싸이 수도원을 모든 재산과 함께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클뤼니를 계승한 이들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개혁 사업은 지속되지도 보르고뉴 지방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귀도가 받은 수도원들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오도의 클뤼니 수도원이 개혁 사업에 큰 영향을 끼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경향잡지, 1994년 10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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