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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을 따라서4: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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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5 ㅣ No.371

가톨릭 영성을 따라서 (4 · 끝)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가난과 겸손을 덕목으로 삼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 영성 체험



이탈리아로 여정을 옮긴 기자단은 ‘청빈’ ‘가난’ ‘무소유’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아시시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지니고 있는 움브리아 지방, 그 가운데서도 수바시오산 중턱에 있는 중세 도시 아시시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기운이었다. 서쪽 언덕 기슭의 수도원 건물이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 중세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아시시는 그만큼 역사적 예술적 유적들도 방대한 곳인데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인연으로 이제는 ‘평화의 도시’라는 닉네임이 더 익숙한 지명이 됐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성모마리아대성당 외부 장미정원으로 가는 복도에 세워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 흰 비둘기 두 마리는 항상 동상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성인이 노래했던 ‘태양의 찬가’ 선율이 들려오는 듯한 움브리아 지방의 평야,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솟은 모습으로 순례객들에게 다가서는 수도원 광경은 ‘가난’과 ‘청빈’의 중요성을 설파한 성인의 인상과 겹쳐보였다.

수도원이 있는 언덕은 원래 사형장이 있던 곳으로 ‘지옥의 언덕’으로 불렸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타 언덕을 떠올렸다. 그리고 묻히기를 원했다.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시모네 디 푸차렐로’ 라는 한 아시시 출신 귀족이 1226년 성인이 세상을 떠나고 6개월이 지난 후 수도회 가족들에게 서쪽 언덕을 기증했고 이듬해에는 ‘모날도 디 레오나르도’가 언덕 남쪽 끝에 있는 숲을 헌납했다.

성인의 사후 2년이 지난 1228년 3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무덤 성당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7월 17일 성당의 머릿돌을 축성했다. 지옥의 언덕이 천사의 언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대성당과 수도원을 가기에 앞서 성인이 처음 공동체를 세웠던 곳 그리고 성인이 숨을 거두었던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찾았다.

초기 전기들에서 ‘작은 집’으로 불렸다는 이 장소에서 성인은 첫 동료들과 함께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 움막을 지었다. 작은형제회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료들과 함께한 성인의 삶과 활동은 교회 쇄신을 위한 청빈 운동으로 전개돼 나아갔다.

프레스코화로 돼 있는 성당 전면 위쪽 ‘프란치스코야 너의 청을 받아들인다’라고 적힌 글귀가 마음에 더욱 와 닿는다. 그 아래쪽에는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 아시시의 명물이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이태리 4대 고딕성당 중 하나로 손에 꼽히는, 이탈리아 건축사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지하무덤과 1층 성당 그리고 2층 성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1253년 5월 23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축성한 것으로 기록이 나타난다.


성당 경내 중앙에 작은 경당처럼 자리하고 있는 포르치운쿨라(4m x 7m)에 무릎을 꿇었다. 한 생의 전부를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썼던 성인처럼 낮고 낮은 형태다.

성당 바깥에는 성인이 욕정을 이겨내기 위해 몸을 굴렸다는 가시없는 장미밭이 있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성인의 동상을 지키고 있다는 한 쌍의 비둘기도 보였다. 800여 년 전 성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대성당과 수도원으로 올라 가면서 중세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골목길들을 지났다. 이 지방 특유의 옅은 핑크와 하얀 돌들로 지어진 집들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 천사들의 성모마리아대성당내 성인이 선종한 자리에 보관된 생전의 수도복 허리끈.


아시시의 명물이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대성당은 이탈리아 4대 고딕성당 중 하나로 손에 꼽히는, 이탈리아 건축사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지하무덤과 1층 성당 그리고 2층 성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1253년 5월 23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축성한 것으로 기록이 나타난다.

2층 성당에서는 13~14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지오토의 ‘프란치스코의 일생’ 벽화가 눈에 띈다. 이탈리아 최고의 프레스코 작품이라 했다. 총 28개 장면에서 성인의 생애가 생생히 잘 드러나고 있었다.

유물소성당에는 성인의 수도복과 부제시절 성찬 전례 때 사용됐던 성작, 그리고 이집트 술탄에게서 받았던 ‘상아로 만든 피리’ 등이 전시돼 있었다.

대성당 남쪽에 위치한 수도원 건물은 1400년대 말 수도원 정원을 정리한 교황 시스토 4세 덕택에 현재의 꼴을 갖췄다고 한다.

기자단이 아시시를 찾았던 이날도 여행철이라고 하기엔 다소 쌀쌀해진 날씨 임에도 성인의 삶과 발자취를 찾아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아시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너 거룩한 도시, 아시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리라. 너로 인하여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네 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들이 살 것이며, 너로부터 많은 영혼이 간택되어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시시를 이렇게 축복했던 프란치스코 성인.

1986년부터 성인의 사랑과 평화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세계 종교인 평화 기도회’가 이곳 아시시에서 개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성인이 아시시를 축복했던 그 마음이 몇백년을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징표일 것이다.

아씨시 새성당(Chiesa Nuovo)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구알 티에로 신부.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2회칙 1,1)이라 제시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살고자 노력했다. 그는 1224년 9월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았다. 그토록 원했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像)이 된 것이다.

아시시 골목길에 자리 잡은 새성당(Chiesa Nuovo)에서 성인의 21세기 제자라 할 수 있는 구알 티에로 신부를 만났다. 그는 “사부님의 고향이자 발자취가 어린 아시시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세상 밖 사람들은 이 세상이 단지 거쳐가는 순례의 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재물에 집착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한 티에로 신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이란 일상의 삶 안에서 ‘단순한 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아시시 순례 내내 ‘평화’와 ‘가난’이라는 단어가 화두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눔의 부재로 빈부 격차가 늘어나고 ‘작음’의 정신이 더욱 절실한 세태가 떠올려졌다. 전 생애를 통해 ‘작음’안의 가난과 겸손의 모습을 보이며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치스코대성당 2층 성당 앞 정원. 토우 십자가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성인이 태어난 생가터.

[가톨릭신문, 2011년 12월 25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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