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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 도요안 신부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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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08 ㅣ No.552

[도요안 신부 선종 특집]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 도요안 신부 삶과 신앙


한평생 소외된 노동자들의 벗으로 헌신 봉사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와 총무 허윤진 신부를 비롯한 사제단이 도요안 신부의 영면을 기원하는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도요안 신부, 이 사람을 어떤 말로 묘사할 수 있을까? 푸른 눈의 해결사, 한국 노동운동의 산 증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 많은 애칭을 갖고 있는 도요안 신부(세례자 요한·미국명 존 F. 트리솔리니·John F. Trisolini·살레시오회)가 22일 오후 선종했다.

 

신장암, 척추암, 임파선암 등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해온 도 신부는 22일 오후 서울 보문동 노동사목회관 7층 사제관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을 살펴보던 중 73세의 일기로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의 다섯 번째 영성시리즈 ‘교회의 전례로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자’(가톨릭출판사)와 노동사목위원회 설립 40주년 기념 ‘사회교리 자료집’을 탈고한 후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관구관 7층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25일 오전 9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됐다. 한평생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다 홀로 주님 곁으로 떠난 도요안 신부, 그의 삶과 신앙을 소개한다.

 

 

노동자의 아들 존 F. 트리솔리니, ‘도요안’으로 다시 태어나다

 

1937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트럭운전을 하는 아버지와 공장에 다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동자의 아들’ 도요안 신부는 1959년 미국 뉴저지주 돈보스코 신학대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이후 3년간 광주광역시(당시 전남 광주시)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 영어·라틴어 교사로 재직하며 그곳에서 ‘도요안’이란 이름을 얻는다. 한국으로 파견된 것도, ‘도요안’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우연’이었지만, 그는 이를 ‘필연’으로 만들었다. 1963~67년 이탈리아 로마와 토리노, 프랑스 리옹에서 유학하고 1967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로부터 40여 년간 노동자들의 벗으로서 평생을 헌신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던 당시, 보잘것없이 가난했던 한국을 선교지로 택해 돌아온 그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더욱 소외된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다.

 

외국인노동자돕기음악회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관람하고 있는 도 신부.

 

 

푸른 눈의 해결사

 

서울 도림동본당에 부임한 1968년부터 1982년까지 서울대교구 가톨릭노동청년회 남부지부 지도신부로 활동하며,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가톨릭노동청년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노동자를 대신해 체불임금 사업주를 찾아가 밀린 임금을 지불할 것을 설득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 이듬 해 설립된 ‘도시산업사목연구회’(현 노동사목위원회의 전신)의 초대위원장으로서 교회의 노동사목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고, 삼립식품(1973년) 사건이 발생한 당시 직접 삼립식품을 방문해 노동자 실태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1971년 11월 영창실업과 태광산업의 노동조합 활동을 지지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활동하는데 제약이 많아졌다. 1982년 고(故) 이용유 신부의 뒤를 이어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된 도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노동장년회 등 사도직 단체의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노동현실 개선의 지침이 되는 규약안을 만드는 데도 조력했다.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아버지

 

1990년대 들어 그는 88서울올림픽 이후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2년 명동 노동문제상담소 지도신부로 임명된 도 신부는 같은 해 8월 27일 노동문제상담소 3~4층에 한국 최초로 이주노동자 상담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가난한 이들 중 더욱 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 중에 더욱 소외된 이를 찾는 그의 푸른 눈은 쉴 틈이 없었다. 임금, 출입국, 의료 및 산재 관련 문제를 겪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고용주를 찾아가 한국말이 서툰 이주노동자들을 대변했고,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올바른 관련법이 제정되도록 촉구하는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한 우리의 의견’ 작성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관구관 7층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투병 - 사랑으로 병마를 이겨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한 도 신부는 1993년 신장암에 걸려 신장 하나를 떼어냈다. 암세포는 척추로 번져 2004년엔 종양이 둘러싸고 있는 척추 하나와 갈비뼈를 이식하기도 했다. 보조기구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노동사목위원회가 외국인 산재노동자들의 쉼터인 베다니아의 집을 개설하고, 국가별 공동체를 조직해갈 때도 그는 적극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산업연수생제도, 고용허가제, 방문취업제 등 이주민에 대한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발표될 때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또 서울 노동사목위원회의 연례행사인 ‘연초노동전망세미나’와 그 후신인 ‘노동쟁점나눔’이 열릴 때마다 주제 발표자나 토론자로 참석해 교회 안팎 이주노동 사목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비전을 제시하곤 했다.

 

 

신문 읽고 공부하는 신부님

 

그는 공부하는 신부였다. 그의 매끄러운 한국어 실력과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필력은 모두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 책상에 앉아 노동 관련 기사를 검색해 읽고 쟁점이 될 만한 부분이 있으면 스크랩해 분석했다. 오랜 투병으로 몸이 쇠약해졌지만 그는 불의 앞에 분노할 에너지는 늘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이귀남 법무부장관이 코리아타임즈에 기고한 ‘외국인에게 개방된 사회’라는 제목의 기사(2009년 10월 28일)를 읽고 강한 반감을 표명하며, 그 기사에 대한 반박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고, 모 대사관이 자국의 미등록 이주민들의 인권을 돌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도 분개하여 기자에게 사실보도를 요청했다. 그는 그렇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회 구석구석을 살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끊임없이 읽고 공부하고 글을 썼던 도요안 신부의 마지막도 책상 앞이었다. 허윤진 신부(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가 도 신부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책상 앞에 잠이 든 듯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모니터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뜻을 찾고 있었다.

 

 

위대한 유산

 

도요안 신부는 생전에 가톨릭출판사를 통해 6권의 단행본을 냈다. 노동관계 서적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1995), 「교회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노동」(2003)과 4권의 영성시리즈 「생명의 샘 정녕 당신께 있고」(2000),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2001),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2006),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2009)에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던 그의 영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8년 한국에 재입국해 110만 이주민시대인 2010년 선종하기까지 42년간 그는 단 한순간도 세상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세상을 사랑했기에 불의를 보고 분노했고, 마지막엔 ‘장기기증’으로 남은 사랑을 전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광야에서 외치며 주님의 앞길을 닦았던 세례자 요한처럼, 그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성실히 닦았고, 2010년 11월 22일 그 길을 걸어 주님께로 갔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임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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