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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15-16: 은이성지 - 조선의 첫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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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2 ㅣ No.1629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5) 은이성지 : 조선의 첫 사제 (1)


김대건 성인 신학생으로 선발된 유서깊은 산속 교우촌

 

 

- 은이성지 전경.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교회 사목에 뛰어들었다. 선교사들은 조선 신자들을 위해 다양한 사목을 펼쳤는데, 선교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활동 중 하나가 ‘조선인 사제’ 양성이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한 성 모방(베드로) 신부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현지인 사제 양성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은이성지. 이곳은 박해시대 신자들이 모여살던 은이 교우촌의 공소가 있던 자리다. 은이공소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철판으로 된 조형물이 서 있다. 조형물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소년시절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형상이 담겨져 있다.

 

1836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경기도,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며 사목활동을 펼치는 한편, 신학생을 선발하고자 지도층 신자들에게 사제가 될 소양을 지닌 소년들을 추천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은이를 방문한 모방 신부는 김대건에게 세례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이렇게 신학생을 선발한 것은 모방 신부의 개인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조선대목구를 맡았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선교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는 주로 수도회들이 담당했는데, 수도회들은 현지에 수도원을 세우는 방식으로 선교를 해나갔다. 이 방식은 각 수도원의 정통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복음의 토착화나 선교지에 교계제도를 정착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함으로써 조선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여겼고, 이를 위해 신학생 양성에 힘을 쏟았다.

 

 

꼴찌 신학생

 

우리는 김대건을 ‘조선의 첫 사제’로 기억하지만, 김대건은 모방 신부가 선발한 신학생 중 마지막으로 선발된 신학생이었고, 평가에서도 늘 꼴찌를 면치 못했다.

 

모방 신부는 처음에는 최양업과 최방제만을 마카오로 보내고 김대건은 나중에 보내려 생각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뒤늦게 선발된 탓에 라틴어 등 기초학업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지속되는 조선교회의 상황에서 앞으로 마카오로 보낼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시작부터 늦었던 김대건은 그를 가르치던 신부들이 “사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염려할 정도로 세 신학생 중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에 대해 “문체가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고 또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또 성격 면에서도 “자주적이고 경솔하며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신심이 깊고 실력이 우수해 모든 스승 신부들이 기대를 걸던 최방제와 판단력이 우수하다는 칭찬을 듣던 최양업과는 비교가 되는 평가다.

 

게다가 김대건은 마카오로 떠나던 당시부터 8년가량을 늘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며 지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도 하얗고 노랗게 변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스승 신부들은 건강한 몸으로도 수행하기 힘든, 박해 중인 조선 선교를 김대건이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째가 된 꼴찌

 

이렇게 뒤처지던 ‘꼴찌’ 김대건이었지만, 김대건이 낙담했거나 포기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먼저 사제품을 받은 조선의 첫 사제가 됐다.

 

라틴어 실력이 뒤처져 지적을 받던 김대건은 후에는 라틴어만이 아니라 프랑스어와 중국어도 구사할 정도로 언어공부를 이어나갔다. 이 언어공부 덕분에 1842년 프랑스함대 에리곤호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할 수 있었다. 이때 에리곤호 의사가 처방한 약이 김대건에게 크게 효과를 나타내 김대건을 늘 괴롭히던 건강문제도 해결됐다.

 

또 김대건은 ‘자주적이고 경솔하다’고 지적받던 성격을 ‘용기’로 승화시켰고, 이를 통해 바닷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성공시켰다.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해 서울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고, 배를 통해 다시 중국으로 입국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을 염려해오던 매스트르 신부는 이 사건을 두고 “그는 자주성과 경솔성에도 불구하고 헌신의 확실한 표를 보였다”며 “중국으로 주교를 영입하러 오기 위해 미지의 항해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조선 포교에 큰 봉사를 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김대건을 바라보는 조선 관료들의 태도에서도 김대건이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김대건을 대단한 학자로 여겼다. 실제로 김대건은 신학과 철학, 언어능력뿐 아니라 지리학, 항해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에 조선의 대신들은 옥중의 김대건에게 세계지도의 번역과 지리개설서 편찬 작업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김대건의 나이는 25세. 꼴찌 신학생으로 조선을 떠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 김대건 성인상.




- 은이성지 내 은이공소터.




- 은이성지 입구.




