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2: 중세 유럽 사회의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6

[새로 보는 교회사 12] 중세 유럽 사회의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

 

 

유럽 사회 형성기(962-1140년)

 

서양의 중세는 지금의 서양 사회를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형성시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중세 사회는 제2차 야만인 침입으로 사회의 모든 체계가 무너지면서 봉건제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이때 서양 세계를 유지하고 형성시킨 바탕 뿌리는 그리스도교였다. 두 번째로 침입한 노르만인, 헝가리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기존의 유럽 사람들과 같이 유럽 사회를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자연 사회의 모든 조직과 문화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게 되었다. 오토 3세의 신앙이 중심이 되는 ‘보편 제국’의 개념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기간을 가지자는 ‘신(神)의 평화’ 제안이나 전유럽이 참여하는 십자군 운동은 바로 그리스도교 사회를 형성하는 개념이 된다.

 

이렇게 유럽이 형성되는 시기를, 독일 제국이 정착하는 962년에서부터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는 1140년까지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세 시기로 나누어서 당시의 수도 생활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시기는 962년에서 1059년 사이로, 제2차 야만인 침입을 극복하고 독일 제국이 형성되면서 수도 생활이 개선되는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유럽이 확장되면서 교권이, 교회에 대한 속권의 간섭에 투쟁하는 기간으로 소위 ‘그레고리안 개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059년에서 1123년까지이다. 세 번째 시기는 1123년에서 1140년까지로 교권과 속권이 화해를 하며 자리잡는 시기이다.

 

 

독일 제국의 부흥기(962-1059년)

 

오토 1세가 칼 대제를 계승하자 제국은 차츰 제자리를 찾는다. 오토 1세는 제국을 재정비하면서 영주들한테 자신의 권력이 골고루 미치게 하였다. 동시에 슬라브족과 헝가리족의 침입을 막았으며 이탈리아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로서 유럽에 그리스도교를 심고 교회 조직을 보호하고 교회 쇄신을 이끌면서 교회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칼 대제의 대관이 있던 800년의 상황과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이 되던 962년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대부분의 유럽이 제국의 영토였던 칼 시대와는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 그리고 중부 일부분만이 오토 1세의 영토였을 뿐, 프랑크 왕국이나 영국 지방의 섬들이나 이베리아 반도는 제국의 영토에서 빠져 있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두 제국의 정치 형태가 달랐던 것이다. 권력이 막강했던 칼 대제와는 달리, 오토 1세는 지방 영주들과 계속해서 협상을 해야 하였다. 황제의 권력이 직접 미치는 곳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국한되었다. 황제는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황실이나 주교 또는 수도원과 하급 귀족한테 의지해야 했다. 그 한 방편이 주교들을 일정한 땅의 영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주교나 수도원장들은 땅을 통치하는 세속 권력과 함께 교회를 다스리는 교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가 주교 임명을 직접 관장하는 계기가 되어 뒷날 주교 서임권을 놓고 황제와 교황 사이에 알력을 파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황제의 간섭과 보호가, 결과적으로 교회 쇄신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당시 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개혁의 의지가 강했고, 황제가 임명한 주교들 역시 참사회원 또는 쇄신된 수도원 출신으로 쇄신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교회에 대한 황제의 간섭이 심하지 않아 참사회나 수도원에서는 정상적인 선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교회 쇄신은 교황들과 황제들을 가깝게 하였다. 오토 3세는 실베스텔 2세 교황과, 하인리히 황제는 베네딕도 3세 교황과, 하인리히 3세 황제는 레오 9세 교황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황제들과 그 부인들이 교회 쇄신의 큰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오토 대제 때 시작된 독일 황제들의 교회 쇄신 운동은 교회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쳤다. 전례와 예술에서뿐 아니라, 수도 생활이 옛 전통을 찾아 재조직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 귀족 때문에 문란해진 교황청 질서를 바로잡았다. 나아가 하인리히 3세는 ‘수트리 공의회’(1046년)에서 정통 교황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개혁 정신에 충실한 독일인 교황들이 나타나서 ‘그레고리오 개혁’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국의 수도 생활 쇄신

 

