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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1: 중세 교회의 기틀을 형성한 클뤼니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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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5

[새로 보는 교회사 11] 중세 교회의 기틀을 형성한 클뤼니 수도원

 

 

지난달에 클뤼니 수도원이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면 개혁의 성과가 그렇게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 후임 원장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나를 알아보고자 한다.

 

 

성 오도 원장

 

오도 원장은 926년부터 942년까지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클뤼니 수도원의 명성을 전세계에 알렸다. 오도 원장은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한 대단한 활동가였다.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의 생활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끊임없는 투쟁으로 세상을 이겨내야 하며, 그 방법으로 ‘고행’과 ‘겸손한 자기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도 원장의 개혁 방법은 앞으로도 두 세기나 더 뒤의 후임자들이 따르는 사도적 방랑 생활이었다. 그는 지치지 않는 여행가였다. 항상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프랑스 전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까지 늘 길을 걷는 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오도 원장은 동시에 수도원의 주인이었던 주교들과 세속 영주들과도 담판을 했다. 그 가운데 이상적인 신앙 생활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쉽게 오도 원장한테 설득당하였고, 어떤 때는 오도 원장의 명성을 듣고 초대를 하여 자신의 수도원을 개혁해 주기를 바랐으며, 어떤 주인들은 수도원을 직접 관리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오도 원장은 많은 수도원의 수도 질서를 바로잡으면서 클뤼니의 영향을 한 지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여러 지방으로 확산시켰다. 그 가운데 앞으로 수도원 개혁의 또 다른 중심이 되는 쌍(Sens) 지방의 플로리 대수도원(Fleury-sur-Loire)과 쌩 피에르(Saint-Pierre-le-Vif) 수도원을 들 수 있다. 동시에 오도 원장은 이탈리아까지 활동의 영역을 넓혔는데, 그것은 클뤼니가 교황청 직속으로 로마 교황청의 재가를 받고 세금을 내어야 했는데 원장은 이 기회에 자신의 이상을 홍보하였다. 당시에 로마는 알베리코 공작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알베리코는 오도 원장을 로마와 그 주변의 모든 수도원의 대원장으로 임명했다. 따라서 오도 원장은 로마에 있던 수도원은 물론 베네딕도 성인이 직접 세운 수비아코 수도원들도 직접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도 원장의 개혁 방법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방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수도자들 자신이 개혁을 거부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알베리코 공작한테서 이탈리아의 파르파 수도원을 개혁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살아 생전에 오도 원장은 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도 원장은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서 교황청의 확인을 받았으니, 931년에 요한 11세 교황으로부터 클뤼니 수도원을 베드로 사도의 보호 아래 둔다는 특전을 받았다. 또한 교황은 오도 원장한테 여러 대수도원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직접 운영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규칙적인 삶을 익히기 위해서 다른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클뤼니에 와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다. 결국 교황청은 오도 원장한테 수도 생활의 개혁을 완성시키는 임무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개혁의 결과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 모든 수도원의 개혁이 지속될 수 있는 조직적인 체계가 불완전하였다.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일이 오도 원장 한 개인한테 달려 있었던 것이 한계였다. 어떤 수도원에서는 수도원 주인한테서 일시적으로 임무를 받았을 뿐이었고, 원장 직무를 받은 경우에도 그 권한이 실질적이지 못해 그의 사후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방법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클뤼니 수도원과 구조적으로 지속적인 연관을 가진 수도원도 있었다. 가끔은 클뤼니 수도원 부속으로 클뤼니 수도원에서 관구장을 임명하였고, 그중의 몇은 중요한 수도원이 되었다.

 

오도 원장 당시나 그 직후에는 법적 체제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대수도원의 실질적인 권위가 있었고, 그것은 오도 원장 사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 베네딕도 정신에 투철한 제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전유럽에 걸쳐 개혁을 지속해 나갔다.

 

오도 원장 다음에는 941년부터 954년까지 아이마르도가 수도원장으로 있었고, 그 뒤로도 뛰어난 성덕을 지닌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도 원장의 개혁 사업이 이어졌다고 하겠다.

