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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4: 어머니와 호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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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8 ㅣ No.368

[추기경 정진석] (3) 어머니와 호롱불 (상)


늘 인자하던 어머니가 불같이 화내신 날

 

 

- 1994년 어느 날 정진석 추기경(당시 주교)이 어머니 병문안을 하는 모습.

 

 

어린 진석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늘 바빴고, 쉼이 없었다. 당시의 어머니들은 거의 비슷했다. 가난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오직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분주했다. 자기 자신은 없는 듯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셨다. 진석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는 수십 명의 일꾼들 밥을 짓느라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다. 일이 다 끝난 저녁에도 식구들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며 정리까지 다 끝내야 겨우 한숨 돌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밤에는 홀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다듬이질을 했다. 언제나 가족들을 위해 일만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일손을 놓을 때는 기도할 때가 유일하셨다. 항상 틈틈이, 일처럼 쉼 없이 기도를 바쳤다. 바느질하던 그 자리에서, 묵주를 꼭 쥐고 무릎을 꿇으셨다.

 

진석의 어머니는 이웃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실 때가 많았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무엇이라도 하나 챙겨주려는 마음이 지극정성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려는 마음은 늘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사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것이 젖동냥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다 산모가 죽거나 가난 때문에 남의 집 앞에 버려져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또 아이는 낳았는데 산모의 영양이 부족하여 젖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젖을 먹지 못하고 죽고 마는 아기도 많았다. 그래서 동네에는 ‘젖동냥’을 다니는 가난한 이웃이 흔했다. 배고파 우는 갓난쟁이를 데리고 그보다 조금 큰 아이들이 젖동냥을 다니기도 했다. 진석의 어머니는 젖동냥 오는 아이들을 내치지 않고 얼른 젖을 물려 허기를 달래게 했다. 

 

“에구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대문을 붙잡고 쭈뼛거리며 선 가난한 이웃을 보면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얼른 집 안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우는 아이를 받아다 호롱불 아래서 서슴없이 젖을 물렸다. 배가 고파 울던 아이들은 어느새 어머니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곤 했다. 진석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 정진석 추기경의 모친 이복순 루치아(1909-1996) 여사의 영정 사진. 정 추기경은 지금도 잠자리 머리맡에 이 사진을 두고 있다.

 

 

어느 날 어린 진석은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옛날에는 전염병도 많던 시절인데, 혹시라도 그런 아이가 엄마 젖을 먹으면 나도 병에 걸릴 거라고 걱정은 안 했어?”

 

그러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진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짧게 대답하셨다. 

 

“그래서 한쪽으로만 아이들 젖을 물렸단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어머니의 말씀에 진석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머니는 행색이 남루하고 지저분한 걸인들이 밥 동냥을 오더라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식구들이 먹다 남은 밥이라도 반찬이랑 챙겨주셨다. 그래서 집에는 밥을 동냥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때로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동냥을 오면 밥상을 차려주시기도 했다. 밥 동냥을 오는 더럽고 냄새나는 걸인들을 한 번도 내치지 않으니까 버릇처럼 어머니만 찾는다고 식구들이 불평했지만 진석의 어머니는 묵묵히 밥상을 차려낼 뿐이었다.

 

언제나 인자하셨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혼내신 때를 진석은 잊지 못한다. 어린 진석이 욕을 하는 아이들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진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욕설이 어떤 뜻인지도 모르고 밖에서 들은 것을 흉내만 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다. 과묵하고 인자한 성품의 어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진석을 크게 나무랐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진석이 평생 유일하게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일이었다. 

 

그날 이후 진석은 욕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간다는 말처럼 그는 평생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6ㆍ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9세였던 그는 약 100명 장정의 지휘를 맡게 된 일이 있었다. 날마다 위급한 상황이 연속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는 결코 저속한 욕설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유일했다. 욕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부대를 떠나게 될 때 그보다 훨씬 연장자였던 부대원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저속한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대원들이 모두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였고, 따라서 그의 지휘를 전폭적으로 따랐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욕을 할 줄 알지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욕을 못 배웠기 때문에 못하는 사람은 가정과 부모로부터 큰 복을 받은 사람이지….”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시간을 회상하면 큰 축복을 받았다고 되뇐다. 

 

“엄마의 희생과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야.”

