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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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 꿈나라의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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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2 ㅣ No.366

[추기경 정진석] (2) 꿈나라의 노랫소리


“감사하나이다 오 천주여~” 저녁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사제평의회를 마치고 나오자 5월의 맑고 청량한 햇살이 명동대성당을 비추고 있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곧장 주교관 입구로 내려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가을이면 주렁주렁 감이 열려 명동 한복판에서 풍요로운 풍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감나무다. 풍성한 감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소를 짓는 모습은 가을마다 정 추기경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작년 가을에도 정 추기경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 나무는 언제나 잘 익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정 추기경은 가지 사이로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을 느끼며 가을을 한창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교복을 입은 계성여고 학생들 한 무리가 저희끼리 좋아서 재잘대며 정 추기경을 지나쳐 갔다. 

 

정 추기경은 소녀들에게 이 기분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에 말을 걸었다. 

 

“얘들아, 땅만 보며 떠들지만 말고 하늘을 보고 감나무도 보렴! 가을이면 가을을 느껴야지?” 

 

그러자 아이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까르르 웃어대며 속사포처럼 대답을 쏟아냈다. 

 

“우리는 그런 거 안 봐도 가을 잘 느껴요!”

 

“할아버지나 많이 느끼세요!”

 

“우리가 알아서 해요!”

 

돌발적인 소녀들의 반응에 정 추기경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할아버지 이야기한 것 바로 취소다!”

 

그러면서 낮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래, 지금 나이에 감나무 보며 가을을 느끼겠나. 나이를 더 먹어야지….”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린 손녀의 당찬 주장에 자신의 자세를 한껏 낮춰주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정 추기경은 바로 주교관 3층의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왔다. 이 방은 14년 전 정 추기경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쓰시던 그 모습 그대로 14년 동안 이 사무실에서 일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뿐 아니라 가구의 위치도 하나 바꾸지 않았다. 외부 손님들에게 죄송하니 “수십 년 된 소파라도 바꿔 보자”는 사람들의 말에도 “아직은 몇 년 더 쓸 수 있다”며 거절하곤 했다. 

 

주교관 추기경 집무실 책상 자리에 앉으면 왼편 창문 밖으로 계성여고 운동장이 보였다. 창문을 열고 있다 보면 체육을 하는 여고생들이 떠들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늘따라 운동장이 휑하니 비어 있어 적막함마저 있었다. 정 추기경은 언제나처럼 이곳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젖었다. 

 

“허 신부, 청주에서 올라온 지 벌써 14년이나 되었어. 어린 시절부터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는 명동성당을 이제는 떠나야 해.”

 

정 추기경의 생각은 하염없이 과거로 날갯짓하고 있었다.

 

-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정진석 추기경.

 

 

추기경 정진석은 1931년 12월 6일 서울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보통 관례대로 명동성당에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니콜라오’란 세례명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호적에 등록된 생일은 12월 7일이지만 그 전날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호적 문서로 보면 낳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구 교우 집안에서는 먼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이름을 올리고, 그 후 호적에 이름 올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진석이 태어나서 줄곧 지낸 곳은 수표교 근처에 있었던 외할아버지 집이었다. 명동성당 회장을 지낼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외할아버지는 장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였다. 당시 장롱은 소위 돈이 좀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혼숫감으로 꼭 준비하는 세간 중 하나였다. 특히 자개가 박힌 장롱은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었다. 

 

진석은 어머니 이복순 루치아(1909∼1996)의 품에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낮이면 스물다섯 명 정도 되는 외할아버지 공장의 인부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대여섯 명의 가정부들과 함께 한나절 점심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외할아버지의 공장은 항상 주문이 밀려 호황이었다. 낮에는 인부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소음으로 하루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어린 진석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다 보니 기도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됐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석아! 만과 바칠 시간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 안방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앞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기도문을 바닥에 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 준비를 했다. 저녁에 드리는 만과는 시간이 오래 걸려 어린 진석에게는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늘날 「가톨릭 기도서」와 같은 「천주성교공과」가 있었다. 신앙 선조들에게 천주성교공과는 1862년 목판으로 인쇄돼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도서였다. 이 「천주성교공과」를 펴놓고 감사경과 함께 만과를 바친다. 삼종경, 천주경, 성모경, 종도신경, 고죄경, 호수 천신송, 죽은 모든 믿는 이를 위하여 외우는 축문삼덕송…. 만과는 이 기도들을 차례로 모두 바친다. 무릎을 꿇고 만과를 바치다 보면 1시간은 훌쩍 넘었다. 사순 시기에는 시간이 더 걸린다. 만과를 바치고 나서 성 요셉 성월 기도 하고, 가정을 위한 기도 하고, 복음 말씀도 읽고, 십자가의 길을 시작한다.

 

- 1939년 7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기념 사진을 찍은 9살 어린이 정진석.

 

 

“감사하나이다. 오 주 천주여, 너 나를 보호하사, 이 밤에 평안케 하시고, 다행히 죄를 범치 않게 하시고, 오늘날(밤)까지 생명을 늘려 주심이로소이다. 주께 구하오니 오늘 밤에 나로 하여금 미혹하여 죄에 떨어지지 말게 하소서.”

 

저녁에 긴 만과를 하다 보면 어느새 어린 진석은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사르르 잠이 왔다. 한참 지나고 나면 결국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고 말았다. 외할아버지, 외삼촌,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이 한목소리로 기도를 바치는 소리는 꿈나라에서 들리는 노래이다.

 

지금도 정진석 추기경은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어린아이가 기도하기가 여간 싫은 게 아니었을 것 같은데, 당시엔 싫고 좋고 할 생각의 여지도 없었다. 기도는 갓난아이 때부터 그냥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도의 시간이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가 되었고, 자신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가끔씩 생각한다. ‘어머니는 그때 누구를 위해, 어떤 지향을 갖고 그렇게 열심히 평생을 기도하셨을까?’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 것만 같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2일,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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