클뤼니 수도원은 프랑스와 부루군디 왕국을 비롯 제국 전지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독일 제국에서는 이와는 다른 형태의 수도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황제가 교회 일에 열성인 관계로 수도원들이 제국과 제국 교회의 조직으로 흡수되어 제국에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 권력층과 교회가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어, 제국과 제국 교회가 구성하는 조직은 황제와 주교들과 로마 교황청에 의존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수도 생활은 주교의 권위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모든 수도원이 주교 관할에 놓여 간섭을 받았다. 주교들이 수도원의 자유를 인정하고 규칙에 따라 원장을 선출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주교와 수도자 사이에 마찰이 많았다. 독일 제국을 부흥시키는 일에 교회를 이용한 일은, 칼 대제가 제국을 부흥시키는 일에 수도원을 이용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제국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은 보롬스의 ‘부르카르도 문헌집’에 잘 나타나 있다. 부르카르도는 보롬스의 주교로 수도원장 알베르또와 함께 제국의 모든 문헌집을 수집 · 연구하여 제국에 필요한 조직과 법을 위한 문헌집을 만들었다. 이 문헌집에서는 “교회의 우두머리는 교황과 황제와 그리고 주교”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모든 수도 생활의 형태 즉 참사회원, 봉쇄 수도자들, 재속 동정녀, 과부들, 은수자들은 주교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즉 시모니아(Simonia ; 사도행 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교회의 어떤 직이나 영적인 일을 돈으로 사고 파는 모든 일을 말한다. 아직 교회 질서가 잡히지 않은 시기에 성행했던 악습으로 11세기 교회 개혁에서 크게 다루게 되는 폐단이다.)와 조카주의(Nepotism ; 교회의 직이나 성직들을 자신의 친척 특히 조카한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 혜택을 주는 폐단이다.) 같은 교회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문헌집을 보완, 예외 규정을 만들어 주교의 권한을 제한했다.

 

제국적이며 특히 주교 중심 구조의 수도 생활은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따라서 순교 정신을 찬양하고 은둔 생활을 선호하는 경향이 일어났고, 이런 정신적인 동향이 시와 연극으로 표현되어 대중한테 영향을 끼쳤다. 한편 프랑스에서 쇄신된 수도 생활이 건너와 여러 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아인지덴은 수도원 쇄신의 구심점이 되었다. 수도 생활의 쇄신은 자율적인 형태로 발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존폐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원장을 자유롭게 선출하자며 자율을 강조하면 수도원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의 보조조차 끊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독일 제국의 수도 생활은 카롤링거 왕조 체계의 영향을 받았으며, 황제와 제후 그리고 주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개선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 생활

 

카롤링거 왕국이 해체되고 제2차 야만인 침입으로 오랜 기간 큰 혼란과 피해를 입은 지역이 이탈리아 지방이다. 동시에 영토를 갖는 영주가 되는 교황직도 귀족들 사이에 권력 다툼의 대상이 되어 그야말로 무질서한 사회를 이루었으며, 사라센인과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많은 것을 약탈당한 수도원은 물질적으로도 비참한 지경이었다. 따라서 수도원을 쇄신하거나 재건하려면 침입자들이 남긴 피해를 복구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때 클뤼니의 오도 원장이 로마와 그 주변의 수도원 개혁에 착수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정치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교황직도 안정을 시키고 난 뒤에도, 이탈리아에서는 옛 수도원 체제와 새로운 체제가 갈등을 겪는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은 널리 확산되고 활발히 진척되어 나갔으나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오토 3세 황제는 제국을 부흥시키면서 로마가 선교 활동이나 신비주의나 수도 생활의 중심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옛 전통을 지닌 수도원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제국 교회는, 발롬브로사 등이 세운 새로운 수도 생활 형태와도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이탈리아 반도가 갖고 있던 특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 몬테카시노와 같은 옛 수도원을 재건하는가 하면, 이탈리아의 주교들은 수도자들의 자율권을 폭 넓게 허용하였다. 이렇게 이탈리아 반도에는 여러 형태의 수도 생활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황제나 실베스텔 2세 교황, 성 로무알도는 은수 생활과 선교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폼푸사 수도원 등을 세워서 제국을 부흥시키는 밑바탕이 되게 하였다. 다음으로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을 받고 개혁된 수도원들이 클뤼니의 자매 수도원으로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볼피아노의 윌리엄은 수도원을 창설하여 클뤼니에 맡기기도 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은 이탈리아 남쪽 지방 비잔틴 제국의 영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 은수자였던 성 알페리오가 클뤼니에서 수도 생활을 한 뒤에 남쪽 카바에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다음 시대에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새롭게 씨가 뿌려진 수도원들 옆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파르파나 몬테카시노 수도원들이 수도 생활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몬테카시노에서는 알제르노가 고행 생활과 규칙을 강화하고 필사실을 재건하였다. 파르파에서는 1014년부터 1023년 사이에 ‘법전집’(Collectio Canonica)을 완성하여 독일 ‘문헌집’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이 법전집도 제국의 쇄신을 적극 호응하고 있으나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즉 어느 누구한테도 판단받지 않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수도 생활을 규정짓기 위해서 아주 다양한 규범을 모았는데, 당시에 모을 수 있는 모든 법전과 공의회 문헌 그리고 ‘가(假) 이시도로 법령집’까지 참고로 해서 여자 부제, 재속 동정녀, 과부에 관한 규정까지 제시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규정을 모은 것은 당시의 다양한 수도 생활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분위기는 제국과 다른 왕국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교들은 수도원의 자유 문제와 영혼의 사목 일에 관한 한 항상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경향잡지, 1994년 12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7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