- 김대건 기념관 내부.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4년 1월 1일, 이승훈 기자]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6) 은이성지: 조선의 첫 사제 (2)


성 김대건, 짧지만 열성적인 사목 활동으로 깊은 인상 남겨

 

 

은이성지 내 김가항성당 내부. 성 김대건 신부가 서품 받은 중국 진자샹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은이는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소기도 하지만, 사제품을 받고 다시 조선을 찾은 성 김대건이 사목을 펼친 장소기도 하다. 사제가 된 성 김대건은 어떻게 사목을 펼쳤을까.

 

 

중국에서의 서품

 

은이성지 마당에 들어서니 새하얀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십자가 아래 ‘천주당’(天主堂)이라는 문구가 적힌 성당은 그간 내린 하얀 눈 속에서도 더 하얗게 돋보였다. 중국식 성당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성 김대건이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巷)에 자리한 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한 건물이다. 성당은 한자를 우리 발음으로 읽어 ‘김가항성당’이라고 부른다.

 

성 김대건이 서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공로를 크게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부제품을 받은 성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해 선교거점을 마련한 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한 것이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이런 성 김대건의 성공에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사제서품식을 주례했다. 그리고 사제가 된 성 김대건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성 김대건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부터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는 등 조선 입국로 개척을 시도하면서 지리·항해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아왔다. 또한 실제 조선에 입국해 상황을 살피면서 배를 통한 입국에 따르는 어려움도 면밀히 분석했다. 덕분에 올바른 항로 설정과 항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김가항성당 외부 전경.

 

 

짧았지만, 열성적이었던 사목

 

김가항성당 제대 옆에 있는 김대건 성인 유해함.

 

 

성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고 약 13개월 동안 활동하다 순교했다. 그마저도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기에 체포되기 전까지 신자들을 만나며 사목한 것은 겨우 6개월 남짓이었다.

 

성 김대건이 이 6개월간 어떤 사목활동을 펼쳤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다만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통해 성 김대건의 사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성 김대건은 서울이나 강경 등에서도 활동했지만, 특히 용인지역과 은이를 중심으로 사목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시복재판 자료에 따르면, 오 바실리오는 1846년 봄 은이마을에서 성 김대건을 봤다고 증언한다. 임 루치아도 양지의 터골에서 성 김대건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 김대건이 체포되기 전 신자들과 함께 봉헌한 마지막 미사인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성 김대건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있던 은이마을에서 봉헌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6개월 동안 성 김대건을 만난 신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목했는지 보여준다.

 

남경문(베드로) 성인은 성 김대건을 통해 회개의 삶을 살다 순교했다. 남경문은 회장으로 활동하다 기해박해 때 배교하고 8년에 걸쳐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성 김대건을 만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으며 죄를 뉘우쳤고, 매일 기도와 고행으로 과거를 속죄했다. 그리고 성 김대건이 체포되자 자신도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다 붙잡혀 순교했다. 남경문만이 아니었다. 성 김대건의 시복재판 자료에 따르면 이 베드로는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데 기쁨과 열성을 다했고,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했다”고 김대건을 기억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교우들이 이 신부(성 김대건)를 많이 사랑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고 밝혔다.

 

성 김대건은 옥중에서도 사목을 멈추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꾸준히 성사를 집전하며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봤다. 또 자신을 심문하며 박해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다.

 

옥중에서도 열성적이었던 성 김대건의 사목을 증언하는 인물이 바로 임치백(요셉) 성인이다. 임치백은 옥중에 있던 성 김대건에게 가르침을 듣고, 옥중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다.

 

김대건기념관 내 김대건 성인 두상.

 

 

조선교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

 

성 김대건의 활동은 신자들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조선교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지도 제작이다. 성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고 조선을 방문한 시점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성 김대건은 서울 한성부(漢城府) 서고의 지도를 참조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이미 제작된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해박한 지리지식 없이는 지도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 김대건은 ‘조선전도’에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기록하면서, 지명을 우리말 발음 그대로 옮겨 로마자로 표기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 입국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안의 섬과 바위를 상세하게 표기했다. 윤지충(바오로) 복자의 고향 진산 등 교회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도 표시했다. ‘조선전도’는 사목을 위한 지도였던 것이다.

 

또 성 김대건은 조선교회의 선교자금 마련을 위한 방법도 고민했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의 물물교역을 관찰하면서 양국의 품목을 분석해 조선에서 팔 수 있는 품목을 제안했다. 실제로 1845년 조선 입국 당시 성 김대건은 서양 마포를 산 가격의 두 배 값으로 팔아 자금을 만들었다. 또 1845년 7월에는 편지를 통해 조선에서 통용되는 은전 모양을 그려 보내며 중국의 은괴를 녹여 조선의 은괴를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은이성지 내 김대건 성인상(왼쪽)과 김대건 기념관.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4년 1월 14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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