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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3: 제국 밖의 교회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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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7

[새로 보는 교회사 13] 제국 밖의 교회 재건

 

 

카롤링거 제국은 유럽을 통일했지만 그 지역은 상당히 한정되어, 라인강 동쪽 지방이나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북쪽의 섬 나라들은 제국의 영향권 밖에 있으면서 제 각각 고유한 교회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기존의 그리스도교 사회가 제2차 야만인 침입을 물리친 뒤에 유럽 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이와 같이 전체 유럽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는 12세기까지 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난관을 극복해 왔다.

 

그 가운데 중세 유럽의 선교와 수도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친 아일랜드 교회와 게르만인의 선교를 담당했던 영국 앵글로 색슨족의 수도 생활 재건, 독특한 전통을 형성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교회와 수도원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아일랜드 교회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던 아일랜드는 해적 생활을 하는 바이킹족(族)이 침입하기 좋은 지역이었다. 853년경, 더블린이 바이킹족의 근거지가 되면서 아일랜드는 바이킹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원시 종교에 열렬한 침략자들은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동시에 점령 지역을 황폐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에 아일랜드는 ‘성인들의 섬’이라는 별칭을 들을 만큼 모든 지역에 수도원이 세워져 있었고 수도 생활과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침략자들은 거의 모든 수도원을 파괴했고 파괴하지 않은 수도원도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다. 침략자들이 그리스도교 성지에서 그들의 종교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이교도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일랜드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그리스도교 사회로 복귀하는 데는 여러 요인 가운데서 먼저 침략자들이 자기네 종교에 열성이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전례와 관습과 성사까지도 수용하는 유연성이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요인은 우두머리가 정치적으로 개종하면서 모든 부족이 개종하는 경우였다. 그렇다고 아일랜드가 제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가 다시 그리스도교 나라가 되는 결정적 요인은 침략자에 대한 켈트족의 끊임없는 항거였다.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영웅 브리안 보루는, 40년 동안 바이킹족에 대항하다가 1014년경에 더블린 근처의 전투에서 적장과 함께 전사함으로써 아일랜드에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바이킹족은 추방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 아일랜드에 흡수되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일랜드는 자신들 고유의 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전체 교회와 일치하는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 뒤 카셀(1101년)과 브레사일(1111년) 시노드를 통해서 그리스도 문화가 재건되었으며,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영국 교회

 

영국 교회는 아일랜드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칼 대제 시대에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던 영국은 바이킹족의 침입으로 크게 두 나라로 분리 통합된다. 하나는 북쪽에 바이킹족이 세운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앵글로 색슨족이 세운 나라였다. 이 두 나라는 전체 섬의 지배권을 두고 두 세기 동안 줄기차게 투쟁을 한다. 여기서는 영국에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영국과 교회를 재정비하는 데 공헌한 두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알프레도 왕을 들 수 있다. 바이킹족은 834년경부터 약탈을 시작하여 866년 이후에는 요크 지방을 중심으로 영역을 남쪽으로 확장해 나갔다. 875년경에 바이킹족의 구토룸 왕이 영국을 지배하고자 할 때 영국을 살린 이가 바로 알프레도였다. 878년, 바이킹족을 이긴 알프레도는 구토룸 왕과 그의 신하 30여 명이 세례를 받게 하는 등 899년 쉰 살로 사망할 때까지 왕국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영국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과거의 교회나 사회의 법을 모아서 법전집을 만들어 종교, 시민, 법제, 행정의 질서를 마련했다. 동시에 교회 조직을 중심으로 백성을 이끌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법전을 앵글로 색슨족의 말로 펴내 언어의 발전을 가져왔고, 특히 수도 생활 재건의 틀을 마련했다.

 

에드가르도 왕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두 나라로 나뉜 영국의 통일을 위해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일치된 그리스도교 문화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화 형성에 수도자들이 가장 크게 이바지하였다. 수도 생활은 침략자들의 시대에도 지속되었지만 에드가르도 왕(959~975년) 때에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처럼 영국의 가톨릭 교회는 왕들의 노력으로 재건되었으나, 16세기 헨리 8세 때에는 모든 가톨릭적 요소, 즉 수도 생활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당시 에드가르도 왕과 캔터베리의 대주교 오다와 윈체스터의 주교 아엘페는 알프레도 왕의 뜻에 따라 교회 쇄신에 주력하였고, 왕을 보필하던 충직한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 재건을 도왔다. 그들은 성 에텔발도와 성 둔수타노와 성 오스발도였다. 왕과 그 측근들은 수도 생활의 쇄신이 성직자들을 고무시키고 왕국의 신앙 생활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폐허가 된 대수도원을 재건하고 새로운 수도원을 창설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

 

둔수타노 대주교는 대륙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글라스톤베리의 수도원장을 역임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어서도 재속 사제의 쇄신을 위해서 특별히 노력했다. 에텔발도와 오스발도는 이상적인 수도 생활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에텔발도는 아빙돈 수도원장으로서 963년에 윈체스터의 주교가 되자 대성당의 참사회원을 모두 아빙돈의 수도자로 바꾸었다. 이들은 윈체스터 주변에 수도원을 재건하고 성당의 책임자들도 수도자들로 바꾸어 가면서 교회 쇄신에 힘썼다. 성 오스발도 역시 보르체스터 교구에서 이와 비슷하게 일을 했다.

