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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5: 교회 개혁기에 나타난 은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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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9

[새로 보는 교회사 15] 교회 개혁기에 나타난 은수생활

 

 

문란해진 독신제

 

긴 박해가 끝나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서 정결을 찬양하며 금욕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정결의 덕이 부각되면서 성직자들은 금욕에 대해서 찬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독신이 가장 좋다는 교부들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결혼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처음으로 사제 독신제를 의무화한 것은 306년 스페인의 엘비라 지방 시노드에서였다. 이 시노드에서 그 지방 성직자들은 독신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모든 성직자의 의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로마제국의 행정과 법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독신생활의 정신과 법이 대체로 잘 지켜졌다.

 

성직자 독신의 근거는 교부들의 저서나 전례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대략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성체성사를 통한 자녀 생산의 영적 아버지상(象)과 고해성사를 통한 영적 중개자로서 그 역할에 적합하고, 둘째, 다른 사람에게 절제된 생활과 순결을 가르칠 때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구약의 사제직과 같이 성체성사의 사제직 역시 고귀하므로 정결하게 자신을 유지해야 하며, 넷째,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이이가 때문이며, 다섯째, 육적인 아버지가 된 사람은 복음선포에 알맞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 지켜지던 독산제가 10세기와 11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부분이 해이해졌다. 그 첫 번째 원인은 사회혼란에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사회문명이 변질되어 사회규율이나 현상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봉건제와 사유교회 제도로 인해 평신자들이 교회를 소유하고,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는 따위가 독신생활이 문란해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이 미비했다든가, 성소가 없는 이들을 교회직무에 임명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고, 결혼한 사제가 성무집행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나 가축을 치는 등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입고 먹고 살 방도가 없었던 상황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교회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 단순히 성직자가 여자를 거느렸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 또는 교회의 재산관리, 거기서 생기는 사목의 공백들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에도 교회규율을 어길 때 주어지는 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벌을 적용시킬 수 있는 권위와 힘이 부족하다는 게 또한 문제였다. 경건한 주교들이 시노드를 열어 사제직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근본적으로 성직임명의 권한이 평신자들에게 있어 법을 지키도록 할 권위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레고리오 개혁의 핵심요인은 바로 교회의 자유였다. 교회가 자신의 고유임무인 복음전파를 하려면, 우선 교회 지도자들인 성직자들 임명에 대한 자유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 교황들이 교회쇄신 시노드를 열어 교회 안의 문제로 사제들의 윤리생활을 바로잡으려는 데에도 바로 이런 뜻이 있었다. 개혁의 시발은 독일제국의 안정과 교회의 안정을 바라는 훌륭한 독일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교황들의 개혁의지를 따라준 사람들은 바로 다름아닌 개혁 수도원들의 수사들이었다. 특히 그레고리오 개혁과 동시에 나타난 새로운 정신의 수도생활이 생성되어서 전통 수도원의 형태와 아울러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쇄신을 위해 열성을 다하여 노력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1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은수생활은 바로 그 개혁의 의지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은수생활의 부흥

 

은수생활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였다. 그들은 외딴 움막이나 동굴 또는 숲속이나 산중턱에서 살았다. 이들 은수자들은 완전히 고립된 지역에 외따로 떨어지거나 또는 어떤 움막에서 동료들과 모여 살면서 지속적인 기도와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예언도 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는데, 이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들의 기행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때로는 도시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회개를 권하고는 다시 산이나 숲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일정기간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동기도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수도원을 떠날 때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정신과 활동은 황제들의 교회개혁과 선교정책과 맞아떨어져 황제 오토 3세나 하인리히 2세의 보호를 받았다. 황제들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슬라브족의 선교에 나서기를 청하였는데, 이 은수자들이 바로 선교사가 되었고 선교지에서 순교하는 순교자들이 되었다. 은수자들의 정신은 바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정신과 일치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성인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두 분 성인을 소개해 본다.

 

 

성 로무알도

 

성 로무알도는 라벤나 공작가 출신으로, 라벤나 근처의 베네딕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카탈로니아의 한 수도원장을 만나 그의 수도원에서 몇 년을 지냈다. 거기서 은수자의 대부들의 생애를 공부하고 특히 카시아노의 저서를 읽고서 은수생활의 형태를 정리하면서 일종의 규칙을 만들게 되었다. 그에게 은수생활은 수도생활의 완성이었다. 수도원과 은둔처는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하고, 수도원에서 얼마간의 수련기를 끝낸 수도자들은 은둔처에서 더욱 엄격한 침묵과 고행, 기도생활을 하도록 했다. 은수자들은 서로 떨어진 자기만의 움막을 가지고 살면서도 식생활은 공동으로 하였는데, 그 음식도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먹었다.

