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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14: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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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8

[새로 보는 교회사 14]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의 교회

 

 

북방민족들의 약탈로 말미암아 야기된 중세 초기의 혼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 혼란은 그야말로 교회 안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큰 문제를 초래했는데, 먼저 칼 대제 이후 권력에 공백이 생겨 이탈리아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교황직이 문란해진 것이다. 황제의 보호로 지켜져 온 교황직이 이탈리아 귀족들 마음대로 선출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 황제들이 야만인들을 평정하고 제국을 정비하고 나서 이탈리아로 내려와 이 문제에 대하여 간섭하면서 교황직은 안정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는 그레고리오 개혁시대(1059~1123년)의 교회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의 이름을 빌려오긴 했지만, 실제로는 1046년의 ‘수트리(Sutri) 공의회’ 때부터 독일인 교황들이 시작하여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이후까지 지속된 모든 개혁을 일컫는 말이다. 개혁은 크게 교회 밖(외부)의 문제와 교회 내부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 밖의 문제는, 서임권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고유권한인 성직임명에 관한 문제이며, 교회 안의 문제는, 바로 교회법과 교회의 행정부재로 생긴 성직매매와 사제 독신제 문제였다.

 

 

서임권 투쟁

 

11세기 유럽은 여러 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인구는 증가했으며 지리적으로도 확장이 되었고 도시가 형성되는 한편,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생산이 증대하는 등 전반적으로 사회가 향상되는 시기였다. 이 무렵 하느님의 왕국을 지상에 확립하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교황이 나타났다.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확고한 신념으로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교회 안팎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가 품은 기본적인 질서구도는, 세상의 구원이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한테 주신 사명으로 교회가 이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황들은 왕이나 제후들이나 교회의 주인들이 성직을 서임하는 것에 반대하여 투쟁했다. 사유 교회 제도 개념에서 출발했던 이 평신도 성직 서임은, 바로 교회의 자유에 직결되는 문제였고 아울러 여러 가지 영적 폐단의 원인이 되는 본질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관계에서만 성직이 주어진다면 교회의 영적 임무는 등한시되는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맞상대가 된 사람이 하인리히 4세(1056~1106년)였다. 하인리히 4세는 아홉 살 때 황제위에 올라 한동안 어머니의 섭정 하에 있다가, 1065년 열다섯에 직접 통치에 나선 젊은 군주였다. 이 젊은 통치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였고 주변의 자문위원들이 제공하는 처사 역시 현명하지 못하여 교황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관계는 서임권 투쟁이라고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권(Sacerdotium)과 속권(Imperium)의 대립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세기 전반에 걸친 통치자와 교황 사이의 알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제나 세속의 통치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 안에서 모든 법적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고 생각하여 교회 내의 문제까지 간섭하려고 한 반면, 교황은 하느님께로부터 베드로한테 주어진 권한이 교황한테 있으므로 세속의 통치자도 교황한테 순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이러한 생각은 1075년경에 발표한 ‘교황훈령(Dictatus Papae)’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훈령은, 교황은 누구한테도 재판을 받지 않으며, 황제와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서약을 비롯 충성 서약을 해제할 수 있으며, 또한 황제까지도 폐위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천명했다.

 

이 같은 영적 권한과 세속권한의 대립은, 오토 1세 때부터 많이 생긴 고위 성직자들이 국가의 직책에 취임하면서 발단되었다. 특히 주교 영주는, 주교이면서 영주였기 때문에 그 임명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주교의 임명을 평신도한테 맡길 수 없었고, 황제는 자신의 권력기반인 영주 임명권을 다른 이한테 내어줄 수 없는 권한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대립이었다. 크게는 주교 영주에 관한 일이었지만, 작게는 모든 사유 교회제도에 넓게 퍼진 교회직의 자유로운 선출과 임명 문제였다. 이 투쟁은 길고도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의 조직과 자유를 재정비하는 커다란 개혁으로 교황의 권력이 모든 나라에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혁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개혁된 수도회 사람들이었다.

 

 

성직 매매(Simonia)

 

‘그레고리오 개혁’은 레오 9세 교황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레오 9세 교황은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혼란된 시대에 나타나 만연하고 있는 폐단들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공의회를 통해 교회법이 선포되었고, 여러 교황들은 이 교회법이 시행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여러 폐단 가운데서 특히 강조된 사항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것과 사제 독신제 의무 준수’였다.