 

 

성 마이올로 원장

 

마이올로 원장은 954년에 아이마르도 원장을 계승하여 994년까지 40년 동안 수도원을 이끈 성인이다. 귀족 출신인 아이마르도는 풍채가 훌륭하였으며 언변이 뛰어나서 청중을 감동시켰으나,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과 다른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을 따르는 수도자로서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삶의 군주’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오도 원장의 방법을 따라서 개혁을 위한 여행을 끊임없이 하면서 군주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토 대제와 그 아들 오토 2세와 보르고뉴의 왕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교황들한테서도 존경을 받았다. 그의 시대에는 클뤼니의 활동이 더욱 확산되었으니, 오도 원장 때 개혁을 하려다가 도로 무질서해진 수도원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게 하였으며, 특히 독일 지역에 개혁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성 마이올로를 계승한 원장은 성 오딜로네로서 그는 1049년까지 55년 동안이나 클뤼니를 이끌었다. 이때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이 더욱 확산되었으나, 이러한 확장과 큰 영향력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클뤼니의 전통

 

클뤼니는 거룩한 대원장들 아래서 차츰 발전해 갔다. 원칙적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따랐지만, 특수한 상황이 생겨나 법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세부 사항에서는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를 대비한 관습이 여러 원장을 걸치면서 생겨났다. 이것을 ‘클뤼니 규범’(Ordo Cluniacensis)이라고 하는데, 법적인 규범이라기보다는 클뤼니 수도원의 관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규범을 클뤼니 수도원을 따라 개혁된 모든 수도원이 따랐고, 이 관행을 따른다는 사실 하나로 법적인 조직은 아니지만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전통을 각 수도원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 마이올로 원장 재임 때 처음으로 관행을 기록하면서 그 뒤로 새로운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보충해 갔다. 예를 들면 어느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수도자들한테 주지시키기 위한 내용을 이전의 책을 거울삼아서 새로이 엮어 책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 전통은 근본적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기본 규칙인 ‘침묵’과 ‘기도’와 ‘일’을 수도 생활의 근본으로 삼는 데 바탕을 두고, 그 실천 방법에 대해서 어떤 점은 강조하고 어떤 점은 덜 강조하는 형식이었다.

 

침묵을 말할 때, 성 베네딕도는 내적 생활을 위해서, 기도하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침묵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이를 아주 엄격하게 적용했다. 베르노 원장은 수도자들 사이에 꼭 필요한 대화를 위해서도 손으로 의사 표시를 하라고 했으며, 성 오도 원장은, “수도자의 생활은 얼마나 침묵을 잘 지키는가에 달려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대로 침묵하지 않고 한 모든 좋은 일이나 훌륭한 일은 수도자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간에 대해서도 기도와 일로 구분을 하면서, 아주 세세히 규정짓고 있었는데, 클뤼니에서는 공동의 일이나 일정한 기도로 시간을 이상적으로 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도 원장과 후임자들은 성무일도를 길게 늘여 많이 하면서 수도자들의 시간을 전례 기도로 채워지게 했다.

 

따라서 전례가 아름답고 다양하게 거행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전례 기도가 과도하면 수도자들이 흥미를 잃거나 피곤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스스로 내적 생활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하느님의 정신이 사람의 영혼에까지 들어가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상들은 클뤼니를 나서는 수도자들이 단순히 기도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들을 떠나 보냈다.

 

클뤼니의 전통 중에서 특별한 것은 자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수도원장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형제애에 대해서 강조하고 실천했다. 오도 원장은 거지한테 자신의 망토를 준 마르티노 성인에 대해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고, 성 오딜로네는 거지들을 위해서 교회의 값나가는 보석과 아름다운 그릇들을 팔아서 나누었다. 설제로 클뤼니 전통의 하나는 모든 수도자들의 집에 자선을 위한 집이 있어서 순례하는 사람들이나 여행하는 사제나 수도자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음식을 청하는 거지들과 묵어가기를 바라는 거지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찾아 가까운 마을을 방문했다. 이렇게 클뤼니 수도원에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일을 큰 전통으로 알았다.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

 

제2의 야만인 침입으로 인해서 유럽의 기본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봉건 체계가 형성되면서 교회 생활과 수도 생활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수도 생활은 수도원의 주인이 생기면서 이 주인들의 횡포로 수도 생활 자체가 큰 위협을 받았다. 교회 또한 평신도에 따른 교회의 자유가 사라지고 교황청도 몇몇 귀족의 영향에 놓아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달이 기울면 다시 차 올라오듯이 여러 곳에서 수도원의 개혁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 움직임이 교회를 또한 제자리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이런 여러 수도원 개혁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크게 영향을 끼친 수도원이 클뤼니 수도원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한정된 생각으로 세상의 위험에 대해 개혁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이 수도원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가톨릭과 정치가 분리된 현대의 눈으로 지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클뤼니 수도원은 여러 방면에서 당시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을 심어 주었고, 또 개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길러 냈으며, 중세 교회를 형성하는 기틀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경향잡지, 1994년 11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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