 

이런 원칙 아래 로무알도는 라벤나 등지에 수도자와 은수자들이 섞인 조금은 무질서한 집단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합집단이 많아지면 그곳에 장상을 임명하고 다른 곳에 가서 같은 집단을 만들곤 하였다. 1027년경에는 주변의 주교들의 도움으로 카말돌리에 은둔처를 만들고 이곳에서 다른 은둔처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로무알도 성인은 클뤼니 수도원처럼 여러 나라에 같은 체계의 은수생활을 퍼뜨려 영향력이 지속하는 체제를 마련했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후계자 베드로 다마아노의 힘이 컸으니, 그는 로무알도 성인의 방식대로 은수생활을 하였고, 로무알도 성인이 죽은 뒤에는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이 성직자들의 쇄신과 교회쇄신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힘썼다.

 

 

성 요한 구알베르토

 

성 구알베르토의 생애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로 일관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 시대에 산 분으로 교회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도 성 로무알도처럼 처음 수도원 생활은 실패하였다. 피렌체 근처의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성직매매를 하는 사람이었다. 구알베르토는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그곳을 나와 진정한 수도원을 찾기 위한 순례생활을 하였다.

 

그 뒤 성 로무알도가 세운 카말돌리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공동생활과 은수생활이 혼합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온다. 그때 은둔처의 장상이 그한테 새로운 수도체계를 세워보기를 권하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1037년에 성직매매(Simonia)와 니콜라이즘(Nicolaism ; 아마도 요한묵시록의 17장의 탕녀에 대한 심판에서 유래하며 성직자들의 여러 가지 폐단 즉 과음, 화려한 의상, 노름과 여자 거느림 따위를 총체적으로 말한다.)을 추방하려는 은수자들이 모인 발롬브로사였다. 여기서 교회를 정화하고자 쇠퇴한 수도원을 뛰쳐나온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 1049년에 그들의 책임자가 된다. 발롬브로사의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부들과 성 바실리오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었다.

 

교회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여러 개혁가들과 연대해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거였는데, 당시 성직을 매매하는 피렌체의 주교와 투쟁하여 그를 몰아내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성직자들이 교회법 안에서 살도록 독려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규율에 따라 살도록 성직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공동체로 살면 시모니아와 니콜라이즘에 빠진 사람들한테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을 주변의 주교들이 받아들여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발롬브로사의 새로운 체계는 교회 개혁운동의 일환이 되었고, 개혁 교황들이 따르고자 하는 본이 되었다. 구알베르토는 수도원 체계와 영성과 교회 안에서 수도원의 역할들을 바꾸었으나, 원칙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입각한 생활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침묵과 고행 생활을 하며 사목생활을 피했다. 그들은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가난과 혼인한 사람처럼 생활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아주 형편없는 집에서 살고, 옷은 지독하게 남루하고, 먹는 것은 너무나 부실하였으며 수입이라곤 전연 없이 육체 노동을 하며 살았다. 이런 엄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시험을 거쳐 이 시험기간이 지나야 수도자로 받아들여졌으며 수련자의 자리는 없었다. 발롬브로사의 수도자들이나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은 서원하지 않은 봉사수사의 도움없이는 자신들의 고행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들 봉사수사들이 필요한 물품구입이나 수도원의 물건을 파는 일 따위로 세상과 교류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성 로무알도는, 여러 은둔처가 독자적으로 지내면서 똑같은 위치에서 자율적으로 살면서 서로를 구속하는 것은 사랑에 따른 이유에서만 용납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성 구알베르토는 자신의 사후에는 오직 이 사랑의 구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발롬브로사를 모(母) 수도원으로 하여, 발롬브로사의 수도원장이 전체 예속 수도원의 목자나 판관 또는 장상이 되며, 해마다 전체 수도원의 장상이 모이게 하였다. 또한 일년에 몇 번씩 모(母)수도원이 예하 수도원을 방문하여 모든 수도자들이 관습을 잘 지키는지 사목하게 하는 법적 체계를 만들었다.

 

사회의 혼란으로 생긴 교회법의 문란과 사람들의 욕심으로 생긴 잘못된 체제는 개혁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 특히 개혁 교황들과 주교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들의 뒤에서, 밑바닥에서, 후원한 이들은 바로 수도생활의 개혁가들이었다. 이때 비로소 여러 가지 교회영성과 수도정신이 쇄신되고 새로운 제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3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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