 

일단 여기서 성직매매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분석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기록으로 대할 때 과연 얼마만한 숫자가 폐단에 젖어있었는가 하는 건데,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먼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이야기되는 것은 당시의 특수한 사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제없이 사는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지만, 세금을 훔친다든지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는 온 세상을 덮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것은 사과 백개 중에서 스무 개가 썩었다면 이때 스무 개는 아주 많은 숫자가 된다. 그런데 백 개의 사과가 다 썩고 스무 개만 남았다면, 이 스물이라는 숫자는 아주 적은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따라서 폐단을 이야기하면서, 사과가 많이 썩었다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단순하게 백 개가 다 썩은 것처럼 쉽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직매매(Simonia)라는 말의 정의는 성스런 것을 돈이나 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은 전체 역사를 통하여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있었지만, 10세기부터 11세기에 특히 많았다. 성직매매에는 성직자가 교회직무를 얻기 위해서 돈을 주는 ‘사는 시모니아’가 있고, 성직자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돈을 내게 하는 ‘파는 시모니아’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파는 시모니아’의 폐단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1) ‘사는 시모니아’

 

주된 원인은 바로 평신도의 성직 임명권에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관례로 세속의 주인이 성당을 소유하게 되면 그 성당에 속한 다른 재산이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토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당의 직무를 줄 때도 토지나 방앗간 책임자 자리에 자신의 신하를 임명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때 생산이 있는 곳의 책임을 받으면서 얼마간의 돈을 내기로 약속을 하게 된다. 성당의 직무를 받으면서도 똑같이 돈을 내기로 약속한다면 바로 이것이 ‘사는 시모니아’가 되는 것이다.

 

교구를 얻는 데 돈을 내는 관행이 생겨난 때가 대체로 10세기 말경에서 11세기 초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압보네 수도원장이 “평신도가 교구를 파는 듯한 저런 관행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고 탄식을 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자제가 많아지면서 영지가 있는 주교직을 억지로라도 얻어내고 싶어할 때라든지, 교구가 비었는데 후보자가 많을 때, 돈을 내고서라도 교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생긴 관행으로 보인다. 교구를 파는 현상은 문서상 나타나나 본당이나 경당의 직무에 관한 문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는 아주 사소한 일로 여겨서 문서를 남기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11세기, 모든 사람한테 주인이 있는 봉건제가 정착이 되고 나서는 하급 성직자들이 농지가 딸린 성당의 직무를 얻어야 할 때 돈을 내는 관행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상황이 지방마다 다르고 영주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였겠지만, 어떻든 이같은 일은 개혁이 되어야 했다.

 

(2) ‘파는 시모니아’

 

만일에 교회 직무를 얻기 위해서 돈을 내었다면, 일반적으로 그 돈을 그 직무에서 회수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게다가 바쳐야 하는 돈이 엄청나게 많아 성당에 딸린 농지에서 나오는 소출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경우라면 교회직을 수행하면서 돈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영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서 또 커다란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이런 성직임명에도 많은 돈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아주 컸다. 따라서 ‘사는 시모니아’로 직무를 얻는 경우에 대개는 ‘파는 시모니아’를 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주교가, 선발된 주교 후보자에게 주교서품을 거행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경우 돈을 주지 않으면 주교서품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돈을 주고 주교서품을 얻었다고 한다면, 돈을 요구한 사람이 나쁜지 돈을 제공한 사람이 더 나쁜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성스러운 주교서품에 돈이 오고 갔다는 사실 자체가 시모니아인 것이다.

 

주교들이 사제서품이나 부제서품 등을 하고 돈을 받았다는 사료는 몇 가지 발견되고 있으나, 일반 사제들이 본당에서 활동하면서 ‘파는 시모니아’를 하는 형태에 관해서는 기록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의회 등에서 계속 시모니아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쳐야할 큰 폐단으로 비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95년의 ‘트리부르 공의회’에서는 신자들이 스스로 내는 헌금이 아닌 것으로서, 유아세례 때나 장례예식을 거행하면서 신자들한테 일정금액을 내게 하는 일은 복음정신에 위배된다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3) 넓은 의미의 시모니아

 

11세기에 들어와서 교회법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시모니아의 정의를 더 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 같은 해석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집에서 유래하고 있다. 즉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어떤 선물이나 혜택을 생각해서 수행하게 되는 모든 행위를 시모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서 윗사람의 호의를 기대해서 한 행위이거나 심지어는 말로 찬사를 기대하고 하는 행위들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당시 평신도의 성직임명과 봉건제의 상황 속에서 시모니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뿌리뽑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성당의 주인이 평신도라면 그한테 직무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주인한테 충성서약을 해야 했고, 충성서약을 한 성직자는 더 이상 하느님만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신하도 되었기 때문에 그 주인한테 여러 가지 봉사를 해야만 하였다. 또한 이런저런 봉사를 주인한테 잘하는 사람은 더 크고 높은 직무를 받게 마련이므로, 근본적으로 교회가 성직임명에 대해 자유를 갖지 못하면 시모니아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개혁’이 교회의 자유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한다면, 시모니아 역시 교회 안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뿌리뽑아야 하는 폐단이었다. 이런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수도자들이 적격이었으니, 바로 개혁된 수도자들이 교회가 주는 특전을 가지고 시모니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 ‘사제 결혼’은 다음 호로 미룬다.

 

[경향잡지, 1995년 2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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