 

팔순이 넘은 정 추기경은 지금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어머니를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고 부른다.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존재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9일,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추기경 정진석] (4) 어머니와 호롱불 (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려 주교와 담판 지은 어머니

 

 

- 1961년 3월 19일 첫 미사 후 가족들과 함께. 정진석 신부의 오른쪽이 모친 이복순 여사.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진석의 어머니는 늘 부드럽고 조용하며 인내롭고 신중한 분이었다. 한편으로 어머니는 무언가 그것이 옳은 일이고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결정을 내리면 어떤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 결정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신중하게 고민하고 또 생각하셨다.

 

진석은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을 꼭 빼닮았다. 소년 진석의 꿈은 발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발명하여 세상에 선익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에게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발명가들의 삶을 기록한 위인전을 닳도록 보았다. 진석은 그가 사랑했던 발명가들을 따라 절로 과학을 좋아하게 됐다. 꼬마 과학자 진석의 마음속에는 미래에 만들 여러 개의 발명품 도면이며 실험 준비로 가득했다. 이런저런 발명품을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만들겠다는 당찬 꿈을 꿀 때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진석은 꿈을 먹고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가 대학 1학년생이 되어 여전히 푸른 꿈을 꾸던 어느 날, 갑자기 터진 6·25 전쟁은 세상 모든 비참을 가져온 듯 암담했다.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발명된 많은 것들이 무기로 변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진석은 그의 꿈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다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끔찍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과학자의 꿈을 꾸던 청년에서 사제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되었다. 물론 어렵게 입학한 서울대 공대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입학 나이 제한 때문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석이 더 늦기 전에 신학교를 찾을 마음을 먹었더라도 그에겐 또 하나의 벽이 있었다. 당시 신학교에선 외아들을 사제 지망생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집안의 대가 끊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외아들이 신학교에 가려면 주교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진석은 마음속에 신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더욱더 커졌지만 쉽게 마음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우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버려두는 것 같아 한 인간으로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생각이 바뀌었다. 불효한다는 것이 큰 고통이었다.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뭐! 사제가 되겠다고…. 고생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를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제일 바라는 것일 거야….’ 그러다가도 ‘아니야, 사제가 되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더 큰 효도가 될 거야. 내가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분의 부르심이 맞다면 나는 바르게 응답해야 하지 않나?’ 하루에도 생각이 여러 번 바뀌어 혼란스럽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속으로만 끙끙 앓던 어느 날, 진석은 어머니께 용기를 내서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내가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음에도 어머니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마치 그가 사제가 되길 기도하신 듯이…. 그에 용기를 얻은 진석은 주교님께 말씀을 드려 허락을 받아 주십사 어머니께 부탁했다. 진석은 만약 주교님께서 허락을 해주면 신학교에 가고, 허락을 못 받으면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단념할 작정이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어머니는 노기남(1902~1984, 최초의 한국인 주교, 1962년 대주교로 승품) 주교를 찾아갔다. 반갑게 맞는 노 주교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진석을 신학교에 보내겠다고 운을 떼었다. 노 주교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진석이가 신학교 들어가면 혼자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려고 그래….”

 

명동성당 사목회장이었던 진석의 외할아버지 덕분에 노 주교는 진석의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쉽게 물러서지 않고 떼를 쓰는 어머니를 노 주교는 재차 말렸다. 

 

“내가 사는 것은 걱정하지 마시고 진석이 꼭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세요!” 

 

어머니의 고집에 깜짝 놀란 노 주교는 이내 그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난 모르겠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밤이 되자 호롱불 아래 말없이 바느질하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진석을 불렀다. 

 

“주교님이 허락하셨다.”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 반짝이는 어머니의 선한 눈을 보며 진석은 생각했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이구나, 이건 인간의 생각은 아니구나.’ 

 

진석의 어머니는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었다. 외아들마저 하느님께 바쳤으니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번도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내놓고 걱정을 하지 않았다. 훗날 주교로서의 길을 걷는 진석에게 조금이라도 분심이 들까 염려하여 연락도 잘 하지 않았다.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왜 힘들고 외롭지 않았겠는가. 그저 사제의 길을 걷는 아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제품을 받는 당사자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사제가 되는 당사자보다 그 부모님이 더 위대한 것이다. 

 

진석은 훗날 노 대주교의 비서 신부가 되었다. 로만 칼라를 하고 교구의 사제 서품식을 볼 때마다 그는 새 사제들의 부모님을 꼭 바라보게 된다. 노 대주교에게 당차게 신학교 입학을 허락받던 그 날의 어머니의 비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1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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