 

수도 생활을 통해서 교회를 쇄신하려던 이들은 모든 것을 문서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970년에는 윈체스터 시노드를 통해 서로 다른 관습을 통일하는 ‘영적 동맹’을 맺었고, ‘영국의 합의된 규칙’(Regularis concordia Anglicae nationis)이 나오게 되었다. 이 규칙은 이전에 있던 수도원 규칙들, 즉 성 베네딕도, 성 그레고리오와 성 이시도로, 성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을 인용하면서, 왕국의 수도원에 허락할 특권이나 법을 명시하였다. 당시의 교회 쇄신은 왕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며, 주교들이 대성당의 수도자들 가운데에서 선출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재속 사제들보다 수도자들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수도 생활의 재건은 그리스도교의 문화 전통과 선교 활동의 전통이 되살아나게 하였다. 그러나 에드가르도 왕과 쇄신의 주역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재속 사제들 특히 쫓겨난 참사회원들의 반발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바이킹족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앵글로 색슨족과 융합되어 갔다.

 

반면에 대륙에서는 롤로네를 수장으로 하는 바이킹족들이 세느강을 오르내리면서 철저히 약탈을 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방어를 위해 대대적인 전쟁을 하는 한편, 노르망디 지방을 그들의 영지로 할애하여 공국을 형성시켰다. 노르망디인의 세례는 처음엔 개종으로 볼 수 없는 정치 사회적인 것이었지만, 11세기에 나타난 공작들이 노력하여 수도원을 창설하고 이들을 내적으로 개종시킴으로써 차츰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어 갔다.

 

11세기초에 리카르도 공작은 자신의 공국을 정비하고 행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리스도교 나라가 되도록 수도자를 교회 조직의 중심으로 하여 노르망디인들의 개종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야만인 침입은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유럽 문화 속으로 흡수되면서 혼란을 끝맺는다.

 

 

스페인 교회

 

스페인 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무술만(회교도)한테 정복당한 지역에서 신앙을 보존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서쪽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교 지역이 합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술만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9세기부터 11세기 중엽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끼리 대립하고 있었다.

 

회교도들은 점령 초기에는 그리스도인들한테 관용을 베풀었다. 추장들은 822년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브데르 라만 2세 때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라만 2세는 무술만이 개종하는 것을 금하고 아울러 무술만이 된 스페인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것을 금했다. 이때 한떼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이슬람과 예언자 마호메트를 비난하여 무술만을 자극하였고, 852년에 추장이 된 마호메트 1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다가 1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르도바에 있는 무술만 정부가 독일 제국과 사신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용과 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961년에 리치몬도 주교가 만든 달력을 무술만 추장한테 전했는데, 그리스도교의 축일과 전례에 따라 만든 달력을 주었다는 사실은 10세기 중엽에는 성당과 수도원에서 자유롭게 전례가 거행되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주교들은 코르도바의 궁정에 초대되었는데, 일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술만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북서쪽에 있는 그리스도교 국가와 무술만의 이베리아 반도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이때 콤포스텔라가 유럽 전체의 순례지가 되면서 스페인 십자군 파견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大) 야고보의 시선이 발견된 곳에 경당을 짓고, 이베리아 반도 신앙의 수호자로 선포하고, 899년 5월 6일에는 그를 가톨릭 군대를 이끄는 수호자로 여겨 대대적인 대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이 축성식이 곧바로 로마에 전해지면서 무술만과 대항하는 스페인의 상황이 유렵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유럽 군주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10세기말경에 무술만 왕국에서는 알 만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리스도교 나라를 점령하고 중요한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알 만술이 사망하고(1002년) 코르도바의 칼리프가 쇠약해짐에 따라서 이 현상도 끝난다. 그리스도교국은 점점 영역을 넓히고 교회와 수도 생활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무술만의 침입과 약탈은 스페인에 남아 있던 서고트족의 전통과 전례가 무너지면서 로마 전례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수도원 쇄신과 재건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과 지도로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는 1977년 사제 서품 뒤 1986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교회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구 성북본당 본당 신부를 거쳐 지금은 효성여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겸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5년 1월호, 구본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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