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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오데트 - 부활, 믿음이 주는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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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921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부활, 믿음이 주는 새로운 삶

 

 

‘영화를 읽어주는 남자’라는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영화는 서구에서 생겨나 발전해 왔습니다. 영화가 성장해 온 양분은 바로 서구 문명이라는 토양입니다. 그 토양을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은 바로 그리스도교적 가치입니다. 저는 앞으로 그리스도교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영화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에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지를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서두가 길어졌네요. 오늘 소개해 드릴 영화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1955년 작, 「오데트 Ordet」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오데트 Ordet」는 덴마크어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극작가이자 루터교 목사인 카이 뭉크가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보옌가의 농장에서 시작합니다. 모르텐 보옌은 덴마크의 평범한 소농장주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보옌가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바로 둘째 요한네스입니다. 아버지 모르텐은 꺼져버린 신앙의 불씨를 되살릴 개혁가가 되기를 소망하며 아들 요한네스를 신학교에 보냈지만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미쳐버립니다. 그는 마을 뒷산에 올라 위선자와 불신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고, 자신이 나자렛 예수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텐의 첫째 아들 미켈은 농장의 건실한, 아버지의 믿음직한 일꾼입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미켈에게는 두 딸과 잉어라는 이름의 신실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습니다. 잉어야 말로 이 농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보옌 농장의 막내 안데스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의 초반부를 이끌고 가는 중심 갈등입니다. 안데스는 농장 건너편 마을의 재단사 페터의 딸 안나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안데스와 안나는 서로의 집안이 속한 종교적 견해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잉어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모르텐은 안나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재단사 페터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지만 기대와는 달리 싸움을 벌이게 되고 서로의 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합니다. 그때 페터의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잉어가 난산으로 위험하다는 미켈의 전화입니다.

 

이제 영화의 후반부 갈등은 죽음 앞에 선 잉어의 위험과, 그 상황을 바라보며 잉어가 죽은 후 라자로처럼 되살아나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하는 요한네스 사이에서 펼쳐집니다. 잉어는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은 형수에게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하던 요한네스는 잉어를 되살리기는 커녕, 기절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어디론가 떠나갑니다. 며칠 후 잉어의 장례식 날, 보옌가의 가족들과 페터가의 가족들이 함께 잉어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행방불명되었던 요한네스가 정신이 멀쩡해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무도 진실하게 하느님께 잉어를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음을 비난합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잉어를 살려달라고 빌었다면 잉어는 살아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잉어의 딸 마렌이 삼촌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어서 빨리 엄마를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소녀의 꾸밈없는 진실한 믿음을 본 요한네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잉어에게 깨어날 것을 명령하고 그 순간, 잉어는 눈을 뜨게 됩니다.

 

황당한 이야기라구요?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알레고리의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요한네스의 말과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있고, 잉어가 되살아났을 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이상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죠. 이를 통해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드레이어의 후기 3부작으로 불리는 「분노의 날」, 「오데트」, 「게르투르드」를 관통하는 한 단어는 ‘편협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봅시다. 이 영화에는 옛 것과 새로운 것, 신앙과 과학, 신을 믿는 다른 방식들 등 대립하는 여러 가치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모르텐과 페터의 싸움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덴마크는 1536년부터 루터교를 국교로 채택한 개신교 국가이지만 그 안에서 교파간의 갈등은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 보옌가가 속한 교파는 덴마크의 국부라고 불리우는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은 개척주의 신앙으로 짐작됩니다. 이에 반해, 페터가의 신앙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적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결국 서로를 단죄하고 저주하며 파국에 이릅니다. 하지만 잉어의 ‘부활’을 통해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믿고 있을 뿐, 결국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믿음’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속 목사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의사와 벌인 논쟁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때 뿐입니다. 요한네스가 자신의 힘만으로 기적을 행하려 할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영화는 ‘믿음’이 어떤 ‘목적’도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도 아닌, 완전히 의탁하고 뜻을 기다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어린이의 순수한 믿음을 통해 다시 살아난 잉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새로운 삶을 얻는 방식은 편견에서 벗어나 관용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나의 그것과 같은 가치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나만이, 혹은 우리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영화는 관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잉어의 부활이 가져온 결과는 관용의 새로운 삶입니다. 긴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을 맞은 이때, 우리 사회에도 관용이 가득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넘실되길 기대해 봅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봄호(Vol. 33),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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